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리』
샬롯 브론테 저/송은주 역 | 은행나무
내 화장대 건너 맞은편 벽장 안에 로체스터 부인의 옷이라고 명명된 옷가지가 (…)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도 벅찼다. (…) “누군가 사람의 형상이 벽장에서 나타났습니다. (…) 그 여자는 곧바로 걸려 있던 제 면사포를 들었습니다. 그걸 들고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걸 자기 머리에 쓰고 거울 쪽으로 걸어갔어요. 바로 그 순간 어두운 타원형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과 이목구비 모습을 꽤 자세히 보게 되었어요. (…) 무시무시한 유령 같았습니다. 세상에, 주인님,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끔찍한 얼굴이었어요! 변색된 얼굴이었어요. 야만인 같은 얼굴이었어요.” (…) 예복을 차려입고 면사포를 쓰고 있는 내 모습이 거울에 보였다. 그 모습이 평소 내 모습과 너무 달라 처음 보는 낯선 사람 같았다. (샬롯 브론테, 『제인 에어』, 류경희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0.)
샬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는 위와 같은 고딕소설적 장면이 나옵니다. “제인의 가장 어두운 분신 (…) 숨겨진 자아 (…) 분노한 자아”(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다락방의 미친 여자』, 박오복 옮김, 북하우스, 2022)인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가 마주치는 장면이지요. 사실 버사는 제인의 어두운 욕망, 즉 “로체스터의 지배와 제인의 종속을 상징하는 손필드를 파괴하고 싶은 제인의 내밀한 욕구”를 충족해주는 존재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셜리』(송은주 옮김, 은행나무, 2025)에는 (실질적인 주인공인) “집안의 천사” 캐럴라인 헬스턴의 “자유롭고 제약받지 않은 자아 (…) 모든 억압된 욕망의 투사”인 셜리 킬더가 등장합니다.
캐럴라인은 제인과 마찬가지로 고아이긴 하지만 꽤 아름다운 젊은 처녀이고 지역 유지인 숙부 헬스턴 주임사제의 후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개척하지 못하고 “서서히 불모의 침체 상태로 얼어붙어”(10장) “정원[의 딱딱한] 조각상”(22장)이 되어갑니다. 길버트와 구바의 설명에 따르면 캐럴라인은 “시련의 진정한 원인이 바로 여성의 의존적인 위치에 있음을 증명”하는 인물입니다.
반면 셜리는 모든 면에서 캐럴라인과 대비됩니다. ‘셜리’라는 남자 이름(브론테가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남성에게만 붙이는 이름이었다지요)에 ‘향사’라는 작위를 지녔으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대저택의 주인이자 부유한 상속녀이고 적극적이며 개방적인 성격입니다.
사업이라! 그 말을 하니 진짜로 제가 더는 소녀가 아니라 여자, 그 이상의 뭔가가 되었다는 걸 자각하게 되어요. 저는 향사랍니다. 셜리 킬더 향사가 제 호칭이고 작위예요. 부모님은 저에게 남자의 이름을 주었고, 저는 남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요. 저에게 남성성을 조금은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하지요. 제라르 무어같이 위풍당당한 앵글로-벨기에인이 제 앞에 서서 저에게 심각하게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때면 제법 신사가 된 기분이에요. (11장)
셜리가 캐럴라인의 분신이라는 것은 셜리가 행하는 일들이 캐럴라인의 내밀한 욕망의 실현이라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게걸스럽고 뻔뻔한 보좌사제들을 내쫓는다든지, 캐럴라인이 사랑하는 로버트 무어의 청혼을 받는다든지 말이죠. 셜리는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 서두를 읽고 로맨스 비슷한 것이 준비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독자여, 그것이야말로 오산이다. 감상이나 시, 몽상을 기대하는가? 열정, 자극, 멜로드라마를 원하는가? 기대를 내려놓으라. 기준을 낮추라. 여러분 앞에는 냉정하고 진지하며 현실적인 무언가가 놓여 있다. 그것은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제 일어나서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잠에서 깨는 월요일 아침만큼이나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1장)
그러나 셜리는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자신의 수동적 분신인 캐럴라인을 닮아가다 결국 같은 운명에 처합니다. 셜리 역시 공적인 역사를 만들어가는 남성 사회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고, “여성의 복종을 기반으로 한 의심스러운 제도”(“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물론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더 높은 계급도 포함되지요)에 대한 세심한 존중은 모든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해요”(21장))인 “행복한” 결혼이라는 결말에 이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녀는 정해진 날짜에 구속되었다. 사랑에 정복되었고 맹세에 속박당했다. 그리하여 셜리는 사막에서 사슬에 묶인 사람들처럼 완전히 패배당하고 억압당한 채 수척해졌다. 그녀의 포획자만이 그녀의 기분을 되살려줄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존재만이 상실한 자유의 특권을 보상해줄 수 있었다. (37장)
사회적 자살과도 같은 묘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사실 시대적 배경이 되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1832~1901)에 기혼 여성은 재산권도 선거권도 없었습니다. 법적·사회적 권리가 전무했다고 할 수 있지요. 어쩌면 셜리의 변화는 그에 대한 암시가 아니었을까요? 브론테는 이 작품을 쓰는 동안 형제자매인 브랜웰, 에밀리, 앤의 죽음을 차례로 겪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절망감이 드리워진 듯싶기도 합니다.
『셜리』 그리고 특히 『제인 에어』와 함께 읽을 만한 책으로,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권해드립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의 전사(前史)를 그리는 소설이에요.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억압과 절망의 여성 서사를 딛고 “내가 가는 캄캄한 길을 밝혀”주고자 합니다.
이제 드디어 나는 내가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도 알았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촛불이 깜박거렸고, 나는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손으로 바람을 막아주자 촛불은 다시 살아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이 캄캄한 길을 밝혀주기 위하여.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윤정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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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 1
출판사 | 은행나무
셜리 2
출판사 | 은행나무
셜리 1~2권 세트
출판사 | 은행나무
제인 에어 1
출판사 | 펭귄클래식코리아
다락방의 미친여자
출판사 | 북하우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출판사 | 웅진지식하우스

심하은 (출판 편집자)
은행나무 해외 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