언젠가부터 새해 첫 곡으로 어떤 곡을 듣느냐가 중요해졌다.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유행일까 궁금하다가도, 생각보다 오랜 인류의 습속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이 맞닿은 날은 시대와 국경을 불문하고 한 번도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일 쌓여만 가던 숫자가 순식간에 리셋 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 순간을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과 무엇보다 특별하게 보내길 원한다. 그런 자리에 풍악이 빠질 수는 없다. 미국의 '딕 클라크스 뉴 이어스 로킹 이브(Dick Clark's New year's Rockin' Eve)'가, 일본의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이, 한국의 MBC <가요대제전>이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의 이름과 형식이 정착된 건 15년 남짓이지만, <가요대제전>은 TV라는 매체가 존재하기 이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나름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프로그램이다. 1966년 <10대 가수 청백전>이라는 타이틀로 라디오 송출을 시작한 행사는 지상파의 권력이 기세등등하던 7, 80년대에는 한 해를 정리하는 주요 시상식으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덕분에 방송국과 가수 사이 오가는 다양한 신경전으로 인한 각종 파행의 온상이기도 했던 행사는 이젠 비교적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안방에서 미지근해진 귤을 까먹으며 보신각 타종을 보는 <가는 해, 오는 해> 음악 축제. 지금의 <가요대제전>의 보편적 인상이다.
덕분에 한창때의 혈기와 긴장감이 사라진 건 확실하다. 그러나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연출의 묘는 남았으니, 바로 새해를 맞이한 직후 처음으로 대중과 만날 가수, 곡이 무엇이냐다. 왕관도 트로피도 없지만, 여러 음악가가 출연하는 대형 페스티벌의 엔딩 무대나 헤드라이너 자리를 두고 펼쳐지는 신경전을 닮은 은은한 긴장이 흐른다. 여기에 요즘 유행 '새해 첫 곡'의 무게가 한 스푼 더해진다. <가요대제전>이 선정한 노래가 TV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그 해 처음으로 접하는 노래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자리에, 올해는 'STEP'이 섰다.
'STEP'은 2011년, 그룹 카라가 발표한 세 번째 정규 앨범
넘어지진 않을 거야 / 슬픔아 안녕 / 친해지지 않을 거야 / 눈물아 안녕 / 자신을 믿는 거야 / 한숨은 그만 / 이깟 고민쯤은 웃으며 Bye Bye
2023년을 여는 'STEP'을 부른 건 올해 만 24세를 맞이한 토끼띠 아이돌이었다. 우기, 아린, 유정, 츄, 예나. 그룹과 솔로로 지난해 누구보다 활발한 활약을 보인 이들이 누구보다 힘찬 모습으로 선배들의 노래에 목소리를 맞췄다. 잘해봐야 중간이나 간다는 콜라보 무대로서는 손꼽히게 멋진 결과물이었다. 지금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멤버들 덕분이기도, 지난해 케이팝을 오래 지켜봐 온 이들에게는 가슴 찡한 감동마저 전했던 카라의 복귀가 남기고 간 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래 'STEP'이 가진 힘이 있었다. 12년 전 바로 지금이 내 세상이라며 활기차게 웃고 뛰어오르던 노래는, 수많은 풍파를 거친 뒤 더 깊은 색과 맛을 내게 되었다. 다시 시작이야, 내일은 새로울 거야, 절대 난 돌아보지 않겠어, 앞만 보기도 시간을 짧아. 그때 무심코 스쳐 보냈던 노랫말이 내뿜는 기운이 다시 모인 카라 멤버들의 지난 시간에, 그들을 보며 내일을 향한 의지를 다질 후배 여성 아이돌의 희망에, 분명 쉽지 않을 우리의 새해에 드리운다. 2023년을 여는데 이보다 완벽한 노래가 또 있을까. 이래서 새해 첫 곡이 중요하구나 싶다. 노래 한 곡에 마음 한구석이 더없이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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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