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 수요일, <채널예스>에서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서울의 어느 검찰청에서 공판부 검사로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오전 재판이 끝나는 대로 황급히 법복을 벗어던지고 공판부 검사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모여 있는 식당에 합류했다. 테이블에는 미리 주문한 김치찌개가 막 끓기 시작한 참이었다. 식당 한쪽 주류 냉장고 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후배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맥주 마시고 싶다는 생각!"
"오후에도 재판 있으시죠?"
"물론이지!"
거기까지 대화하고 우리는 서둘러 김치찌개를 퍼 먹었다. "계란말이도 시켰지?" 한마디 더 했을 뿐. 맥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말이 서로 간에 없었다.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은 이유는 오전 재판으로 이미 말할 기력이 쇠한 상태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맥주 운운 자체가 서로 간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재판이 없다 한들 대한민국 공무원이 대낮부터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낮맥을 하는 그림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저 BTS를 만나고 싶다거나 우주여행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정도의 허황한 바램? 오전 내내 재판하느라 입에 단내 나게 힘들었다는 말을 나는 그리 하는 것이고, 오후 시간 또한 다를 것 없지 않겠느냐는 말을 후배는 그리 한 것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청사 인근 커피숍에는 카페인을 갈구하는 직장인들로 이미 가득했다. 급한 성미에 기다리지 못하고 편의점에서 1+1 커피를 사 들고 들어가며 후배가 물었다.
"저녁에 한잔 하실래요?"
"안 돼, 내일 재판 준비해야지."
"어차피 한잔만 할 거잖아요."
"나는 한잔만인데, 너는 한잔만이 안 되잖아."
'한잔만'은 나의 공식 주량이다. 소주도 막걸리도 와인도 맥주도, 모든 술은 그에 맞는 잔에 한잔! 그 이상을 잘 마시지 못한다. 주류 냉장고를 뚫을 기세로 쳐다보며 금지된 낮맥을 갈망하는 자 치고는 어이없을 정도로 하찮은 알코올 해독 능력을 가졌다. 그런 것에 비하면 또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주 술 생각을 한다. 많이 마시지 못하지만 단 한잔 첫 모금의 미각적 쾌감을 즐긴다. 많이 못 마신다고 해서 열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열망이란 대부분 그런 것이다. 가질 수 없어서 더욱 간절해지는 것들. 그런 이유로 그 시절 쒸-원한 맥주 한잔의 갈망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알콜 분해 효소를 가지지 못한 비루한 도시 노동자의 영혼에 찾아들었다.
그런가하면 나와 공허한 맥주타령을 주고받는 그녀는 나의 하나뿐인 책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에 이른바 '방구 씨'로 나오는 인물이다. 먹이를 삼키는 고래상어처럼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단숨에 술 한 잔을 꿀꺽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자인데, 문제는 한잔만으로 끝내는 능력이 없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잔만 마시는 나도, 한잔만은 못 마시는 그녀에게도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매일 밀려오는 재판의 물결을 파도타기하며 가끔 낮맥이라거나 자유라거나 하는 멀고 아득한 것들을 열망하고, 그 열망을 공허하게 나눌 뿐이었다.
공허한 나머지 어떤 날은 이런 기획을 했다.
"우리가 책을 씁시다. 제목은 '밤낮으로 술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검사의 은밀한 사생활', 어때요?"
"제목이 그렇게 길다고?"
"표지는 핫핑크로 해서 제목만으로 가득 채우는 거예요. 잘 팔릴 거 같지 않아요?"
"양쪽으로부터 욕을 얻어먹겠지. 조직에서는 요상한 제목의 책으로 공무원으로서의 품위를 훼손했다고, 독자들로부터는 매일 일만 한다는 내용이고 은밀할 것도 사생활이랄 것도 없다고..."
당연하게도 그런 기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방구씨는 자기라도 은밀한 사생활 영역을 보충해 보겠다며 사표를 던지고 나갔다. 핫핑크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씩 찬란한 한낮의 햇살 아래 맥주잔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보내오곤 한다. 실없는 농담이 싹이 되었는지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실제로 책을 냈다. 제목부터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누가 봐도 공무원이 냈음직한, 핫핑크 따위 상상할 수 없는 반듯한 책이다. 책 내용이 핫하지도 은밀하지도 않은 덕분에 조직으로부터 욕을 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내 책을 읽었다는 전국의 동료들로부터 은밀한 연락이 왔다. 그들은 그 반듯한 책에 내밀하게 숨겨져 있는 나의 열망을 용케도 알아보았다고 말했다. 그들 역시 차가운 검사 페이스 아래 남모르게 뜨거운 무엇을 감추고 있는 자들임이 분명했다. 마피아 게임에서 고개를 들고 서로를 확인하는 마피아들처럼 우리는 조직 모르게 은밀히 씩 웃었다.
숙련된 법률 노동자로서, 대부분의 날들에 꿈적 없이 앉아 온갖 세상의 비극이 담긴 기록들을 헤집다가 연차가 쌓이고 나도 승진이란 걸 했다. 작은 지방 도시의 지청장이 되고 나서 검사 J의 생활은 제법 변했다. 여전히 어깨가 무겁고 눈이 뻐근하지만 업무에 허덕이다 겨우 남은 기력을 짜내어 주류 냉장고 속 맥주병을 열망하던 시절보다는 분명 나아졌다. 게다가 기관장의 미덕은 정시퇴근에 있다. 퇴근 시간 이후에 사무실에 남아 직원들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6시가 되자마자 쫒기 듯 칼퇴근을 하고 나면 이전에는 가져본 적 없는 '저녁'이라는 것이 멀뚱히 펼쳐진다. 핫핑크의 사생활이든 애주가의 로망이든 마침내 실현해 봄직한 날들이 온 것이다.
'자, 준비하시고... 쏘세요!'
'쏘시면... 되는데, 뭘 쏘지? 어디로 쏘지?' 기대와는 달리, 이 작고 단정한 동네에서 가게들은 일찍 문을 닫고 칼퇴근한 지청장은 갈 곳이 없다. 아직 남은 해가 길게 꼬리를 끌며 서쪽으로 기울고, 북천의 왜가리들도 둥지를 향해 날아간다. 방향을 잃은 발걸음이 잠시 방황하다, 왜가리 행렬이 날아가는 쪽으로 걸어 나도 집으로 간다. 가다가 멈춰 서서 노을이 내린 북천의 수면위로 은색 피라미들이 튀어 오르는 것을 구경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 너무 일찍 들어가게 되니까... 일부러 조금 멀리 돌아가는 퇴근길!
집에 도착하면 냉동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오늘은 냉동 곤드레밥에 특별히 계란 후라이도 추가한다. 1인분의 식사가 단정히 놓인 식탁에 앉아 음악도 없이 고요히 먹는다. 속도도 시간도 맞출 필요 없이 느리게 음식을 씹는다. 문득 만족스럽다. 내가 오래 열망하던 사생활은 실은 이런 것이었구나.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어 별 일 없이 깊어지는 저녁을 응시한다. 차게 식은 맥주가 냉장고에 있지만 오늘은 참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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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원(대구지방검찰청 상주지청 검사(지청장))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을 썼다.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가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 사람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황성주
2023.05.01
finesangmi
2023.04.21
친애하는 민원인 잘 읽었습니다. 차가워 보이지만. 차갑게 느껴지지않는 검사님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