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옥타비아』
유진목 저/백두리 그림 | 알마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면 율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인간은 정말 대단해요.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죠?”
소설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디스옥타비아』는 기본적으로 소설에 해당한다. 화자인 ‘모’는 자기 생각과 경험을 일기로 쓰는 중이지만, 그 내용은 전부 『디스옥타비아』라는 소설을 이룬다. 다만 ‘모’의 삶은 저자의 실제 경험과 상당히 겹치리라는 짐작이 간다. 화자와 저자 어느 쪽이든 글쓴이는 살아있음에 괴로워하면서 글을 매일 썼고(매일 쓰려고 매일 생각했고), 안정적이지 못했던 가정환경을 벗어나 홀로 내달렸다. 외로움 따위는 없는 대범한 사람으로 살려고 애쓰면서 자주 죽음을 생각했다. ‘그’를 만난 뒤로는 사랑에 푹 잠겨 몸서리칠 정도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의 차이점은 ‘모’의 인생 경험이 저자보다 훨씬 앞선다는 점이다. 『디스옥타비아』의 배경은 2059년이다. ‘모’는 처음부터 저자보다 사십여 년을 더 겪은 노인으로 태어났다. 그러니까 저자가 당면해야 하는 불확실한 미래가 ‘모’의 시점을 거치면 이미 확정된 과거로 변한다. 저자는 화자의 손을 빌려 미래의 일기를 미리 쓰는 중이다.
『디스옥타비아』에 손을 뻗었을 때 마침 나는 수필을 찾던 중이었다. 한창 글이 고파서 몇몇 이름을 추천받았다. 추천이 무색하게 결국 소설로 길을 틀었지만, 아주 틀린 선택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게다가 제목의 ‘옥타비아’가 옥타비아 버틀러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버틀러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아쉽게도 국내에는 별로 출간되지 않았지만, 옥타비아 버틀러는 뛰어난 소설을 쓴 흑인 여성 SF 작가다. ‘흑인’ ‘여성’ ‘SF’라는 세 단어는 버틀러를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버틀러가 작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미국 SF 작가는 대체로 백인 남성이었다. 흑인 작가는 매우 드물었다. 흑인 여성 작가는 (거의 확실하게) 유일했다. SF 작가를 위한 테이블에 버틀러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버틀러가 소설을 발표할수록 테이블의 형태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야생종』(혹은 『와일드 시드』)의 주인공은 남자 안타고니스트와는 다른 방식의 강함을 지닌 흑인 여성이다. 주인공들은 삶에는 자연히 고통이 수반된다는 듯한 태도로 폭력을 견딘다. 인물의 성별, 인종, 출신지와 거주지 등의 정체성은 단일하지 않다. 버틀러의 소설에서 사랑은 여러 충동이 복잡하게 얽힌 혼합물이며, 로맨틱한 애정은 피식자와 포식자, 노예와 주인처럼 불편한 현실과 공존한다.
‘디스옥타비아’라는 제목은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킨다. 유토피아가 이상향을 가리킨다면 디스토피아는 반대로 절망적인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때때로 같은 곳이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로 향하다가 실패하여 부작용이 나타난 곳이다. ‘모’가 사는 세상도 어떤 면에서는 이상적인 모습을 취한다.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은 앞날을 걱정하느라 힘겨워하지 않는다. ‘국가’는 조용하고 평탄한, 그저 주어진 대로 살면 되는 생활을 보장한다. ‘센터’에서 자란 젊은 사람들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데 익숙하다. “그들의 시간은 단지 오늘뿐이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가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시간의 단위이다.” 하루하루가 똑같이 전개된다면 오늘과 내일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심하거나 앞날에 대비하지 않아도 된다. 이들은 ‘국가’에 자유를 넘기는 대신 삶의 무게에서도 벗어난다. 다른 삶이란 없다. “거주 지역, 교육구, 직업군 따위는 이제 이동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그대로 살아간다.”
노인인 ‘모’는 ‘엘더’에 수용된다. 엘더의 환경은 꽤 풍요롭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지 않고, 간병인이 생활을 살뜰히 보살핀다. ‘모’는 두어 시간 일하는 외에는 책무가 없으므로 한적하게 바다를 산책하거나 남몰래 일기를 쓴다. 엘더는 여생을 평탄하게 보낼 만한 곳이다. 국가는 노인들이 불만 없이 얌전히 지내도록 예산을 넉넉하게 들여 엘더를 유지한다. 노인은 위험하다. 그들은 과거에는 세상이 달랐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시스템을 불신하고 삶이란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보았으므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선택하는 행위로 질서를 망가뜨릴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노인은 현재 사회에서 격리되어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자유는 과거에나 존재했을 뿐이어야 한다. 엘더가 전면부로 사용하는 건물은 본래 박물관이었던 곳이다.
다만 『디스옥타비아』에서 디스토피아 사회의 문제는 변두리에 있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모’의 개인적인 기록에 치중한다. 국가의 시스템은 분명히 ‘모’의 삶을 뒤덮고 있지만 그 위치는 그림을 담는 종이에 가깝다. 2059년은 현재와 달리 백지 상태이기에 ‘모’의 슬픔과 방황이 그리는 궤적을 수월하게 담아낸다. 이 그림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무자비하게 흐르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로 채색되어 있다. 그리고 관객/독자가 감상하는 것은 종이가 아니라 그림이다. 종이의 모습은 그림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디스옥타비아』는 디스토피아 문학 혹은 SF의 장르적 관습과 거리를 두고 있다. 대신에 소설은 2059년 이전의 시간을 과거로 규정하면서 시대착오적인 독특한 시간 감각을 자아낸다. 물론 시대착오적 감각이 스팀펑크나 대체역사 장르에서는 매우 빈번히 등장하는 것이긴 하지만, 『디스옥타비아』는 ‘모’라는 개인의 이야기 속에서만 착오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비-장르적이다.
소설의 시간은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모’의 일기는 2059년 8월 31일부터 같은 해 7월 13일로 흐른다. 뒤에 등장하는 내용일수록 과거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니 정확히는 소설의 시작점이 ‘모’의 종점이다. 여기서는 인과관계가 차곡차곡 연결되지 않는다. 독자는 출발점에 밧줄을 고정한 뒤에 절벽을 타고 내려간다. ‘모’에게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채로 소설을 더듬으며 시간에 역행한다. 아래로, 뒤로, 갈수록 현재에 가까워지는 방향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모’가 구현된 방식이다. 미래의 어느 지점을 짚은 다음에 거기서 현재로 이어지는 경로를 찾는 것. 작중에서 ‘모’는 자신의 젊은 시절에 관해 이렇게 적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죽고 싶었다. 그 시절에 나는 갑작스런 사고나 병으로 혼자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지, 그 삶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은 바로 2059년의 노인으로 도약한다. “지금은 어떤가. 사랑으로 내 곁을 흐르던 시간을 나는 어떻게 잊기 시작했는가. 모든 것과 이별한 내가 지금 여기에 가만히 숨 쉬고 있다.”
한편 『디스옥타비아』를 자전적 소설로 읽는다면, 저자에게 왜 하필 ‘모든 것과 이별한’ 다음에야 이야기를 시작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어차피 상상으로 만드는 이야기라면 다른 시간, 다른 상황을 고를 수도 있지 않냐고. 픽션에서조차 굳이 슬픔과 상실을 기정사실로 만들어야만 하냐고. ‘모’도 글을 쓰면서 스스로 따졌던 의문이다. “이것보다 행복하려고 할 수는 없어? 좀 더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거야?” 행복의 한가운데 있을 때조차 ‘모’는 어쩔 수 없이 파국을 예기한다. 연인과 함께라면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느낄 만큼 행복해지자 “바로 그 점에 절망”한다. 시간이 흐르는 한 행복은 절대로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센터의 사람들과 달리 ‘모’는 오늘이 끝나고 내일이 닥치는 데 익숙하다. 연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오히려 그가 죽는 상황을 계속해서 상상한다. ‘모’의 불안은 그가 정말로 죽어야만 사라지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불안해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잃고 나면 더는 잃을 것이 없다. 그러니 ‘모’의 “주름진 얼굴”이 기정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형체를 갖출수록, 미래에 닥쳐올 상실을 (가상으로나마) 과거로 삼을수록 화자/저자는 오히려 안심할 수 있다.
다른 시간, 다른 상황을 상상하는 ‘모’의 관점은 간병인인 ‘율리’를 뒤흔든다. 엘더에서 일하는 ‘율리’는 인공적인 결합으로 만들어진 첫 세대에 속한다. 그는 간병인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태어났다. 다른 선택이 가능했던 적은 없다. ‘모’와 처음 만났을 때 ‘율리’는 간병인답게 헌신적이고 친절한 마음을 보인다. 하지만 나중에는 (다시 말해, 책의 앞부분에서는) ‘모’에게 증오를 품는다. 자신에게는 없었던 내일을, 불확실성을, 가능성을 ‘모’의 이야기에서 찾아버렸기 때문이다. 잡담을 나누던 ‘모’가 무심코 ‘율리’에게 근무가 끝나면 무슨 옷으로 갈아입냐고 물었을 때, ‘율리’는 갑자기 적대감을 느낀다. 그는 다른 옷을 골라 갈아입는다는 발상을 ‘모’의 질문에서 처음 접했을 것이다. ‘율리’의 대답에는 질시와 분노가 묻어난다. “나는 언제나 이 옷을 입고 있어요. (...) 당신처럼요.”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방법은 알 수 있다. 소설의 끝에 위치한 ‘모’의 첫 일기는 독자를 상정하지 않는다. “기한도 없고 약속도 없다. 다만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잠자코 쓰면 된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혼자서. 누군가 읽으리라는 일말의 기대도 없이. (...) 영영 사라져버린다면 그것대로 괜찮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율리’가 ‘모’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인지하게 되면서, ‘모’의 일기는 ‘율리’가 읽을지도 모르는 기록으로 변한다. 글쓰기는 ‘모’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만드는 행위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모’의 삶을 상상하게 만드는 불온한 장치다. ‘모’는 ‘율리’가 자신을 통해 센터와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모’ 역시 글을 쓰며 ‘율리’의 내일을 상상한다. “율리는 자신이 경험한 삶과 이 세계를 품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될까? 만약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나의 기록이 도움이 될까?”
작중 내용에 따르면 ‘모’는 화자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엘더에 들어가면서 그는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을 ‘모’라고 소개한다. 아무개라는 뜻의 모가 아니라, ‘두부 한 모’라고 셀 때의 모다. ‘모서리, 모난 곳, 모퉁이’와 뿌리가 같은 말인데, 두부 자체는 물렁물렁하더라도 네모로 각지게 썰린 모양 때문에 ‘모’가 되었다. 나는 화자인 ‘모’가 자신의 날카로움을 알고 이름을 정한 것인지 궁금하다. 모퉁이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당장은 무해해도 결국은 치명적이니까.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디스옥타비아
출판사 | 알마

심완선(SF 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키워드로 여행하는 SF 세계』 『우리는 SF를 좋아해: 오늘을 쓰는 한국의 SF 작가 인터뷰집』 『SF는 정말 끝내주는데』가 있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