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으로 할리우드의 문을 열다 - <로스트>의 김윤진
김윤진의 당찬 할리우드 도전기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의 출간 기념 이벤트로 기획된 독자와의 만남이 홍대 근처의 한식당에서 있었다.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얼마 후 김윤진이 방으로 들어왔다.
200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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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동의어는 매력이다. 숀 코너리를 만난 어떤 기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매력을 팔 수 있었다면 미국을 통째로 사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이제 우리만의 김윤진이 아닌 세계 200여 나라의 시청자와 만나는 김윤진 역시 그렇다.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특별한 여운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것을 매력이라고 하지 않으면 무어라 이름 붙여야 할까?
김윤진의 당찬 할리우드 도전기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의 출간 기념 이벤트로 기획된 독자와의 만남이 홍대 근처의 한식당에서 있었다.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얼마 후 김윤진이 방으로 들어왔다. <쉬리>의 여전사로 강한 인상을 남긴 김윤진이지만 실제 모습은 뜻밖에 여릿한 태가 났다. 그동안 맡은 배역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우울하거나, 혹은 과거가 비밀에 싸인 역이어서 자연인 김윤진 씨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상상했지만 실제로 만나 본 김윤진 씨는 ‘바퀴벌레가 제일 싫다. 내가 스파이라면 나를 심문하는 데 바퀴벌레 한 마리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명랑하고 편안한 여성이었다.
배우를 만난다는, 그것도 좋아하는 배우를 바로 코앞에서 본다는 생각에 긴장했던 사람들은 김윤진 씨와 대화를 시작하면서 어느덧 친구라도 만난 듯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이렇게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싶었다. 상대방을 압도하면서도 전혀 압도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부드러움이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다.
자기를 찾아가는 이야기, <로스트>
이야기는 <로스트>부터 시작되었다.
“제가 <로스트> 광팬이라 시험 기간 중에도 이벤트에 참가했어요.”
“관 속에는 누가 있나요?”
“<로스트>는 정말 최고의 낚시 드라마인 것 같아요. 이번 시즌에선 누가 죽나요?”
“<로스트>에 나오는 배우들의 실제 성격은 어떤가요?”
김윤진은 ‘정말 <로스트>의 스토리는 등장인물도 모른다’고 말했다. <로스트>의 수수께끼는 이 드라마의 최고 매력이기도 하고, 동시에 팬들을 최고로 괴롭히기도 한다. “대본이 나오면 배우들도 정신없이 읽기 시작해요. 궁금하니까. 중요한 내용은 아예 프린트가 되지 않아요. 보안유지를 위해서요.”
첫 시즌에는 배우들이 촬영 중간에 휴식을 취하면서 이런저런 예상을 하기도 했지만 다 틀려서 지금은 포기한 상태다. “몇 시간씩 <로스트>의 스토리에 대해 자기 설을 이야기해 보기도 했지만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어요. 정말 스토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드라마에 참가하는 배우로 김윤진은 제목에 큰 의미를 두었다. “<로스트>는 제목에 의미가 많다고 생각해요. 모든 캐릭터가 자신을 잃은 상태죠. 그리고 자기를 찾으면 죽거나 섬을 떠나죠. 자기희생으로 영웅이 되기도 하고요. 저는 <로스트>의 이런 철학적인 면이 좋아요.”
<로스트>의 주요 등장인물의 실제 성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 극 중 역할과 실제 성격이 비슷해지고 있어요. 작가들도 배우를 점점 파악하게 되니까 대본에 배우의 실제 성격을 반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 저만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요. 제가 한국에서 여전사 역할을 했다고 하면 다들 안 믿어요. 극 중에 나오는 ‘선’과 동일시해서 그저 보호해줘야 하고 안쓰러워해요.(웃음)”
어째서인지 김윤진에게는 보통 역할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밀애>가 특별한 영화라고 했다. “처음으로 들어온 평범한 역할이어서 무척 즐겁고 신나게 촬영했어요.”
은근한 차별이 더 아프다
첫 시즌에는 미국 내 드라마 인기 순위 2위를 차지할 만큼 대단한 반응을 보였지만, 현재 <로스트>는 아쉽게도 10위권에서 떨어진 상태다. 인기가 떨어지면 다음 시즌을 찍기 어려운 것이 미국 드라마 시장의 현실이지만 <로스트>는 다행히 2010년까지 찍는다.
“아예 계약을 2010년까지 다 했습니다. 인기는 처음보다 떨어졌지만 예술성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기로 회사와 합의된 상태여서 배우도 스태프도 모두 편하게 드라마에 몰두하고 있어요.” 몸은 절대 편하지 않지만, 이라고 덧붙여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다.
<로스트>의 촬영 현장은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게다가 첫 시즌부터 <로스트>는 한국 팬들의 매서운 비판을 받았다. 드라마 속 한국 배경과 김윤진의 상대역인 대니얼의 한국어 실력 때문이었다. 비판의 화살은 김윤진에게 쏟아졌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단다.
“내가 다 책임질 수 없으니까 속이 상해요.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할 때가 많으니까요. 지적을 계속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소품 담당 스태프들이 화를 냈어요. 지금은 한국인 어드바이저가 고용되어서 그나마 많이 나아졌지만. 현장에서 ‘성격 나쁜 배우’가 돼 버렸어요. 그래도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야 소품팀이 한 번이라도 신경 써서 챙기고 저한테 물어보기라도 하니까요.”
<로스트>를 촬영하면서 느낀 은근한 차별도 있었다. 드라마 포스터를 찍을 때 유색인종은 모두 뒷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었던 것. “그 사람들이 인종차별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 돈 문제죠. 유색 인종보다는 백인들이 훨씬 문화생활에 돈을 많이 쓰니까 백인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차별받을 때의 느낌은 정말 오래가요. 뺨이라도 맞으면 바로 항의하겠지만 차별은 은근히,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당할 때가 많으니까요. 집에 돌아와서 ‘아, 내가 그런 대접을 당했구나’ 하고 깨달을 때도 있었고, 한동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죠.”
동양인 스타가 나오고, 동양의 문화가 미국에서 힘을 가지게 되면 그런 차별은 서서히 없어지리라고 김윤진은 생각했다. “저보고 월드 스타라는 호칭을 붙여주셨는데 사실 저는 월드 배우지 월드 스타는 아직 아니에요. <로스트>가 200여 국에서 방영되니까 ‘월드’적으로 얼굴이 비치는 배우죠.(웃음) 그래서 아직 어깨가 그렇게 무겁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정말로 월드 스타, 백인 여배우와 영화에서 키스하지 않겠다고 말한 덴젤 워싱턴만 한 배우가 된다면 그때는 정말 어깨가 무거워지겠죠. 그렇지만 제 세대에서는 현실적으로 동양인 스타가 나오긴 어려워요. 그렇지만 내 다음 세대에는 꼭 이루어지리라 봅니다.”
숫기 없는 소녀, 연극을 만나다
어렸을 때 김윤진은 숫기 없는 소녀였다. “열 살 때 이민 갔는데 영어를 못해서 원래는 4학년이어야 했는데 3학년으로 들어갔어요. 열 살이라는 나이가 민감하잖아요. 친구도 없고, 말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지냈어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김윤진은 영어로 말할 때 실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고 했다. “틀리는 것이 싫어서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점점 내 목소리가 싫어지고, 어느 순간 목소리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다 7학년 때 연극을 만났죠.”
어머니가 교회 연극반을 권유해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되었다. 그 무대에서 김윤진은 ‘자유’를 만났다. “무대 위가 일상보다 더 자유롭고 그렇게 싫었던 목소리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거예요. 나를 다시 찾았구나 하는 희열을 느꼈죠. 나를 다시 찾아준 것이 연극이었기에 거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이게 내 길이고 이것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구나 하는 걸 분명히 느꼈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8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뉴욕 예술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기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해 경쟁률이 워낙 높았고 전 연기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붙었으니까요. 그만큼 주변 친구들이 뛰어나고 특별했어요. 이미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는 친구도 있었거든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학교까지 왕복 네 시간이 걸렸는데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요. 열다섯 살의 열정이 있었다면 일찌감치 월드 스타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가끔 생각해요.(웃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9할이 열정
무척 특별한 친구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고, 학교 유일의 유색인종이었기에 느끼는 고립감도 상당했다. 학교 무대에서는 아무 차별 없이 연기를 펼칠 수 있지만 교문을 나서는 순간 동양인이기에 설 무대가 좁아진다는 현실 때문에 초조하기도 했다. 그런 모든 것을 잊게 한 것은 연기에 대한 열정이었다. “저는 머리도 좋은 편도 아니고 재능도 그렇게 많이 타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더 몰두하고 열정이 생겨났던 것 같아요.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고등학교 때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로 우디 앨런과의 만남을 꼽았다. 학교 규칙을 어겨가면서 몰래 우디 앨런 영화의 오디션 약속을 잡았다. “우디 앨런이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 영화에 동양인 여배우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에이전시도 통하지 않고 오디션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우디 앨런에 대한 김윤진의 인상은 ‘정말 천재가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고. “어두운 방에 조명이 하나 비추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하는 거였어요. 우디 앨런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내 연기가 끝나자 나와서 고맙다고 말하고 악수를 청했어요. 그런데 그 짧은 느낌만으로도 이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걸 강렬하게 느꼈어요. 그리고 정말 천재라서 다행이구나, 천재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도요.(웃음)”
지금은 <로스트>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나지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국내 드라마나 한국 감독과 영화 작업에도 꼭 참여하고 싶다고. 어떤 감독과 작업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김윤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처음 영화를 찍는 감독의 열려 있는 자세, 처음이라는 열정. 그것을 통해 내가 배우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예전에는 내가 빛나는 역할,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에 눈이 많이 갔다면 이제는 작품이나 감독, 동료 배우에 눈이 더 많이 가요. 결과보다는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30대 여배우, 기로에 서다
여배우는 영화의 꽃이다. 그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주목을 받지만 동시에 그 꽃이 지기 시작하면 세상의 시선은 차갑게 변한다. 하지만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듯, 여배우도 젊음이 발산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후에야 진정한 인생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력과 원숙미가 열매 맺는다. 30대 여배우 김윤진은 30대라는 나이보다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가 적다는 것에 더 불만인 듯했다.
“요즘은 30대 여배우들이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서 오히려 20대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을 할 정도예요. 저는 나이보다 한국 여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고정되어 있어서 더 고민이죠. 20대에는 사랑에 목매는 여자, 30대에는 불륜이나 아줌마 역할밖에 없잖아요? 남자 배우들은 20대에도 세상을 구하는데(웃음). 브루스 윌리스도 오십인데 액션 영화를 찍잖아요. 여배우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제가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어째 30대 여배우들은 불륜 아니면 자식 유괴당하고 우는 엄마밖에 할 생각이 없느냐고요.”
나이 든 여배우는 들러리 역할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들러리 역할이면 하지 않을 거예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으니까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역은 안 해도 되는 게 다행이죠. 앞으로도 저는 제게 의미 있는 작품을 찾아서 계속 연기하고 싶어요.”
좋은 배우, 좋은 사람 김윤진
스크린을 통해 김윤진을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매력으로 독특한 목소리, 뛰어난 연기력을 꼽는다. 그녀를 만나본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 때라도 잊지 않는 성실함과 유머 감각, 세상을 바라보는 올곧은 시선, 정해진 원칙을 지키는 깐깐함, 그리고 참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단박에 받는다. 그만큼 팬과 함께 편안하고 소탈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스타는 그리 많을 것 같지 않다.
‘월드 스타’라는 수식어를 아직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김윤진의 어깨 위에는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짐도 차곡차곡 얹혀 있다. 좋든 싫든 그녀는 전 세계 사람에게 한국인을 대표하고 있으며, 한국 사람들은 그녀가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를 바란다. 그뿐 아니라 미국에 사는 아시아 사람들의 기대 역시 부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김윤진은 잘 해내리라 믿는다. 그는 좋은 배우 이전에 좋은 사람이기에 그 매력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을 감동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윤진과 독자와의 데이트 스케치
김윤진의 당찬 할리우드 도전기 『세상이 당신의 드라마다』의 출간 기념 이벤트로 기획된 독자와의 만남이 홍대 근처의 한식당에서 있었다.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얼마 후 김윤진이 방으로 들어왔다. <쉬리>의 여전사로 강한 인상을 남긴 김윤진이지만 실제 모습은 뜻밖에 여릿한 태가 났다. 그동안 맡은 배역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우울하거나, 혹은 과거가 비밀에 싸인 역이어서 자연인 김윤진 씨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상상했지만 실제로 만나 본 김윤진 씨는 ‘바퀴벌레가 제일 싫다. 내가 스파이라면 나를 심문하는 데 바퀴벌레 한 마리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명랑하고 편안한 여성이었다.
배우를 만난다는, 그것도 좋아하는 배우를 바로 코앞에서 본다는 생각에 긴장했던 사람들은 김윤진 씨와 대화를 시작하면서 어느덧 친구라도 만난 듯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이렇게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싶었다. 상대방을 압도하면서도 전혀 압도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부드러움이 흘러넘치는 사람이었다.
자기를 찾아가는 이야기, <로스트>
이야기는 <로스트>부터 시작되었다.
“제가 <로스트> 광팬이라 시험 기간 중에도 이벤트에 참가했어요.”
“관 속에는 누가 있나요?”
“<로스트>는 정말 최고의 낚시 드라마인 것 같아요. 이번 시즌에선 누가 죽나요?”
“<로스트>에 나오는 배우들의 실제 성격은 어떤가요?”
첫 시즌에는 배우들이 촬영 중간에 휴식을 취하면서 이런저런 예상을 하기도 했지만 다 틀려서 지금은 포기한 상태다. “몇 시간씩 <로스트>의 스토리에 대해 자기 설을 이야기해 보기도 했지만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어요. 정말 스토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요.”
드라마에 참가하는 배우로 김윤진은 제목에 큰 의미를 두었다. “<로스트>는 제목에 의미가 많다고 생각해요. 모든 캐릭터가 자신을 잃은 상태죠. 그리고 자기를 찾으면 죽거나 섬을 떠나죠. 자기희생으로 영웅이 되기도 하고요. 저는 <로스트>의 이런 철학적인 면이 좋아요.”
<로스트>의 주요 등장인물의 실제 성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 극 중 역할과 실제 성격이 비슷해지고 있어요. 작가들도 배우를 점점 파악하게 되니까 대본에 배우의 실제 성격을 반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 저만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요. 제가 한국에서 여전사 역할을 했다고 하면 다들 안 믿어요. 극 중에 나오는 ‘선’과 동일시해서 그저 보호해줘야 하고 안쓰러워해요.(웃음)”
어째서인지 김윤진에게는 보통 역할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밀애>가 특별한 영화라고 했다. “처음으로 들어온 평범한 역할이어서 무척 즐겁고 신나게 촬영했어요.”
은근한 차별이 더 아프다
첫 시즌에는 미국 내 드라마 인기 순위 2위를 차지할 만큼 대단한 반응을 보였지만, 현재 <로스트>는 아쉽게도 10위권에서 떨어진 상태다. 인기가 떨어지면 다음 시즌을 찍기 어려운 것이 미국 드라마 시장의 현실이지만 <로스트>는 다행히 2010년까지 찍는다.
“아예 계약을 2010년까지 다 했습니다. 인기는 처음보다 떨어졌지만 예술성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기로 회사와 합의된 상태여서 배우도 스태프도 모두 편하게 드라마에 몰두하고 있어요.” 몸은 절대 편하지 않지만, 이라고 덧붙여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다.
<로스트>의 촬영 현장은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게다가 첫 시즌부터 <로스트>는 한국 팬들의 매서운 비판을 받았다. 드라마 속 한국 배경과 김윤진의 상대역인 대니얼의 한국어 실력 때문이었다. 비판의 화살은 김윤진에게 쏟아졌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단다.
“내가 다 책임질 수 없으니까 속이 상해요.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할 때가 많으니까요. 지적을 계속 하다 보니까 나중에는 소품 담당 스태프들이 화를 냈어요. 지금은 한국인 어드바이저가 고용되어서 그나마 많이 나아졌지만. 현장에서 ‘성격 나쁜 배우’가 돼 버렸어요. 그래도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야 소품팀이 한 번이라도 신경 써서 챙기고 저한테 물어보기라도 하니까요.”
<로스트>를 촬영하면서 느낀 은근한 차별도 있었다. 드라마 포스터를 찍을 때 유색인종은 모두 뒷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었던 것. “그 사람들이 인종차별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사실 돈 문제죠. 유색 인종보다는 백인들이 훨씬 문화생활에 돈을 많이 쓰니까 백인 위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차별받을 때의 느낌은 정말 오래가요. 뺨이라도 맞으면 바로 항의하겠지만 차별은 은근히,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당할 때가 많으니까요. 집에 돌아와서 ‘아, 내가 그런 대접을 당했구나’ 하고 깨달을 때도 있었고, 한동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죠.”
동양인 스타가 나오고, 동양의 문화가 미국에서 힘을 가지게 되면 그런 차별은 서서히 없어지리라고 김윤진은 생각했다. “저보고 월드 스타라는 호칭을 붙여주셨는데 사실 저는 월드 배우지 월드 스타는 아직 아니에요. <로스트>가 200여 국에서 방영되니까 ‘월드’적으로 얼굴이 비치는 배우죠.(웃음) 그래서 아직 어깨가 그렇게 무겁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정말로 월드 스타, 백인 여배우와 영화에서 키스하지 않겠다고 말한 덴젤 워싱턴만 한 배우가 된다면 그때는 정말 어깨가 무거워지겠죠. 그렇지만 제 세대에서는 현실적으로 동양인 스타가 나오긴 어려워요. 그렇지만 내 다음 세대에는 꼭 이루어지리라 봅니다.”
숫기 없는 소녀, 연극을 만나다
어렸을 때 김윤진은 숫기 없는 소녀였다. “열 살 때 이민 갔는데 영어를 못해서 원래는 4학년이어야 했는데 3학년으로 들어갔어요. 열 살이라는 나이가 민감하잖아요. 친구도 없고, 말도 못하고 벙어리처럼 지냈어요.”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김윤진은 영어로 말할 때 실수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고 했다. “틀리는 것이 싫어서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점점 내 목소리가 싫어지고, 어느 순간 목소리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다 7학년 때 연극을 만났죠.”
어머니가 교회 연극반을 권유해 엑스트라로 출연하게 되었다. 그 무대에서 김윤진은 ‘자유’를 만났다. “무대 위가 일상보다 더 자유롭고 그렇게 싫었던 목소리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거예요. 나를 다시 찾았구나 하는 희열을 느꼈죠. 나를 다시 찾아준 것이 연극이었기에 거기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이게 내 길이고 이것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구나 하는 걸 분명히 느꼈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8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뉴욕 예술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기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해 경쟁률이 워낙 높았고 전 연기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붙었으니까요. 그만큼 주변 친구들이 뛰어나고 특별했어요. 이미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는 친구도 있었거든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학교까지 왕복 네 시간이 걸렸는데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열정은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요. 열다섯 살의 열정이 있었다면 일찌감치 월드 스타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가끔 생각해요.(웃음)”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9할이 열정
무척 특별한 친구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고, 학교 유일의 유색인종이었기에 느끼는 고립감도 상당했다. 학교 무대에서는 아무 차별 없이 연기를 펼칠 수 있지만 교문을 나서는 순간 동양인이기에 설 무대가 좁아진다는 현실 때문에 초조하기도 했다. 그런 모든 것을 잊게 한 것은 연기에 대한 열정이었다. “저는 머리도 좋은 편도 아니고 재능도 그렇게 많이 타고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더 몰두하고 열정이 생겨났던 것 같아요.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우디 앨런에 대한 김윤진의 인상은 ‘정말 천재가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고. “어두운 방에 조명이 하나 비추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하는 거였어요. 우디 앨런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내 연기가 끝나자 나와서 고맙다고 말하고 악수를 청했어요. 그런데 그 짧은 느낌만으로도 이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걸 강렬하게 느꼈어요. 그리고 정말 천재라서 다행이구나, 천재가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도요.(웃음)”
지금은 <로스트>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나지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국내 드라마나 한국 감독과 영화 작업에도 꼭 참여하고 싶다고. 어떤 감독과 작업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김윤진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인 감독들과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처음 영화를 찍는 감독의 열려 있는 자세, 처음이라는 열정. 그것을 통해 내가 배우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거든요. 예전에는 내가 빛나는 역할,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에 눈이 많이 갔다면 이제는 작품이나 감독, 동료 배우에 눈이 더 많이 가요. 결과보다는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30대 여배우, 기로에 서다
여배우는 영화의 꽃이다. 그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주목을 받지만 동시에 그 꽃이 지기 시작하면 세상의 시선은 차갑게 변한다. 하지만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듯, 여배우도 젊음이 발산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후에야 진정한 인생을 보여줄 수 있는 연기력과 원숙미가 열매 맺는다. 30대 여배우 김윤진은 30대라는 나이보다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가 적다는 것에 더 불만인 듯했다.
“요즘은 30대 여배우들이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서 오히려 20대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을 할 정도예요. 저는 나이보다 한국 여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고정되어 있어서 더 고민이죠. 20대에는 사랑에 목매는 여자, 30대에는 불륜이나 아줌마 역할밖에 없잖아요? 남자 배우들은 20대에도 세상을 구하는데(웃음). 브루스 윌리스도 오십인데 액션 영화를 찍잖아요. 여배우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제가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어째 30대 여배우들은 불륜 아니면 자식 유괴당하고 우는 엄마밖에 할 생각이 없느냐고요.”
나이 든 여배우는 들러리 역할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들러리 역할이면 하지 않을 거예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으니까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역은 안 해도 되는 게 다행이죠. 앞으로도 저는 제게 의미 있는 작품을 찾아서 계속 연기하고 싶어요.”
좋은 배우, 좋은 사람 김윤진
스크린을 통해 김윤진을 만난 사람들은 그녀의 매력으로 독특한 목소리, 뛰어난 연기력을 꼽는다. 그녀를 만나본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 때라도 잊지 않는 성실함과 유머 감각, 세상을 바라보는 올곧은 시선, 정해진 원칙을 지키는 깐깐함, 그리고 참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단박에 받는다. 그만큼 팬과 함께 편안하고 소탈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스타는 그리 많을 것 같지 않다.
‘월드 스타’라는 수식어를 아직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김윤진의 어깨 위에는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짐도 차곡차곡 얹혀 있다. 좋든 싫든 그녀는 전 세계 사람에게 한국인을 대표하고 있으며, 한국 사람들은 그녀가 한국을 제대로 알리기를 바란다. 그뿐 아니라 미국에 사는 아시아 사람들의 기대 역시 부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김윤진은 잘 해내리라 믿는다. 그는 좋은 배우 이전에 좋은 사람이기에 그 매력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을 감동케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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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26
monocrom
2008.03.10
기사가 좋네요...
웃으며살자
200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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