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만남]"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 작가와 독자가 함께 오른 소설 『남한산성』의 현장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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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김훈의 신작 『남한산성』은 370년 전 47일간의 고립무원의 성에서 벌어진 참담했던 날을 재현한다. 작가는 그 치욕적인 역사를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그린다. 『칼의 노래』가 이긴 전쟁인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했다면, 이번 작품은 패배한 전쟁인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다.

『칼의 노래』가 인간 이순신의 개인적인 면모를 중심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작품은 죽음으로써 삶을 얻고자 한 척화파 김상헌과 치욕적인 삶일망정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화파 최명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임금 인조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해지는 가슴은 그 모든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입장이 이해된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29일 김훈 작가와 함께 70여명의 독자가 그 역사 속 현장을 다녀왔다.

아침 9시, 답사여행 참가자들이 한국관광공사 앞에 속속 도착해 출석체크를 하고 있다.
“자! 빨리 타세요.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출발하자고요.”
치욕과 굴종의 삼전도비. 이 비석에 새겨진 글은 칸(청 태종)이 조선을 침공한 사태의 책임이 조선에 있음을 천명하고, 칸이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고 군사를 돌이킨 은혜에 감사하고, 조선은 청을 천자의 나라로 섬기며 그 속국이 되어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약을 담고 있다.

최근에 누군가가 비석에 페인트칠을 해놓아 이것을 지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삼전도비 옆에 서 있는 부조. 소설에서는 이 현장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왕은 황색 일산 앞에 꿇어앉았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칸이 술 석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세자가 따랐다. 개들이 황색 일산 안으로 들어왔다. 칸이 술상 위로 고기를 던졌다. 뛰어오른 개가 고기를 물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 아, 잠깐 멈추라.

조선 왕이 절을 멈추었다. 칸이 휘장을 들추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칸은 바지춤을 내리고 단 아래쪽으로 오줌을 갈겼다. 바람이 불어서 오줌 줄기가 길게 날렸다. 칸이 오줌을 털고 바지춤을 여미었다. 칸은 다시 일산 안으로 들어와 상 앞에 앉았다. 칸이 셋째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남은 절을 계속했다.” (356쪽)

남문을 오르는 길에 있는 남한산성 안내도.
남문. 정조 3년 성곽을 개축하면서 현재의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조 임금은 적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성남 쪽으로 돌아서 산성의 정문인 이 남문을 통해 성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것은 임금의 위엄이었다.

소설 속 현장을 타박타박 오르는 독자들
그러나 병자호란을 마감할 때, 청 황제는 임금이 남문으로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곳 서문은 너무 낮아서 말을 타고는 나갈 수도 없지만, 임금과 소현세자는 말에서 내려 문을 통과한 다음,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서 평지까지 내려갔고,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좁은 서문 앞에 선 작가와 독자들. 작가는 치욕의 현장을 찾으면서 삶의 경건함을 느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했다.

“임금은 감당할 것을 다 감당하면서 삶의 길을 열어나간 것입니다. 아무리 치욕스럽고 고통스럽더라도 인간의 삶은 영원한 것이죠. 저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여기 와서 성벽의 돌덩이를 만져 봅니다. 그러면 삶의 경건성이 느껴지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합니다.”

소설 속 수어사 이시백이 동-서-남-북-중 5개 군영을 총괄해서 지휘했던 곳. 삼전도 들판과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지만, 이 날은 간간히 내리는 빗줄기로 생긴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이 건물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 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이층 누각으로 다시 쌓고 현재의 '수어장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힘이 없는 듯한, 약간 느린 말투로 소설 속 상황을 들려주는 작가.
수어장대 앞에 세워져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비석.
성벽을 뒤로 한 이정표. 남한산성 안의 교통 중심지는 산성로터리다. 소설에서는 ‘삼거리’와 그 주변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삼거리에 큰 종이 매달려 있어서 관아에서 종을 쳐서 성 안 백성에게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종로’는 그 삼거리로 가는 길이다.

성벽을 이렇게 구불구불하게 축성한 것은 적이 성벽에 바짝 붙어있을 때 건너편으로 총이나 활을 쏴 공격하기 쉽도록 한 목적에서다.

다음은 소설 속 용골대가 통역 정명수와 산성을 두고 나눈 대화다.

- 단단해 보인다. 산골나라에는 저런 성이 맞겠어.
- 조선은 성 안이 허술합니다.
- 허나 성벽은 날카롭구나. 깨뜨리기가 쉽지는 않겠어.

총안. 성벽 위에는 성첩살받이터를 쌓았다. 성첩은 세 개의 총안을 묶어서 한 개의 타를 이룬다. 타와 타 사이에는 성 밖을 관찰할 수 있는 공간을 두었다. 총안을 통해 다가온 적을 쏠 수 있도록 바닥면의 각도를 성 밖의 지형에 따라 다르게 했다.

서문에서 내려오다 보이는 마을. 소설에서는 서날쇠의 대장간을 비롯해 초가집으로 된 민가가 있던 곳이리라. 작가는 소설 속 인물 김류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전달한다.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점심식사 후 유일한 어린이 독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저자.
한 독자에게 직접 사인을 해주는 저자.
행궁은 적의 침공을 받아 도성이 위태로울 때 임금의 피난처이자 항쟁의 거점.
행궁 안 텅 빈 편전. 소설 속 격론이 벌어졌을 상황을 상상하면 쓸쓸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깜짝’ 상황극이 이어졌다.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에 나타난 20여 분의 공연은 병자호란 그때 역사의 현장으로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실감나는 것이었다. 극중 김상헌은 ‘임금이 없으면 백성도 없다’며, 목숨을 버릴 각오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대척점에 선 최명길은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다’고 반박하며,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 못함을 강변한다. 그들은 같은 목적을 향해 서로 다른 길을 택한 지식인이었다. 작가는 다른 책에서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라고 언급한다.

격정적인 공연에 모두가 숙연한 가운데, 일부 참석자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청군의 칸을 대신한 통역 정명수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곧 세 번 절하고 한 번씩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인조 임금.

공연이 끝나고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작가. 한 독자의 “주전파와 주화파의 공박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허무하게 끝난다”라며 결말을 아쉬워하는 데 대해 작가는 “사실 마지막 문장은 ‘남한산성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썼다가 지웠다”라고 답했다.

통렬한 풍자지만, 독자에게는 크나큰 고통을 강요하는 것이자 격렬한 논쟁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염려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소설 속 마지막 문장에서의 결말인 대장장이 서날쇠의 웃음으로도 작가의 뜻은 충분하게 전달된 듯하다.

무심한 듯한 표정의 작가는 따뜻함보다는 엄격함에 가까워 보인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부르는 원고를 대필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한 작가는 ‘소설을 쓰는 것은 말로 세상을 바꿀 수 없는데 말을 걸어야 하는 자의 고통’이라며 ‘나에게 글은 밥벌이’라고 표현했다.

6월 초입 한낮에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데도 이날은 중간 중간 가랑비까지 내려 서늘했다. 가벼운 반소매 차림에다 아침까지 거르고 온 필자는 서문 근처 성벽 주위에서 점심을 기다리는 동안 성벽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덜덜덜 떨기도 하고, 겨우 한 끼 걸렀는데 배고픔을 느끼기도 했다. 소설 속 배경처럼 한겨울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와 배고픔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때 그 현장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남한산성 #작가와의 만남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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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7.04

사진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사진만 다 없애시지.. 이런 식의 글은 사진에 신경쓰여서 내용으로 시선이 잘 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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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씨

2007.06.04

좋은 경험하시고 온 것 같네요. 사진과 글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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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hwan

2007.06.04

여기 취재다녀오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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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1948년 5월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바 있는 언론인 김광주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돈암초등학교와 휘문중·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입학하였으나 정외과와 영문과를 중퇴했다. 1973년부터 1989년 말까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시사저널] 사회부장, 편집국장, 심의위원 이사, 국민일보 부국장 및 출판국장, 한국일보 편집위원, 한겨레신문 사회부 부국장급으로 재직하였으며 2004년 이래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휘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악부에 들어가서 등산을 많이 다녔다.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바위타기를 처음 배웠다 한다. 대학은 처음에는 고려대 정외과에 진학했다.(1966년). 2학년 때 우연히 바이런과 셸리를 읽은 것이 너무 좋아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정외과에 뜻이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영시를 읽으며 영문과로 전과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4학년 올라갈 때 그는 영문과 2학년생이 되었다. 영문과로 옮기고 나서 한 학년을 다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니까 여동생도 고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이 어려운 상태라 한 집안에 대학생 두 명이 있을 수는 없었다. 돈을 닥닥 긁어 보니까 한 사람 등록금이 겨우 나오길래 김훈은 "내가 보니 넌 대학을 안 다니면 인간이 못 될 것 같으니, 이 돈을 가지고 대학에 다녀라"라고 말하며 그 돈을 여동생에게 주고, 자신은 대학을 중퇴했다. 김훈 씨는 모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문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 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할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나를 표현해 내기 위해서"이며 또 "우연하게도 내 생애의 훈련이 글 써먹게 돼 있으니까" 쓰는 것이라 한다. 그의 희망은 희망이 여러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음풍농월하는 것이라 한다.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이 언어로 붙잡고자 하는 세상과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선상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선원들이기도 하고,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는 자기 자신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민망하게도 혹은 선정주의의 혐의를 지울 수 없게도 미인의 기준이기도 하다. 그는 현미경처럼 자신과 바깥 사물들을 관찰하고 이를 언어로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행위를 하고 그 행위를 하면서 변화하는 자신의 몸과 느낌을 메타적으로 보고 언어로 표현해낸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그를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세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1986년 [한국일보] 재직 당시 3년 동안 [한국일보]에 매주 연재한 것을 묶어 낸 『문학기행』(박래부 공저)으로 해박한 문학적 지식과 유려한 문체로 빼어난 여행 산문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으며 한국일보에 연재하였던 독서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1989)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99∼2000년 전국의 산천을 자전거로 여행하며 쓴 에세이 『자전거여행』(2000)도 생태·지리·역사를 횡과 종으로 연결한 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칼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전략 전문가이자 순결한 영웅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삶을 통해 이 시대 본받아야 할 리더십을 제시한다. 영웅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되, 소설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순신 1인칭 서술을 일관되게 유지하여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폭력성,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밥과 몸에 대한 사유,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장군으로서의 고뇌 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외의 저서로 독서 에세이집 『선택과 옹호』, 여행 산문집 『풍경과 상처』,『자전거여행』,『원형의 섬 진도』, 시론집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밥벌이의 지겨움』, 장편소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