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문화현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
헨리 지루는 진보적 교육학이 생명력 있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되려면 비판의 언어와 가능성의 언어를 결합한 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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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가보고 싶지 않은 ‘기피시설’ 네 곳은 성격에 따라 둘로 나뉜다. 학교와 군대, 병원과 감옥이다. 입원은 해봤고 교도소 안은 구경도 못해봤지만, 옥에 갇히거나 다시 입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는 것과 군 입대는 다르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거의 모든 의무복무자처럼 나 역시 군 복무를 한 강원도 철원 지역을 향해 오줌을 누기는커녕 침도 뱉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생활보다는 군 생활의 끔찍함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여전히 군인이거나 재입대 통지서를 받는 악몽을 더는 안 꾸게 된 무렵과 일치한다.
너, 다시 학교 다닐래? 군대 갈래?
학교는 초중고교만 해도 12년을 다녀야 하나, 군 복무는 2년 3개월이라는 점도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짧고 굵게’ 고통받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것인지 『내 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삶이보이는창)에 실린 병영일기를 읽으며 깨달았다. 군대와 학교는 어느 게 나을 게 없다. 둘 다 똑같이 나쁘다. 싫다.
군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모인다. 군대라는 한계상황 탓에 남루한 인간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보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불러올 정도였다. 학교 선생님 중에도 별의별 인간이 다 있다. 하지만 교사의 지위는 그것을 은폐한다.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을 넘어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이따금 매스컴을 탄다.
패륜에 가까운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은 처벌(징계)을 받는다. 학교를 계속 다니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한편, 교사에게 얻어터진 학생마저 학교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무슨 조홧속인가? 얼마 전, 어느 지상파 방송의 주부 대상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접한 교사의 학생 폭행 사례는 해도 너무했다.
여고생이 수업을 한 시간 빼먹었다는 이유로 담임선생에게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나무 몽둥이 두 개가 부러지자 쇠몽둥이까지 사용했다. 학생이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랬을 거라는 배경 설명을 듣고 참담했다. 잘난 척하더니(어려운 집안 여건에도 학생의 용모가 단정한 것), 맞을 짓 했다는 식의 학생들 여론은 ‘노예교육’의 결과다.
목소리만 나온 인터뷰에서 학생의 행동거지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학생의 인격을 고려해 하지 않겠다는 담임교사의 발언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선생은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교사에게 학생 폭행의 ‘면책특권’이 계속 주어지고 학교가 교사의 체벌을 가장한 폭력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온존한다면, 학교폭력은 근절되지 않으리라. 학교폭력의 근원은 교사의 매질이다.
민주적 공공영역인 학교와 변혁적 지성인으로서의 교사
미국의 교육이론가 겸 문화비평가 헨리 지루(Henry A. Giroux)는 1970년대 초반 영국과 미국에서 신교육사회학의 일부로 등장한 비판교육학을 거론하는 것으로 그의 ‘교사론’이자 교육비평 글모음인 『교사는 지성인이다』(이경숙 옮김, 아침이슬, 2001)를 시작한다. 그는 비판교육학이 교육에 기여한 바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비판교육이론은 이처럼 학교 교육에 대해 날카로운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내놨지만, ‘비판과 지배’의 언어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비판교육자들은 학교를 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실천이나 정치경제학 담론과 결부하는 언어에만 머물러 곤욕을 치르고 있다.”
헨리 지루는 진보적 교육학이 생명력 있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되려면 비판의 언어와 가능성의 언어를 결합한 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 담론의 중요한 두 가지 요소로 학교와 교사를 꼽는다. 그는 비판교육학의 생명력은 학교를 민주적 공공영역으로 보는 데 있다고 믿는다.
“민주적 공공영역으로 학교를 보게 되면, 학교는 노동현장의 연장이라든가 치열한 국제시장과 외국과의 경쟁을 위해 제일선에 있는 기관이 아니라, 심도 있는 대화와 인간 행위를 존중하는 비판적 탐구 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대중의 연대와 사회적 책무라는 담론을 배운다.”
교사는 지성인이다. 그것도 변혁적 지성인이다. 번역자가 intellectual을 ‘지식인’이 아니라 ‘지성인’으로 옮긴 것은, 지식인 개념에 일정한 학력을 전제하는 우리와 다르게 헨리 지루는 그런 의미로 쓰지 않아서다. 그는 모든 사람은 지성적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본다. 교사를 변혁적 지성인으로 보는 관점은 교사 활동을 재고하고 재구조화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지성인이라는 범주는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된다. 첫째, 교사의 활동을 순수한 도구적 용어나 교수 용어로 한정하는 대신, 지적 노동으로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둘째, 교사들이 지성인 역할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이데올로기적?실천적 조건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셋째, 교사 자신이 인정하고 활용하는 교육을 통해 자신이 다양한 정치?경제?사회적 이해관계를 생산하고 합법화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 책은 문해(literacy)부터 교실 목표, 해방신학자들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주제는 다양해도 이를 아우르는 공통 주제가 있는데, 교사와 학생이 함께 지역 사회와 전체 사회를 해방할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 학교를 재인식하는 것이 그것이다.
헨리 지루는 이런 사람
이 책에 수록된 「능력별 학급편성은 재생산을 재생산한다」라는 글을 함께 쓴 교육학자 피터 맥라렌의 ‘지루를 읽기 위하여’에서 헨리 지루의 이력을 간추린다.
지루의 글에는 열정과 분노가 담겨 있지 흔해빠진 학술 연구의 적당한 거리 두기나 학문적 무난함 따위는 없다. 그의 비판적 목소리에 담긴 활력, 때로 과격함은 그가 겪었던 좌절이 가져온 분노와 용기에 다름 아니다. 어린 시절 로드아일랜드에서 노동계급 이웃들과 함께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나온 분노와 용기를 실천으로 옮긴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역사는 1960년대 투쟁 참여, 공동체 조직 활동, 7년간의 고등학교 교사 생활로 채워져 있다. 지루는 자신의 대학 생활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빈민가인 스미스 힐을 떠나 대학 강단으로 가게 된 건 농구 특기생으로 받은 장학금 때문이었다. 그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고 훨씬 어려운 고비를 맞았을 게 틀림없다.”
지루의 연구는 두 번의 중요한 시기를 맞는데, 첫 번째는 사회계급과 학교 교육에 관한 에세이를 쓴 1970년대 말이다. 이 무렵 그는 윌리엄 파이너, 진 애니언, 마이클 애플 등 영향력 있는 교육이론가와 교류한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초반, 행위와 학생저항에 관한 논의에 참여한 것이다.
『교육이론과 저항』(최명선 옮김, 성원사, 1990)에서 헨리 지루는 “학교가 사회문화적 재생산의 장 이상이라고 설파한다. 그는 학교를 지배의 논리로만, 교사를 지배계급의 앞잡이로만 보는 관점은 이론적 결점이 많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바르지 못하고, 전략적으로도 무용하다고 비판했다.” 『교육과정 논쟁』(한준상 외 옮김, 집문당, 1988)은 헨리 지루의 편저서다.
디즈니는 무얼 가르치는가
『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성기완 옮김, 아침이슬, 2001)에선 디즈니사가 미국의 대중문화 형성에 어떤 교육적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디즈니는 가정, 학교, 지역사회에 바람직한 모델을 제공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과거에 대한 감상적 시각을 통해 미래를 형성해간다는 논리를 편다.”
그래서였구나! 1970년대 후반, 공영방송에서 일요일 오후에 틀어준 디즈니랜드 단막극이 가뜩이나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더 나른하게 한 것은. <인어공주>(1989)에서 <뮬란>(1998)에 이르는 디즈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좀 달라졌을까? 문제점이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여자아이와 여성의 성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다. “<인어공주>와 <라이온 킹>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축소시켜 한정된 의미만으로 여성 등장인물을 구성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여성 인물은 궁극적으로 남성들에게 복종하고 자신의 힘이나 희망을 전적으로 지배적인 남성들의 이야기 안으로 국한시킨다.”
인종차별 또한 디즈니 영화의 주된 논쟁거리다. <알라딘>(1992)이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왔고, <라이온 킹>(1994)에서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는 인종차별적인 요소는 등장인물의 사투리와 인종의 의미를 가진 언어 속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비민주적인 사회관계에 대한 찬양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헨리 지루는 네 가지 처방을 제시한다. 첫째, 디즈니가 어린이들에게 가치를 가르치고 상품을 팔고자 침투하는 대중문화영역을 학습과 시비를 가리는 장소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학부모, 지역 공동체, 교육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디즈니 영화가 주는 다양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셋째, 디즈니 영화가 환상 이상의 그 무엇이 되고자 하고 오락과 교육 사이의 오랜 관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그 사이에서 상상을 발휘하는 영역이 되고자 한다면, “오락의 진행 과정에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배경을 어떻게 삽입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 디즈니가 경제와 소비와 문화의 영역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것은, “우리가 디즈니의 권력관계를 분석할 때 좀 더 폭넓고 복잡한 범위 내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거의 모든 의무복무자처럼 나 역시 군 복무를 한 강원도 철원 지역을 향해 오줌을 누기는커녕 침도 뱉지 않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생활보다는 군 생활의 끔찍함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여전히 군인이거나 재입대 통지서를 받는 악몽을 더는 안 꾸게 된 무렵과 일치한다.
너, 다시 학교 다닐래? 군대 갈래?
학교는 초중고교만 해도 12년을 다녀야 하나, 군 복무는 2년 3개월이라는 점도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짧고 굵게’ 고통받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것인지 『내 님, 불멸의 남자 현승효』(삶이보이는창)에 실린 병영일기를 읽으며 깨달았다. 군대와 학교는 어느 게 나을 게 없다. 둘 다 똑같이 나쁘다. 싫다.
군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모인다. 군대라는 한계상황 탓에 남루한 인간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보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불러올 정도였다. 학교 선생님 중에도 별의별 인간이 다 있다. 하지만 교사의 지위는 그것을 은폐한다. 선생님에게 대드는 것을 넘어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이따금 매스컴을 탄다.
패륜에 가까운 행동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은 처벌(징계)을 받는다. 학교를 계속 다니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한편, 교사에게 얻어터진 학생마저 학교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무슨 조홧속인가? 얼마 전, 어느 지상파 방송의 주부 대상 생활정보 프로그램에서 접한 교사의 학생 폭행 사례는 해도 너무했다.
여고생이 수업을 한 시간 빼먹었다는 이유로 담임선생에게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나무 몽둥이 두 개가 부러지자 쇠몽둥이까지 사용했다. 학생이 아버지가 안 계셔서 그랬을 거라는 배경 설명을 듣고 참담했다. 잘난 척하더니(어려운 집안 여건에도 학생의 용모가 단정한 것), 맞을 짓 했다는 식의 학생들 여론은 ‘노예교육’의 결과다.
목소리만 나온 인터뷰에서 학생의 행동거지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학생의 인격을 고려해 하지 않겠다는 담임교사의 발언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런 선생은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교사에게 학생 폭행의 ‘면책특권’이 계속 주어지고 학교가 교사의 체벌을 가장한 폭력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온존한다면, 학교폭력은 근절되지 않으리라. 학교폭력의 근원은 교사의 매질이다.
민주적 공공영역인 학교와 변혁적 지성인으로서의 교사
“비판교육이론은 이처럼 학교 교육에 대해 날카로운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내놨지만, ‘비판과 지배’의 언어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심각한 약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비판교육자들은 학교를 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실천이나 정치경제학 담론과 결부하는 언어에만 머물러 곤욕을 치르고 있다.”
헨리 지루는 진보적 교육학이 생명력 있는 정치적 프로젝트가 되려면 비판의 언어와 가능성의 언어를 결합한 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 담론의 중요한 두 가지 요소로 학교와 교사를 꼽는다. 그는 비판교육학의 생명력은 학교를 민주적 공공영역으로 보는 데 있다고 믿는다.
“민주적 공공영역으로 학교를 보게 되면, 학교는 노동현장의 연장이라든가 치열한 국제시장과 외국과의 경쟁을 위해 제일선에 있는 기관이 아니라, 심도 있는 대화와 인간 행위를 존중하는 비판적 탐구 활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대중의 연대와 사회적 책무라는 담론을 배운다.”
교사는 지성인이다. 그것도 변혁적 지성인이다. 번역자가 intellectual을 ‘지식인’이 아니라 ‘지성인’으로 옮긴 것은, 지식인 개념에 일정한 학력을 전제하는 우리와 다르게 헨리 지루는 그런 의미로 쓰지 않아서다. 그는 모든 사람은 지성적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본다. 교사를 변혁적 지성인으로 보는 관점은 교사 활동을 재고하고 재구조화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지성인이라는 범주는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된다. 첫째, 교사의 활동을 순수한 도구적 용어나 교수 용어로 한정하는 대신, 지적 노동으로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둘째, 교사들이 지성인 역할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이데올로기적?실천적 조건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셋째, 교사 자신이 인정하고 활용하는 교육을 통해 자신이 다양한 정치?경제?사회적 이해관계를 생산하고 합법화한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이 책은 문해(literacy)부터 교실 목표, 해방신학자들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주제는 다양해도 이를 아우르는 공통 주제가 있는데, 교사와 학생이 함께 지역 사회와 전체 사회를 해방할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 학교를 재인식하는 것이 그것이다.
헨리 지루는 이런 사람
이 책에 수록된 「능력별 학급편성은 재생산을 재생산한다」라는 글을 함께 쓴 교육학자 피터 맥라렌의 ‘지루를 읽기 위하여’에서 헨리 지루의 이력을 간추린다.
지루의 글에는 열정과 분노가 담겨 있지 흔해빠진 학술 연구의 적당한 거리 두기나 학문적 무난함 따위는 없다. 그의 비판적 목소리에 담긴 활력, 때로 과격함은 그가 겪었던 좌절이 가져온 분노와 용기에 다름 아니다. 어린 시절 로드아일랜드에서 노동계급 이웃들과 함께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나온 분노와 용기를 실천으로 옮긴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역사는 1960년대 투쟁 참여, 공동체 조직 활동, 7년간의 고등학교 교사 생활로 채워져 있다. 지루는 자신의 대학 생활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빈민가인 스미스 힐을 떠나 대학 강단으로 가게 된 건 농구 특기생으로 받은 장학금 때문이었다. 그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고 훨씬 어려운 고비를 맞았을 게 틀림없다.”
지루의 연구는 두 번의 중요한 시기를 맞는데, 첫 번째는 사회계급과 학교 교육에 관한 에세이를 쓴 1970년대 말이다. 이 무렵 그는 윌리엄 파이너, 진 애니언, 마이클 애플 등 영향력 있는 교육이론가와 교류한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초반, 행위와 학생저항에 관한 논의에 참여한 것이다.
『교육이론과 저항』(최명선 옮김, 성원사, 1990)에서 헨리 지루는 “학교가 사회문화적 재생산의 장 이상이라고 설파한다. 그는 학교를 지배의 논리로만, 교사를 지배계급의 앞잡이로만 보는 관점은 이론적 결점이 많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바르지 못하고, 전략적으로도 무용하다고 비판했다.” 『교육과정 논쟁』(한준상 외 옮김, 집문당, 1988)은 헨리 지루의 편저서다.
디즈니는 무얼 가르치는가
『디즈니 순수함과 거짓말』(성기완 옮김, 아침이슬, 2001)에선 디즈니사가 미국의 대중문화 형성에 어떤 교육적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다. “디즈니는 가정, 학교, 지역사회에 바람직한 모델을 제공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과거에 대한 감상적 시각을 통해 미래를 형성해간다는 논리를 편다.”
그래서였구나! 1970년대 후반, 공영방송에서 일요일 오후에 틀어준 디즈니랜드 단막극이 가뜩이나 나른한 일요일 오후를 더 나른하게 한 것은. <인어공주>(1989)에서 <뮬란>(1998)에 이르는 디즈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좀 달라졌을까? 문제점이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
여자아이와 여성의 성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다. “<인어공주>와 <라이온 킹>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축소시켜 한정된 의미만으로 여성 등장인물을 구성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여성 인물은 궁극적으로 남성들에게 복종하고 자신의 힘이나 희망을 전적으로 지배적인 남성들의 이야기 안으로 국한시킨다.”
인종차별 또한 디즈니 영화의 주된 논쟁거리다. <알라딘>(1992)이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왔고, <라이온 킹>(1994)에서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담겨 있는 인종차별적인 요소는 등장인물의 사투리와 인종의 의미를 가진 언어 속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비민주적인 사회관계에 대한 찬양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특징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헨리 지루는 네 가지 처방을 제시한다. 첫째, 디즈니가 어린이들에게 가치를 가르치고 상품을 팔고자 침투하는 대중문화영역을 학습과 시비를 가리는 장소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학부모, 지역 공동체, 교육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디즈니 영화가 주는 다양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셋째, 디즈니 영화가 환상 이상의 그 무엇이 되고자 하고 오락과 교육 사이의 오랜 관계를 부정하기보다는 그 사이에서 상상을 발휘하는 영역이 되고자 한다면, “오락의 진행 과정에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배경을 어떻게 삽입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 디즈니가 경제와 소비와 문화의 영역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것은, “우리가 디즈니의 권력관계를 분석할 때 좀 더 폭넓고 복잡한 범위 내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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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