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름답고 슬픈 젊은 날의 기억 『위대한 캣츠비』 -만화작가 강도하
강도하 씨는 마감을 막 끝낸 만화가의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오늘 새벽 5시에 『위대한 캣츠비』 5권 표지 작업을 막 끝냈어요. 마감하다 뛰어나와서 모습이 좀 그렇습니다.” 전력질주를 한 다음 찾아오는 피로감에 푹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200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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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하 씨는 마감을 막 끝낸 만화가의 모습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오늘 새벽 5시에 『위대한 캣츠비』 5권 표지 작업을 막 끝냈어요. 마감하다 뛰어나와서 모습이 좀 그렇습니다.” 전력질주를 한 다음 찾아오는 피로감에 푹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속이 쓰리다며 우유를 주문했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명하기보단 차라리 악명이 높았으면 좋겠다
『위대한 캣츠비』로 처음 강도하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신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1987년에 데뷔한 ‘중견 만화가’다. ‘언더그라운드 만화 1세대’라고 불리던 그는 2001년 『슬픈나라 비통도시』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4년 연재를 시작한 『위대한 캣츠비』로, 그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위대한 캣츠비』의 영화 판권도 이미 팔린 상태다.
『위대한 캣츠비』의 연재가 끝난 후 정신없이 인터뷰를 했다. 작품을 연재하는 중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연재가 끝나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대한민국 만화대상’과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자 인터뷰는 더욱 많아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50번 정도 인터뷰를 한 것 같단다.
“그런데 다들 작품보다 제 사생활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더군요. 대중이 알고 싶다는 논리로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자꾸 하니까 솔직히 불편했어요.” 특히 아내와 자신에 대한 질문들은 때론 ‘폭력’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왜 우리 부부에게 싸구려 관심들을 가지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70살이 되어도 내 인터뷰 기사에는 누구누구의 남편이라는, 그리고 괄호 열고, 나이, 괄호 닫고 그렇게 씌어질 것 같아요.” ‘유명해졌다’는 말에 대해서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듯 이야기를 이었다.
“근데 제가 정말 유명하긴 유명한가요? 유명하다면 옛날보다 더 좋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처럼 유명해지기보다 악명이 높았으면 좋겠어요. 악명이 차라리 새 작품을 쓰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하루 세 시간씩 자면서 『위대한 캣츠비』에 매달리다
2004년 시작한 연재가 끝나기까지 하루 3시간씩 자면서 『위대한 캣츠비』를 그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 연재 끝나면 석 달 동안 밥도 주지 말고, 물도 주지 마. 그냥 쉴 거야’ 그랬어요.” 그렇지만 연재가 끝난 후 별로 쉬지 못했다고 한다.
“장편만화는 사실 ‘마감’이 없어요. 콩트 만화는 미리 그려둘 수도 있고, 경조사에도 가고,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해외여행도 갈 수 있어요. 칼 같은 신문 연재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장편 연재는 ‘끝’자가 나올 때까지 쉴 수가 없어요. 한 회분만 삐끗해도 안 됩니다. 한 회만 잘못 가도 전체 이야기에 균열이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무너져 버립니다. 수정이 불가능하죠.”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작가는 그 작품 속에서 숨을 쉬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생활한다.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감정선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업데이트 횟수를 반으로 줄였다. 연재 횟수가 줄었으니 더 편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한 주에 두 번 업데이트를 하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후반부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뒤로 갈수록 한 회에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많아요. 두 번 업데이트 한 것을 합친 것보다 내용이 더 많아요. 정말 힘들게 그렸습니다. 돈도 포기하고(웹에서 연재되는 만화의 원고료는 분량과 상관없이 회당 고료가 지급된다), 시간도 체력도 포기하고 매달렸습니다.” 길이는 늘어나고, 담고 있는 감정의 밀도와 강도는 더욱 세졌다.
작품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동 강도는 ‘상상초월’이다. 배경을 예로 들어보자. “한 회에 보통 배경이 여섯 컷이 들어가요.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배경 컷이 늘어서 열두 컷이 들어갈 때도 있었어요. 배경 한 컷 그리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아세요? 다섯 시간이에요. 이것은 굉장히 ‘빠른’ 것에 속합니다.” 그렇게 작업을 해야 했으니 하루에 세 시간은 고사하고 밤을 새는 날도 많았겠다. 온라인상에서 만화는 특히 쉽게 소비된다. 한 회를 보는데 길어야 3~4분. 그래서인지 보는 사람들은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시간과 공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나가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그런 점이 그리는 사람으로선 서운하지 않았을까?
오프라인에서 마감이 가장 빠른 것은 주간지다. 작가들은 격주간지 마감도 ‘살인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3일에 한 번씩 원고를 그리고 업데이트해야 했다. 살인적인 마감에 시달릴 뿐 아니라 “업데이트가 왜 이렇게 느리냐”고 아우성치는 독자들의 재촉에도 시달려야 했다. “1년 동안 매일 세 시간 밖에 못자고 만화 그렸다고 하면 기자분들이 그래요. ‘에이 우리도 마감하는데요. 사람이 어떻게 세 시간만 자고 사나요.’ 근데 정말 그랬어요.”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건데 지금도 사정은 별반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매일은 만화에 점령당해 있었다.
자비로 『위대한 캣츠비』를 출판하다
『위대한 캣츠비』는 자비로 출판되었다. “애니북스 쪽에서는 유통을 맡아서 배급과 마케팅, 창고관리를 담당하고 있어요.” 작품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위대한 캣츠비』를 공들여 만든다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돈도, 시간도, 체력도 생각 안하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로 작가가 할 일은 아니죠. 다행히 이럭저럭 팔려서 손해는 안 봤어요.”
『위대한 캣츠비』 정도 되는 작품이라면 자비출판을 하지 않아도 출판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일까? “출판의 전체 과정을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지금 출판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욕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먼저 만화 전문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원고를 들고 담당자를 몇 번 만났지만 잘 안 되었어요. 그쪽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으니까요.” 그러다 애니북스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 책이 나오게 되었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작가가 자기 시스템만 빌려 쓰는 것이니까 달갑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런데 애니북스 사장님께서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없다’고 하시고는 책의 유통을 맡아주셨어요.” 책 홍보를 위해 인터뷰도 많이 했다. “일간지, 주간지, 전문지, 여성지, 웹진까지 안 해본 매체가 없어요. 하다보니 어디는 했는데 어디는 안할 수도 없고요.” 인터뷰를 하다보면 비슷한 질문이 계속 반복될 텐데 지겹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대답할 때마다 더 재밌게 버전이 바뀌거든요.”
슬퍼서 아름다운 청춘, 그 청춘을 그린 즐거움
“살면서 경험하는 서러움, 배신, 상실… 그런 것을 『위대한 캣츠비』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스물여섯 해 지난 수컷, 야망 없는 날백수’, 직업을 선택할 권리란 애초부터 주제넘은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퍼석퍼석해질 일이 없도록 땀을 흘리는 캣츠비가 좁은 골목길을 올라간다. 그리고 마지막 회에서 같은 골목길을 페르수가 올라간다. 그녀의 나레이션은 첫 회 캣츠비의 그것과 무척 닮아있다. 스물여섯의 캣츠비와 스물일곱의 페르수 그리고 같은 골목길과 조금은 변한 풍경들. 그 일 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 궁금증이 『위대한 캣츠비』를 그리게 했다. “저 역시 그 일 년 사이, 그 풍경의 변화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스토리를 쓰고, 8개월 동안 콘티를 짰죠.”
“구김 없이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캣츠비, 하운드, 페르수, 선의 청춘은 참으로 남루한 C급 인생들이다. 후반부에 나오는 그들의 빛나다 못해 사랑스러운 대학시절과 비교하면 그들의 스물여섯에서 스물일곱은 강제철거 직전의 마을처럼 스산하다. 손바닥만 한 파란 하늘을 보고도 “아직 있어.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든 그들의 한 해는 청춘을 앓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꼭 여며둔 지난날을 다시 펼쳐보게 한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위대한 캣츠비』에 등장한 인물들이 느낌 감정은 대부분 경험해 보았을 겁니다. 많은 독자들이 『위대한 캣츠비』에서 느끼는 감정은 공감이죠.”
『위대한 캣츠비』의 캐릭터들이 작가와 닮은 구석이 많다. “하운두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제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았어요.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렇게 표현하기 힘든 하운두의 화법이 저와 닮았죠. 내적인 망설임은 캣츠비가 닮았고, 무서우리만큼 잘 정리하는 것은 페르수가 닮았죠. 사실, 모든 캐릭터는 작가의 분신입니다.”
가난한 젊은이들의 청춘 그리고 사랑. 어쩌면 너무도 많이 이야기된 주제다. 그렇지만 그는 그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직도 청춘인가, 아직도 사랑인가’ 라고 비판한 분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과연 청춘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나요? 몇몇 청춘물에 실망했다고 청춘물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죠. 『위대한 캣츠비』에서는 현실의 고루함보다는 청춘의 고루함을 전략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외형은 청춘물이지만 그 속에는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죠.” 그러면서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청춘’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하고 반문했다.
나는 나의 만화를 그린다
만화가에게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줘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만화를 읽는 보통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웹으로 공간을 옮겼다. 『위대한 캣츠비』는 웹에서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가 웹으로 공간을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품을 연재할 잡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 만화잡지를 읽던 사람과 온라인으로 연재되는 만화를 보는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만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웹에서 만화를 연재하고 있기 때문에 강도하 씨를 웹만화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수식어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는 만화가고 만화를 그립니다. 연재매체가 무엇이 되었든 거기에 적응해서 내 만화를 그릴 뿐입니다. 앞에 붙은 수식어에 휘둘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웹만화가‘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웹만화 자체가 아직 규정된 장르가 아니라는 데에서도 기인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저는 누가 저를 웹만화가라고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오프라인에서 잡지가 팔리고 작품을 실을 수 있었다면 웹으로 연재공간을 옮기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만화가 지금 ’자멸의 길‘을 가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온라인 만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다
온라인 만화는 세로에 대한 제한이 없다. “세로는 원 없이 길어질 수 있죠. 그렇지만 가로 폭의 제한은 엄격합니다. 좁은 통로를 걸어가는 느낌이죠. 스크롤을 이용해 페이지를 내리기 때문에 아래로 흐르면서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스크롤 속에서 감정을 어떻게 유도할까에 대한 것이다.
“만화책은 쪽넘김을 통해 감정의 축적을 보여준다면, 웹에서는 휠을 움직이며 연속 필름처럼 장면을 전환하죠. 여러 가지 흥미로운 실험들이 가능합니다.”
『위대한 캣츠비』에서 시도된 것들 중에 손꼽을 만한 것으로, 이미지가 보고 있는 사람을 관통하는 듯한 효과나 스크롤을 내리면서 점점 감정의 강도가 세지는 효과,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효과 등을 들 수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움직임이 스크롤을 통해 구현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위대한 캣츠비』를 읽으면서 느꼈던 가슴 조이는 듯한 느낌,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강하게 감정에 몰입시키려고 작가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작가가 예로 든 장면은 ‘몽부인의 비밀의 방.’
“‘몽부인의 비밀의 방’을 보면 스크롤을 내릴수록 이미지는 보는 사람을 정면으로 관통합니다.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무섭게 얽히는지가 느껴집니다. 제가 시도한 것 말고도 다양한 시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아직은 백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만화가로 산다는 것
만화가의 일상은 만화를 그리는 즐거움을 본인이 느끼지 못한다면 도무지 배겨 낼 재간이 없을 만큼 혹독하다. “일정 자체가 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감이 있어야 밥 먹고 산다는 말도 있지만 한국에서 만화가로 사는 것이 비참할 때가 있어요. 유럽에서는 만화를 ‘생산’해 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만화는 상업 논리가 적용되는 산업이라면, 유럽에서는 미학 논리가 지배하는 예술의 한 장르다. 만화를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은 그에게 유럽의 환경은 부럽기 그지없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50살이 되면 만화를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에 대해 좀 더 질문해보았다. “20대 때에는 정말 열심히 놀았어요. 이른 나이에(19세)에 데뷔해서 만화를 그리고 있었지만 일과 생활이 적당한 배분되어 있었죠. 지금은 만화가 제 삶을 다 갉아먹고 있어요. 50살에 그만 그리겠다는 말에 ‘당신에게 만화는 그렇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냐’고 화를 내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먹고 살기 위해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만화가 직업인 사람은 80살이 되어도 만화를 포기 못해요. 오만방자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지금 만화에 제 자신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습니다. 기력이 떨어졌는데 만화를 그린다는 것이 더 말이 안 되지 않나요?”
나는 아직 청춘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 물리적으로는 청춘을 벗어나는 나이지만 여전히 자신은 청춘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삼십대 중반이 되면 대부분 자기 인생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견적이 나오는 거지요. 이때 후부터는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가정이나 일 등에서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덩어리가 무거워지죠. 그때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때까지 쌓아온 것에 하나씩 보태가는 작업이기도 해요.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요. 그런 인생이 너무 재미없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는 평생을 청춘으로 살겠다고 한다.
청춘은 불투명하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가슴이 설렌다. “『위대한 캣츠비』의 ‘두 개의 심장’ 편을 보면 캣츠비와 하운두가 나른한 봄햇살을 맞으며 사티의 음악을 듣고 있어요. 잔디밭에 누워서요. 그런 게 청춘이죠. 그 둘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독자들은 알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아름답잖아요.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의 마지막 장면처럼요.” 에릭 사티의 ‘짐노페티’는 그가 ‘두 개의 심장’ 편을 그릴 때 계속 듣고 있었던 음악이기도 하다. “캣츠비가 선택한 1번은 미래에 대한 서글픔을 적절하게 표현했고, 하운두가 선택한 2번은 젊음의 슬픔이 절절하게 느껴져요.”
그는 자신의 인생에 오직 ‘만화’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로의 삶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의 삶이 있고, 쉴 수 있는 여생이 필요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그는 앞으로 10년 정도만 만화를 더 그릴 생각이다. “만화를 그리는 것,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들은 일방적으로 제 에너지를 나눠주는 거잖아요. 지금까지는 주로 이렇게 에너지를 주는 쪽이었는데, 만화를 그만두는 시점에서는 타인에게 에너지를 받는 입장이 되고 싶어요.”
청춘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로맨스 킬러』
다음 작품은 작가가 명명한 청춘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로맨스 킬러』라고 한다. 원래는 『위대한 캣츠비』의 등장인물인 ‘선’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선’이라는 제목으로 그릴 생각이었지만 동어반복이라고 생각해 그만두었다.
“원래 ‘선’이란 캐릭터는 다음 작품을 염두에 두고 그린 거예요. 책 속에는 선의 과거에 대해서 거의 언급이 없죠. 그런데 사실 선에게는 자신만의 생활이 있는 것이거든요. 만화에서는 캣츠비가 선의 유일한 남자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캣츠비는 선에게 여러 남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어요. ‘아름다운 선’을 그리면 재미도 있고, 독자들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작가로서 이미 『위대한 캣츠비』에서 그렸던 것을 다시 변주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어요. 같은 나이, 같은 시각, 그리고 한 작품에서 이미 드러난 인물에 대해 우려낼 거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야겠다고 느꼈어요.”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많은 분들이 만화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분들이 만화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방법이 자기중심적이지 않는가, 사랑에 포함되는 실천적인 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대여점과 스캔 만화 등 창작자의 권리가 짓밟히며, 출판 만화가 설 곳을 잃고 있는 현실에서 만화를 그리는, ‘만화의 부패 뒤에는 작가의 부패가 있다‘고 만화계 내부의 현실 역시 냉정하게 비판하는 그는 이런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꼭 사서 보세요”라고. 그리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유명하기보단 차라리 악명이 높았으면 좋겠다
『위대한 캣츠비』로 처음 강도하를 만난 사람들은 그를 신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1987년에 데뷔한 ‘중견 만화가’다. ‘언더그라운드 만화 1세대’라고 불리던 그는 2001년 『슬픈나라 비통도시』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4년 연재를 시작한 『위대한 캣츠비』로, 그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위대한 캣츠비』의 영화 판권도 이미 팔린 상태다.
『위대한 캣츠비』의 연재가 끝난 후 정신없이 인터뷰를 했다. 작품을 연재하는 중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연재가 끝나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대한민국 만화대상’과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자 인터뷰는 더욱 많아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50번 정도 인터뷰를 한 것 같단다.
“그런데 다들 작품보다 제 사생활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더군요. 대중이 알고 싶다는 논리로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자꾸 하니까 솔직히 불편했어요.” 특히 아내와 자신에 대한 질문들은 때론 ‘폭력’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왜 우리 부부에게 싸구려 관심들을 가지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70살이 되어도 내 인터뷰 기사에는 누구누구의 남편이라는, 그리고 괄호 열고, 나이, 괄호 닫고 그렇게 씌어질 것 같아요.” ‘유명해졌다’는 말에 대해서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듯 이야기를 이었다.
“근데 제가 정말 유명하긴 유명한가요? 유명하다면 옛날보다 더 좋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처럼 유명해지기보다 악명이 높았으면 좋겠어요. 악명이 차라리 새 작품을 쓰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하루 세 시간씩 자면서 『위대한 캣츠비』에 매달리다
2004년 시작한 연재가 끝나기까지 하루 3시간씩 자면서 『위대한 캣츠비』를 그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 연재 끝나면 석 달 동안 밥도 주지 말고, 물도 주지 마. 그냥 쉴 거야’ 그랬어요.” 그렇지만 연재가 끝난 후 별로 쉬지 못했다고 한다.
“장편만화는 사실 ‘마감’이 없어요. 콩트 만화는 미리 그려둘 수도 있고, 경조사에도 가고,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고, 해외여행도 갈 수 있어요. 칼 같은 신문 연재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장편 연재는 ‘끝’자가 나올 때까지 쉴 수가 없어요. 한 회분만 삐끗해도 안 됩니다. 한 회만 잘못 가도 전체 이야기에 균열이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이야기는 무너져 버립니다. 수정이 불가능하죠.”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작가는 그 작품 속에서 숨을 쉬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생활한다.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감정선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업데이트 횟수를 반으로 줄였다. 연재 횟수가 줄었으니 더 편하지 않겠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한 주에 두 번 업데이트를 하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한다.
“후반부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뒤로 갈수록 한 회에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많아요. 두 번 업데이트 한 것을 합친 것보다 내용이 더 많아요. 정말 힘들게 그렸습니다. 돈도 포기하고(웹에서 연재되는 만화의 원고료는 분량과 상관없이 회당 고료가 지급된다), 시간도 체력도 포기하고 매달렸습니다.” 길이는 늘어나고, 담고 있는 감정의 밀도와 강도는 더욱 세졌다.
작품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동 강도는 ‘상상초월’이다. 배경을 예로 들어보자. “한 회에 보통 배경이 여섯 컷이 들어가요.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배경 컷이 늘어서 열두 컷이 들어갈 때도 있었어요. 배경 한 컷 그리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아세요? 다섯 시간이에요. 이것은 굉장히 ‘빠른’ 것에 속합니다.” 그렇게 작업을 해야 했으니 하루에 세 시간은 고사하고 밤을 새는 날도 많았겠다. 온라인상에서 만화는 특히 쉽게 소비된다. 한 회를 보는데 길어야 3~4분. 그래서인지 보는 사람들은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시간과 공을 들여 작품을 만들어나가는지 쉽게 잊어버린다. 그런 점이 그리는 사람으로선 서운하지 않았을까?
오프라인에서 마감이 가장 빠른 것은 주간지다. 작가들은 격주간지 마감도 ‘살인적’으로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경우는 3일에 한 번씩 원고를 그리고 업데이트해야 했다. 살인적인 마감에 시달릴 뿐 아니라 “업데이트가 왜 이렇게 느리냐”고 아우성치는 독자들의 재촉에도 시달려야 했다. “1년 동안 매일 세 시간 밖에 못자고 만화 그렸다고 하면 기자분들이 그래요. ‘에이 우리도 마감하는데요. 사람이 어떻게 세 시간만 자고 사나요.’ 근데 정말 그랬어요.”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건데 지금도 사정은 별반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매일은 만화에 점령당해 있었다.
자비로 『위대한 캣츠비』를 출판하다
『위대한 캣츠비』는 자비로 출판되었다. “애니북스 쪽에서는 유통을 맡아서 배급과 마케팅, 창고관리를 담당하고 있어요.” 작품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말 『위대한 캣츠비』를 공들여 만든다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돈도, 시간도, 체력도 생각 안하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로 작가가 할 일은 아니죠. 다행히 이럭저럭 팔려서 손해는 안 봤어요.”
『위대한 캣츠비』 정도 되는 작품이라면 자비출판을 하지 않아도 출판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일까? “출판의 전체 과정을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지금 출판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욕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먼저 만화 전문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원고를 들고 담당자를 몇 번 만났지만 잘 안 되었어요. 그쪽에서는 아쉬울 것이 없으니까요.” 그러다 애니북스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 책이 나오게 되었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작가가 자기 시스템만 빌려 쓰는 것이니까 달갑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런데 애니북스 사장님께서 ‘우리가 손해 볼 것은 없다’고 하시고는 책의 유통을 맡아주셨어요.” 책 홍보를 위해 인터뷰도 많이 했다. “일간지, 주간지, 전문지, 여성지, 웹진까지 안 해본 매체가 없어요. 하다보니 어디는 했는데 어디는 안할 수도 없고요.” 인터뷰를 하다보면 비슷한 질문이 계속 반복될 텐데 지겹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대답할 때마다 더 재밌게 버전이 바뀌거든요.”
슬퍼서 아름다운 청춘, 그 청춘을 그린 즐거움
“구김 없이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캣츠비, 하운드, 페르수, 선의 청춘은 참으로 남루한 C급 인생들이다. 후반부에 나오는 그들의 빛나다 못해 사랑스러운 대학시절과 비교하면 그들의 스물여섯에서 스물일곱은 강제철거 직전의 마을처럼 스산하다. 손바닥만 한 파란 하늘을 보고도 “아직 있어. 하늘”이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든 그들의 한 해는 청춘을 앓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꼭 여며둔 지난날을 다시 펼쳐보게 한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위대한 캣츠비』에 등장한 인물들이 느낌 감정은 대부분 경험해 보았을 겁니다. 많은 독자들이 『위대한 캣츠비』에서 느끼는 감정은 공감이죠.”
『위대한 캣츠비』의 캐릭터들이 작가와 닮은 구석이 많다. “하운두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제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았어요.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렇게 표현하기 힘든 하운두의 화법이 저와 닮았죠. 내적인 망설임은 캣츠비가 닮았고, 무서우리만큼 잘 정리하는 것은 페르수가 닮았죠. 사실, 모든 캐릭터는 작가의 분신입니다.”
가난한 젊은이들의 청춘 그리고 사랑. 어쩌면 너무도 많이 이야기된 주제다. 그렇지만 그는 그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직도 청춘인가, 아직도 사랑인가’ 라고 비판한 분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과연 청춘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나요? 몇몇 청춘물에 실망했다고 청춘물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죠. 『위대한 캣츠비』에서는 현실의 고루함보다는 청춘의 고루함을 전략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외형은 청춘물이지만 그 속에는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죠.” 그러면서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청춘’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하고 반문했다.
나는 나의 만화를 그린다
만화가에게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줘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만화를 읽는 보통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웹으로 공간을 옮겼다. 『위대한 캣츠비』는 웹에서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묶이게 되었다. 그가 웹으로 공간을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품을 연재할 잡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 만화잡지를 읽던 사람과 온라인으로 연재되는 만화를 보는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만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웹에서 만화를 연재하고 있기 때문에 강도하 씨를 웹만화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수식어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는 만화가고 만화를 그립니다. 연재매체가 무엇이 되었든 거기에 적응해서 내 만화를 그릴 뿐입니다. 앞에 붙은 수식어에 휘둘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웹만화가‘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웹만화 자체가 아직 규정된 장르가 아니라는 데에서도 기인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저는 누가 저를 웹만화가라고 부르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오프라인에서 잡지가 팔리고 작품을 실을 수 있었다면 웹으로 연재공간을 옮기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는 만화가 지금 ’자멸의 길‘을 가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온라인 만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다
온라인 만화는 세로에 대한 제한이 없다. “세로는 원 없이 길어질 수 있죠. 그렇지만 가로 폭의 제한은 엄격합니다. 좁은 통로를 걸어가는 느낌이죠. 스크롤을 이용해 페이지를 내리기 때문에 아래로 흐르면서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스크롤 속에서 감정을 어떻게 유도할까에 대한 것이다.
“만화책은 쪽넘김을 통해 감정의 축적을 보여준다면, 웹에서는 휠을 움직이며 연속 필름처럼 장면을 전환하죠. 여러 가지 흥미로운 실험들이 가능합니다.”
『위대한 캣츠비』에서 시도된 것들 중에 손꼽을 만한 것으로, 이미지가 보고 있는 사람을 관통하는 듯한 효과나 스크롤을 내리면서 점점 감정의 강도가 세지는 효과,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효과 등을 들 수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움직임이 스크롤을 통해 구현되었다. 많은 독자들이 『위대한 캣츠비』를 읽으면서 느꼈던 가슴 조이는 듯한 느낌, 숨을 쉬기 힘들 만큼 강하게 감정에 몰입시키려고 작가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작가가 예로 든 장면은 ‘몽부인의 비밀의 방.’
“‘몽부인의 비밀의 방’을 보면 스크롤을 내릴수록 이미지는 보는 사람을 정면으로 관통합니다. 두 사람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무섭게 얽히는지가 느껴집니다. 제가 시도한 것 말고도 다양한 시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아직은 백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만화가로 산다는 것
만화가의 일상은 만화를 그리는 즐거움을 본인이 느끼지 못한다면 도무지 배겨 낼 재간이 없을 만큼 혹독하다. “일정 자체가 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감이 있어야 밥 먹고 산다는 말도 있지만 한국에서 만화가로 사는 것이 비참할 때가 있어요. 유럽에서는 만화를 ‘생산’해 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만화는 상업 논리가 적용되는 산업이라면, 유럽에서는 미학 논리가 지배하는 예술의 한 장르다. 만화를 통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은 그에게 유럽의 환경은 부럽기 그지없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50살이 되면 만화를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에 대해 좀 더 질문해보았다. “20대 때에는 정말 열심히 놀았어요. 이른 나이에(19세)에 데뷔해서 만화를 그리고 있었지만 일과 생활이 적당한 배분되어 있었죠. 지금은 만화가 제 삶을 다 갉아먹고 있어요. 50살에 그만 그리겠다는 말에 ‘당신에게 만화는 그렇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냐’고 화를 내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먹고 살기 위해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만화가 직업인 사람은 80살이 되어도 만화를 포기 못해요. 오만방자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지금 만화에 제 자신을 아낌없이 쏟아 붓고 있습니다. 기력이 떨어졌는데 만화를 그린다는 것이 더 말이 안 되지 않나요?”
나는 아직 청춘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금 물리적으로는 청춘을 벗어나는 나이지만 여전히 자신은 청춘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삼십대 중반이 되면 대부분 자기 인생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견적이 나오는 거지요. 이때 후부터는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가정이나 일 등에서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덩어리가 무거워지죠. 그때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때까지 쌓아온 것에 하나씩 보태가는 작업이기도 해요.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요. 그런 인생이 너무 재미없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는 평생을 청춘으로 살겠다고 한다.
청춘은 불투명하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가슴이 설렌다. “『위대한 캣츠비』의 ‘두 개의 심장’ 편을 보면 캣츠비와 하운두가 나른한 봄햇살을 맞으며 사티의 음악을 듣고 있어요. 잔디밭에 누워서요. 그런 게 청춘이죠. 그 둘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독자들은 알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아름답잖아요.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의 마지막 장면처럼요.” 에릭 사티의 ‘짐노페티’는 그가 ‘두 개의 심장’ 편을 그릴 때 계속 듣고 있었던 음악이기도 하다. “캣츠비가 선택한 1번은 미래에 대한 서글픔을 적절하게 표현했고, 하운두가 선택한 2번은 젊음의 슬픔이 절절하게 느껴져요.”
그는 자신의 인생에 오직 ‘만화’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로의 삶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의 삶이 있고, 쉴 수 있는 여생이 필요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그는 앞으로 10년 정도만 만화를 더 그릴 생각이다. “만화를 그리는 것,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들은 일방적으로 제 에너지를 나눠주는 거잖아요. 지금까지는 주로 이렇게 에너지를 주는 쪽이었는데, 만화를 그만두는 시점에서는 타인에게 에너지를 받는 입장이 되고 싶어요.”
청춘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로맨스 킬러』
다음 작품은 작가가 명명한 청춘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로맨스 킬러』라고 한다. 원래는 『위대한 캣츠비』의 등장인물인 ‘선’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선’이라는 제목으로 그릴 생각이었지만 동어반복이라고 생각해 그만두었다.
“원래 ‘선’이란 캐릭터는 다음 작품을 염두에 두고 그린 거예요. 책 속에는 선의 과거에 대해서 거의 언급이 없죠. 그런데 사실 선에게는 자신만의 생활이 있는 것이거든요. 만화에서는 캣츠비가 선의 유일한 남자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캣츠비는 선에게 여러 남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어요. ‘아름다운 선’을 그리면 재미도 있고, 독자들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작가로서 이미 『위대한 캣츠비』에서 그렸던 것을 다시 변주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어요. 같은 나이, 같은 시각, 그리고 한 작품에서 이미 드러난 인물에 대해 우려낼 거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야겠다고 느꼈어요.”
만화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많은 분들이 만화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분들이 만화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방법이 자기중심적이지 않는가, 사랑에 포함되는 실천적인 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대여점과 스캔 만화 등 창작자의 권리가 짓밟히며, 출판 만화가 설 곳을 잃고 있는 현실에서 만화를 그리는, ‘만화의 부패 뒤에는 작가의 부패가 있다‘고 만화계 내부의 현실 역시 냉정하게 비판하는 그는 이런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꼭 사서 보세요”라고. 그리고 쑥스러운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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