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강연회]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 『예수전』 김규항
『예수전』(김규항 지음/돌베개 펴냄)을 읽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예수의 진면목은 물론 예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시정했습니다. 과장하자면, 성수(聖水)를 맞은 격이랄까요.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사회적인 의미에서 그를 다시 봤습니다. 왜 그에게 ‘혁명가’이자 ‘영성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는지,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예수가 왜 필요한 인물인지 확인했습니다.
200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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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사람. 먹보요, 술꾼이며, 세관들과 죄인들의 친구.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삶을 즐기고 더 많이 행복하라고. 별명 한번 볼까요. ‘먹고 마시길 즐기는 자’. 잔치를 열어 혁명을 하자고 합니다. 즐겁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라는 말도 떠오르네요. 이쯤 보면, ‘파티 피플’의 일원이 아닐까 싶죠? 함께 놀아 보고픈 생각도 들죠?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까요. 예수입니다. 어, 진정? 하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네요. ‘예수’라는 타이틀에 대해 실토하자면, 그저 단순했습니다. 인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다가 고난과 박해 속에 십자가에 박혔던 분. 성인(聖人). 좀더 나아가봐야 ‘하느님의 아들’로 일컬어지는 종교 지도자. 그러니까 종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종교 안에 갇힌 이름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근본주의적 전도 행태, 지금-여기에 개신교 일부의 탐욕적 작태까지 가세할라치면, 예수의 이름은 오물을 뒤집어쓴 듯했습니다. 그를 믿는(다고 떠벌리는) 어떤 신도들은, 파렴치한 행각을 펼치면서도 예수의 잠언을 끄집어냅니다. 우리네 사람살이는 더 팍팍해지는데, 세를 불린 특정 교회(들)의 곳간은 비대해져 가니, 이것도 하느님이 바라는 바인가, 냉소를 하게 되더군요. 누군가는 일전에 서울을 봉헌한다고 그분 이름을 더럽히기까지 하는데, 비신도가 보기에도 예수의 가르침은 그게 아닌 듯했지요.
『예수전』(김규항 지음/돌베개 펴냄)을 읽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예수의 진면목은 물론 예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시정했습니다. 과장하자면, 성수(聖水)를 맞은 격이랄까요.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 사회적인 의미에서 그를 다시 봤습니다. 왜 그에게 ‘혁명가’이자 ‘영성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는지,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예수가 왜 필요한 인물인지 확인했습니다.
“예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가장 많은 오해에 휩싸인 인물이다. 지배계급이 일찌감치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자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만들어버린 후, 사람들은 그 예수를 각자의 세속적 욕망을 신에게 청탁하는 매우 유능한 중계인 쯤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오해의 일부라도 걷어 내고 싶었다.”(p.11)
그렇게 오해의 일부를 걷어내 준 김규항 선생을 만났습니다. 명실상부한 좌파로서 우리 사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분이죠. 지난 2일 서울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열린 『예수전』 출간기념 강연회(‘예수로 읽는 한국 사회’)를 통해서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국민장이 있었고, 그 와중에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셔서 경황이 없는 와중이라며 양해를 구한 김 선생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눴습니다.
자, 이제부터 풀어놓을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라!”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건 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상상력과 실천. 잘못 길들인 화폐와 욕망이 길어낸 패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나요. 새로운 세상! 이 말만으로도 벅찬 당신과 함께 손을 맞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함께 새로운 세상.
지금 필요한 건 뭐? ‘나눔 체제’!
“새로운 세상이 되려면 사회구조가 변혁돼야 합니다. 나눔의 체제로 만드는 겁니다. 이 나눔 체제는 흔히 얘기되는 나눔이나 기부단체에서 말하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여유분에 대해 나눠주는 동정적인 맥락이 아닙니다. 나눔 체제는 똑같은 인간으로 공정하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말합니다. 나누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나누는 체제죠.”
대개의 우리는 말하죠. 돈 벌면 기부할 거라고. 나눔도 자신이 풍족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말인즉슨,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거죠. 하지만, 그것은 동정이요 시혜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서 소소한 일부를 누군가에게 베풀어준다는 우월의식이 섞인. 그것은 자칫하면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사이에 서열과 위계를 만들고 분리시킵니다. 같은 인간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른 세계의 인간으로 구획되는 것.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p.110)
김규항 선생의 블로그(http://gyuhang.net)에 독일에 사는 한 여성이 트랙백을 걸어서 따라갔더니, 그런 얘기가 있었답니다. ‘독일 사회는 나누기 싫어도 나눌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그만큼 복지체계가 잘 되어있다는 얘기겠죠. “세상은 당연히 그래야죠. 나눔 체제를 만드는 것이 혁명의 내용인데, 그것으론 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구조의 변혁, 즉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회복’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억압착취가 없고, 돈에 매여 모든 것을 평가하고 생을 가늠하지 않는. 경쟁력을 들먹이며 아이를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 키우는 것을 멈추는 것.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이 종속된 화폐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그런 것 말입니다. 혁명이란 것, 별 것 아닌 것 같죠?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 내면을 깊게 파고든 화폐지상주의의 뿌리를 뽑기란 정말로 진정으로 쉽지 않습니다.
변혁은 안과 밖에서 동시에
그런 의미에서 김규항 선생은 내 안의 변혁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가치관을 심어줘서 스스로를 굴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대중, 보통 사람들은 30~40년 전보다 나빠졌습니다. 과거의 보통 사람들은 인간성이 유지돼 왔고, 그래서 사회도 유지됐어요. 온갖 나쁜 체제가 횡행했지만 사람 꼴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건희를 비판하는 사람과 이건희의 차이는 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밖에 없어요. 가치관이나 아이를 키우는 방법이나 생활 양태는 비슷해요.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가권력이 접수해서 이뤄진 혁명, 가령 러시아 혁명 같은 경우도 사회성원의 내면화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바꾸지 못해 곪은 겁니다.”
그는 거듭 강조합니다. 사회성원 내면의 가치관이 함께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 혁명은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이런 말을 건넵니다. “밖에서 들어온 더러운 것은 뒤로 다 나간다. 진짜 더러운 것은 안에서 나온다.” 사람에겐, 적보다 노선이 다른 동지를 더 미워하는 속성이 있답니다. 특히 진보진영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를 보면 명확하지요. “아무리 훌륭하고 지고한 체제라도 안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이 균열을 일으킵니다. 이런 걸 어떡해야 하는가. 혁명이나 변혁을 고민할 때,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죠.”
그러니까, 변혁은 밖과 안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문제죠. 「혁명과 영성」이라는 그의 글(한겨레, 5월14일자)이 생각났습니다. “적은 둘이라는 것, 적은 내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 밖의 적과 싸우면서 내 안의 적과 싸우는 것,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일 수밖에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 말이다.”
제주 잠녀 할머니가 알려준 진리, ‘혼자만 잘 살면 뭔 재민교’
그는 교육방송(EBS)의 <지식채널e>에서 인터뷰한 제주의 잠녀(해녀) 할머니의 얘기를 꺼냅니다. 한 할머니에게 물었답니다. 스쿠버 장비가 편할 텐데, 왜 쓰지 않느냐고. 할머니가 답했답니다. “편하지. 그런데 그걸 내가 쓰면 99명은 어떡하라고.”
“우스개로 제주도 좌파해녀연합의장이라고 했는데, 보통의 할머니이십니다. 평생을 물질하고 그것으로 애들을 키운. 보통 사람들의 어머니요 할머니인데, 주목할 것은 그 사고방식이 몇십 년 전만 해도 농촌-공동체 사회의 지배적 사고방식이었어요. ‘혼자만 잘 살면 뭔 재민교’였죠. 물론 탐욕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공동체의 환영을 받지 못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게 부끄럽거나 이상하지 않고 삶의 방식이 돼버렸어요. 아이들도 그리 키우려고 하고.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결이 지금 같아선, 어떤 사회 체제도 괴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20~30년 사이 이렇게 뒤집힌 거예요.”
깜짝 놀랄 만한 변화죠. 그것도 나쁜 쪽으로의 변화. 더 큰 평수의 아파트와 더 비싼 자동차를 갖고, 통장의 잔고를 늘리고, 내 몸의 가치(연봉)를 높여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회. ‘무한경쟁’이라는 말로, 남을 짓밟아야 하는 경쟁 체제를 당연시하는 사회. 김규항 선생의 말마따나, 이명박 씨는 그런 것을 내면화한 우리를 순정적으로 반영한 인물이죠.
그렇기에 그는 제주 잠녀 할머니처럼 보통 사람들의 정직한 삶의 방식과 태도를 회복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내 안의 변혁의 노력인 영성을 회복해야 하건만, “한국에선 ‘영성’이라는 단어가 오염돼서 온갖 영성들이 판을 치니까 이 말을 하면 오해를 받고, 문제는 영성이 측량?계량화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눔 체제에 조응하는 자발적 가난이나 영성은 결국 각 개체의 자발성에 의해 가능한 부분입니다. 뒤돌아보고 성찰하고 비우는 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를 해야 할까요.
다음 가치관을 선취하는 자, 풍요롭고 충만하리라
“진정한 혁명은 지금으로서는 종교적 형태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몇십 몇백 년 전 인물들은 종교적이었어요. 모든 생물에는 생명이 있고 모두 연결돼 있다고 보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 그게 종교적 태도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졌죠. 예수는 짬만 나면 기도를 했습니다. 고된 일정을 보내고도.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출발은, 예수의 표현을 빌자면, 회개입니다. 이 말이 한국에서는 오염됐는데, 보수 개신교가 공격적으로 모든 언어를 점거했죠.”
그가 말하는 회개는 그 개신교에서 들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희랍어로 ‘돌아섦’의 뜻이랍니다. 삶을 전환시키고 가치관을 뒤집는 것. “기존의 운동이나 혁명을 보면, 가치관 전복이라는 것이 문제시되지 않아요. 주류 노동운동이 대중의 존경을 잃어가는 것은 부르주아 진영의 음해도 있지만, 스스로 존경을 잃는 부분이 있죠. 노동운동의 가치는 인간이 되는 것인데, 권리나 임금 투쟁만 하다보면 더 상품화가 됩니다. 물론 전태일 열사와 같은 경우도 있지만, 제가 말하는 ‘사람답게’는 기존 가치관에 입각해서는 어렵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집힌다는 것은 남보다 많이 갖고 앞서 가는 것을 불편해하고 더디 가더라도, 같이 가는 가치관을 정하는 것, 그것이 세상이 뒤집히는 것이죠.”
그는 운동의 지향점이 자본의 가치관과 동일하다면, 그 운동은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20대 무렵 처음 운동을 할 때나 대부분 운동의 정서이다 보니, 서른을 넘고 가족이 생기면 현실을 들먹여 운동을 그만두는 것이랍니다. 세간에는 이런 말이 정언처럼 나부끼죠.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고, 나이 들어서 마르크스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다.” 전 이 말 무척 싫어합니다. 비겁한 자기변명이죠. 진짜 마르크스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 한풀 꺾이면서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는 것, 한계가 뚜렷합니다. 물론 타고난 사람도 있습니다. 체 게바라와 같은 인물.
“대개의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죠. 그런 사람의 전기를 읽는 사람들이죠. (웃음) 예수는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면서 세상을 변혁?혁명하겠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잘 놀았어요. (웃음) ‘파티 마니아’라는 별명이 틀린 것은 아니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존 가치관을 가진 상태에서는 고통?헌신일 수밖에 없지만, 다음 가치관을 선취한 사람은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가치관이 뒤집히는 것을 예수는 회개라고 표현했고, 가치관이 뒤집힌 사람은 더 즐겁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어요.”
인습에서 벗어나면, 당신은 자유다
물론 가치관을 뒤집는 것, 다음 가치관을 선취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앞선 시대의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살아온 여성들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체크나 관리하지 않아도 인습의 틀에 갇혀 자신의 삶을 제한하며 삽니다. 그게 여느 사람입니다. 내면화된 세상의 율법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것.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나 전통적인 사회와 양태는 달라도. 우리를 짓누르는 이런 기제들. 미래가 불안하니까 뭐든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 남들보다 뒤처지면 추락한다는 불안.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는 인습.
“이런 것이 집약된 것이 아이들 문제죠. 애들을 생각하면 공포에 빠지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감옥의 수인처럼 키웁니다.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자본주의의 인습이고, 이게 자본주의 지배의 정수죠. 아무리 좌파라도 아이들 교육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인습에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교육이 지배 체제의 핵심입니다. 급진 좌파라도 다 걸려요. 서로 그래서 (교육) 얘기를 안 해요. (웃음)”
그리하여, 결국은 교육이 문제입니다. 땅의 가치와 사람들의 가치관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부동산 문제도 따지고 들면, ‘교육’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그건 교육이라는 말도 붙이면 안 된다고 봐요. 훈육이고 사육이죠. 어쨌든 그는 경쟁이라는 수사에 휘둘리는 세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이들 경쟁 때문에 큰일이다 뭐다 하는데, 사실 ‘경쟁’은 생각도 못하는 아이들이나 가정도 많아요.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감사할 줄 알아야죠. 키보드나 두드리면서 너무 처먹어서 돈 주고 운동하고 살 빼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능력이나 나를 뒤돌아보는 습성을 잃어서 그런지, 인간성이 무뎌지고 파렴치해지고 있어요. 사실 우리는 불안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입된 불안감이 그 실체죠. 이런 걸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주입된 인습에 자신의 삶을 속박하는 사람들, 꽤 많습니다. 삶을 심플하게 구성할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잊고 있습니다. 신해철은 15년 전, 이런 노래를 읊었죠.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 질문.
“생각을 전환하면, 인습을 벗어나면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어요. 옛날에는 인습을 벗어나면 죽음이지만, 지금은 벗어난다고 그렇지도 않잖아요. 한국, 참 재밌지 않나요? 삼성을 욕하면서 자식이나 조카가 삼성에 들어가면 좋아하고. 대기업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게 우는 소리를 합니다. 왜 우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만두면 되지. 자기가 괴로우면 그만두면 됩니다. 안 죽습니다. 더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어요. 물론 경제적으로는 나빠지겠지만 죽지 않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죽지 않아요. 제가 그걸 경험하고 있거든요. 경제적으로 다소 불편해지지만, 그 덕에 달리 보이는 세상이 있고, 또 다른 즐거움이 생깁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것, 중요하더군요. 배는 불러오고, 월급은 마약이었죠. 과감한 포기가 진짜 더 큰 행운을 준다고 마음으로 믿고 싶으면서도, 노예의 편안에 몸이 더 솔깃한 나이였습니다. 직장 생활 10년은, 그런 때이죠. 더구나 남들 보기에도 버젓한 직장.
하지만, 그건 별로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젖어서 살다보니, 꿈은 저 어디 하수구에 처박힌 채, 스무 살엔 혁명을 해도 마흔만 넘으면 모두 현실 속에 귀순하고야 마는 굴레에 풍덩 빠지고야 말 것 같더라고요. 이도저도 아닌, 죽도 밥도 아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박제된 펭귄이 될 것 같았고. 조직의 거짓부렁에 기생한 확성기에 머물 것 같았죠. 그리고 나와선, 버티고 견디고 있죠. 더디지만 새로운 꿈을 기획하고 만들면서. 아직 많은 고뇌들도 있지만 가끔은 스스로가 대견합니다. 이렇게 버티고 견디는 것이.
직접적으로 김규항 선생의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부터 그의 글을 통해 자극을 받고 존경해 온 저로선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 아닐까도 싶어요. 그는 또 그렇게 몇 명의 대기업 직원을 그만두게도(!) 만들었다죠. 아주 최근에는 강의를 마친 뒤 아이를 동반한 한 여성이 부탁을 했답니다.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에 대고 “대기업 그만둬도 잘 살 수 있어”라고 자신의 남편에게 말해달라는. 강의 때 한 이야기지만 맥락 없이 들릴 수도 있고 사진 찍는 것도 힘들어 난감했지만, 그는 부탁을 들어주면서, 속삭였답니다. “잘 사시길…….”(「GYUHANG.NET’-잘 사시길」)
인민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변화
그렇습니다. 회개, 즉 가치관의 전복으로서 자유나 해방에 이를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또한 사회 변화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죠. 그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실제 인민들의 삶과 밀착한, 좀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변화. 누구의 삶의 자리에서 출발하느냐가 관건인 변화.
“몇십 년 전 캐릭터가 케로로 중사나 다스베이더처럼 우리 삶에 침투했지만, (웃음) 이것은 대중들 가치관의 반영이죠. 무식하고 거칠다보니까 30년 전 스타일로 막돼먹은 정치를 펼치다보니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이른바 상식의 정치가 많이 부각되고 있어요. 개혁이라는 이름이 한국 사회에 큰 비중을 차지하죠. 정치적 민주주의나 권위주의 타파 등 편견 없이 인정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30년 전 전 세계 인민을 벼랑으로 몰아넣은 신자유주의가 현실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내몰린 사람 입장에서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조중동(신문)은 신자유주의 극우분파라면, DJ나 노무현 정권과 시민운동 등은 신자유주의 개혁분파라 할 수 있어요. 그들 입장에서는 근본적 차이가 없어요.”
예수는 그랬습니다. 편향적이었습니다. 지배세력이나 기득권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인민의 삶에서 출발했고, 그들과 함께 부대끼고 살았습니다. 예수에게 사회 변혁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변혁이고 진보였습니다. 부자들에겐 감세라는 혜택을 내려주시고,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위한 정책에는 인색하고 무관심한, 최저임금까지 깎으려 드는 것. 과연 예수의 뜻일까요. 몰염치한 지금-여기의 최고 통치자이자 한 교회의 장로는 한국 교회의 주류 목회자 상이 드러나는 듯해서 씁쓸합니다.
예수는, 말하자면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 즉 사회주의적 태도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p.204)
예수의 참뜻도 모른 채, 자의적으로 예수를 끌어들이는 그들에겐 오로지 박제된 예수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했던 일곱 교회를 향해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했다지요. 촛대를 옮기는 것은, 본디 정신에서 멀어진 교회를 예수 스스로 버리겠다는 선언이라고 하던데, 아마 지금-여기의 주류 교회에선 촛대가 뽑히고 없을 겁니다. 대신 예수는 교회 밖으로 촛대를 옮겨 인민들과 함께 출발할 겁니다.
모름지기, 편향적이 돼야 할 듯싶습니다. 그동안 기득권과 권력 혹은 화폐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체제가 굴러갔으니, 균형을 맞추려면 이젠 나눔 체제가 자리를 잡아야겠지요. 하지만 즉각적인, 결정적인 변화는 없을 겁니다. 지난하지만 꾸준한 믿음으로 가야한다고 김규항 선생은 말합니다. “당대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오만입니다. 역사를 보면 6개월 만에 혁명을 보기도 하고, 3~4대가 지나도 혁명을 못 보기도 합니다. 조급할 필요도 없고,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세상은 변화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가치관의 변혁, 즉 다음 가치관을 선취함으로써 입점할 수 있습니다.”
책의 얘기도 옮기지요.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p.80)
너에게 『예수전』을 권한다
집도 저축도 없고, 다음달 생계를 걱정하고 살지만, 경제적 풍요 대신 다른 풍요를 선택한 그는,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를 양보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현재에 충만하게 살려다 보니 자유롭고, 아이들에게도 신뢰와 믿음이라는 풍요를 얻고 존중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의 양식을 타인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좋고 편한 것을 선택하세요. 편한 대로 사세요. 왜 멋지게 살려고만 하세요. 결단이 필요하고 고통스러우면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예수전』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는 교회 안에서 박제된,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언제든 인민의 곁에서 혁명과 영성을 함께 빚어내는 존재. 신자유주의의 패악이 휩쓸고 간 자리, 아직 그 찌꺼기들이 덕지덕지 묻어 ‘대박’을 외쳐대지만, 예수가 그러했듯,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혹은 “우리는 어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당신의 주변에게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일단 『예수전』 읽고 시작하시죠. 그리고 오늘, 6월 10일.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출상일을 기해 일어난 독립운동(6.10만세운동)과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을 계기로 일어난 민주항쟁(6.10민주항쟁)의 날. 우리는 정당한 분노를 알고 있지요. 예수도 무조건적인 용서와 순응이 아닌, 단호한 저항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우리는 흔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의 순서를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되 죄는 분명히 미워하라’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p.189)
그렇게 우리의 정당한 분노가 진정한 용서로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요. 오는 6월 16일 41주기를 앞둔 ‘김수영’을 권합니다. 김규항 선생은 오래전, 가까이 두고 있는 책으로 『김수영 전집 2: 산문』을 꼽았습니다. 그는 김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꼽습니다. “초보 좌파로 자기 규정하는 내가, 마르크스주의 원전이나 신자유주의 비판서 따위를 끼고 살지 않고 반공포로 출신의 자유주의자 김수영을 끼고 사는 일은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수영을 읽을 때 나는 늘 평화롭다.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뜨거움의 총량이 지하를 넘어서면서도 그 뜨거움의 방식이 나 같은 치졸한 인간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의 뜨거움이 한 인간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한껏 고양된 뜨거움이라면, 수영의 뜨거움은 한 인간이 일생에 걸쳐 성격처럼 지닐 수 있는 일상적 뜨거움이다.” 참, 여기서 지하는 ‘김지하’를 가리킵니다.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까요. 예수입니다. 어, 진정? 하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네요. ‘예수’라는 타이틀에 대해 실토하자면, 그저 단순했습니다. 인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다가 고난과 박해 속에 십자가에 박혔던 분. 성인(聖人). 좀더 나아가봐야 ‘하느님의 아들’로 일컬어지는 종교 지도자. 그러니까 종교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종교 안에 갇힌 이름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근본주의적 전도 행태, 지금-여기에 개신교 일부의 탐욕적 작태까지 가세할라치면, 예수의 이름은 오물을 뒤집어쓴 듯했습니다. 그를 믿는(다고 떠벌리는) 어떤 신도들은, 파렴치한 행각을 펼치면서도 예수의 잠언을 끄집어냅니다. 우리네 사람살이는 더 팍팍해지는데, 세를 불린 특정 교회(들)의 곳간은 비대해져 가니, 이것도 하느님이 바라는 바인가, 냉소를 하게 되더군요. 누군가는 일전에 서울을 봉헌한다고 그분 이름을 더럽히기까지 하는데, 비신도가 보기에도 예수의 가르침은 그게 아닌 듯했지요.
“예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가장 많은 오해에 휩싸인 인물이다. 지배계급이 일찌감치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자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만들어버린 후, 사람들은 그 예수를 각자의 세속적 욕망을 신에게 청탁하는 매우 유능한 중계인 쯤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오해의 일부라도 걷어 내고 싶었다.”(p.11)
그렇게 오해의 일부를 걷어내 준 김규항 선생을 만났습니다. 명실상부한 좌파로서 우리 사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분이죠. 지난 2일 서울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열린 『예수전』 출간기념 강연회(‘예수로 읽는 한국 사회’)를 통해서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국민장이 있었고, 그 와중에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셔서 경황이 없는 와중이라며 양해를 구한 김 선생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눴습니다.
자, 이제부터 풀어놓을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라!” 그러니까 지금 필요한 건 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상상력과 실천. 잘못 길들인 화폐와 욕망이 길어낸 패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나요. 새로운 세상! 이 말만으로도 벅찬 당신과 함께 손을 맞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함께 새로운 세상.
지금 필요한 건 뭐? ‘나눔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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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이 되려면 사회구조가 변혁돼야 합니다. 나눔의 체제로 만드는 겁니다. 이 나눔 체제는 흔히 얘기되는 나눔이나 기부단체에서 말하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여유분에 대해 나눠주는 동정적인 맥락이 아닙니다. 나눔 체제는 똑같은 인간으로 공정하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말합니다. 나누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나누는 체제죠.”
대개의 우리는 말하죠. 돈 벌면 기부할 거라고. 나눔도 자신이 풍족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말인즉슨,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거죠. 하지만, 그것은 동정이요 시혜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서 소소한 일부를 누군가에게 베풀어준다는 우월의식이 섞인. 그것은 자칫하면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사이에 서열과 위계를 만들고 분리시킵니다. 같은 인간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다른 세계의 인간으로 구획되는 것.
“진정한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라,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가 아니라, 누구든 제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정직하게 일하는 것만으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다.”(p.110)
김규항 선생의 블로그(http://gyuhang.net)에 독일에 사는 한 여성이 트랙백을 걸어서 따라갔더니, 그런 얘기가 있었답니다. ‘독일 사회는 나누기 싫어도 나눌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그만큼 복지체계가 잘 되어있다는 얘기겠죠. “세상은 당연히 그래야죠. 나눔 체제를 만드는 것이 혁명의 내용인데, 그것으론 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회구조의 변혁, 즉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회복’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억압착취가 없고, 돈에 매여 모든 것을 평가하고 생을 가늠하지 않는. 경쟁력을 들먹이며 아이를 사람이 아닌 상품으로 키우는 것을 멈추는 것. 사람이 만들었지만, 사람이 종속된 화폐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그런 것 말입니다. 혁명이란 것, 별 것 아닌 것 같죠? 하지만 아닙니다. 우리 내면을 깊게 파고든 화폐지상주의의 뿌리를 뽑기란 정말로 진정으로 쉽지 않습니다.
변혁은 안과 밖에서 동시에
그런 의미에서 김규항 선생은 내 안의 변혁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가치관을 심어줘서 스스로를 굴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대중, 보통 사람들은 30~40년 전보다 나빠졌습니다. 과거의 보통 사람들은 인간성이 유지돼 왔고, 그래서 사회도 유지됐어요. 온갖 나쁜 체제가 횡행했지만 사람 꼴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건희를 비판하는 사람과 이건희의 차이는 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밖에 없어요. 가치관이나 아이를 키우는 방법이나 생활 양태는 비슷해요.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가권력이 접수해서 이뤄진 혁명, 가령 러시아 혁명 같은 경우도 사회성원의 내면화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바꾸지 못해 곪은 겁니다.”
그는 거듭 강조합니다. 사회성원 내면의 가치관이 함께 동조하지 않는다면 그 혁명은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이런 말을 건넵니다. “밖에서 들어온 더러운 것은 뒤로 다 나간다. 진짜 더러운 것은 안에서 나온다.” 사람에겐, 적보다 노선이 다른 동지를 더 미워하는 속성이 있답니다. 특히 진보진영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를 보면 명확하지요. “아무리 훌륭하고 지고한 체제라도 안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이 균열을 일으킵니다. 이런 걸 어떡해야 하는가. 혁명이나 변혁을 고민할 때,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죠.”
그러니까, 변혁은 밖과 안이 동시에 이뤄져야 하는 문제죠. 「혁명과 영성」이라는 그의 글(한겨레, 5월14일자)이 생각났습니다. “적은 둘이라는 것, 적은 내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 밖의 적과 싸우면서 내 안의 적과 싸우는 것, 말이다. 그래서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일 수밖에 없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 말이다.”
제주 잠녀 할머니가 알려준 진리, ‘혼자만 잘 살면 뭔 재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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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육방송(EBS)의 <지식채널e>에서 인터뷰한 제주의 잠녀(해녀) 할머니의 얘기를 꺼냅니다. 한 할머니에게 물었답니다. 스쿠버 장비가 편할 텐데, 왜 쓰지 않느냐고. 할머니가 답했답니다. “편하지. 그런데 그걸 내가 쓰면 99명은 어떡하라고.”
“우스개로 제주도 좌파해녀연합의장이라고 했는데, 보통의 할머니이십니다. 평생을 물질하고 그것으로 애들을 키운. 보통 사람들의 어머니요 할머니인데, 주목할 것은 그 사고방식이 몇십 년 전만 해도 농촌-공동체 사회의 지배적 사고방식이었어요. ‘혼자만 잘 살면 뭔 재민교’였죠. 물론 탐욕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공동체의 환영을 받지 못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게 부끄럽거나 이상하지 않고 삶의 방식이 돼버렸어요. 아이들도 그리 키우려고 하고.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결이 지금 같아선, 어떤 사회 체제도 괴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20~30년 사이 이렇게 뒤집힌 거예요.”
깜짝 놀랄 만한 변화죠. 그것도 나쁜 쪽으로의 변화. 더 큰 평수의 아파트와 더 비싼 자동차를 갖고, 통장의 잔고를 늘리고, 내 몸의 가치(연봉)를 높여야 한다고 부르짖는 사회. ‘무한경쟁’이라는 말로, 남을 짓밟아야 하는 경쟁 체제를 당연시하는 사회. 김규항 선생의 말마따나, 이명박 씨는 그런 것을 내면화한 우리를 순정적으로 반영한 인물이죠.
그렇기에 그는 제주 잠녀 할머니처럼 보통 사람들의 정직한 삶의 방식과 태도를 회복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내 안의 변혁의 노력인 영성을 회복해야 하건만, “한국에선 ‘영성’이라는 단어가 오염돼서 온갖 영성들이 판을 치니까 이 말을 하면 오해를 받고, 문제는 영성이 측량?계량화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눔 체제에 조응하는 자발적 가난이나 영성은 결국 각 개체의 자발성에 의해 가능한 부분입니다. 뒤돌아보고 성찰하고 비우는 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를 해야 할까요.
다음 가치관을 선취하는 자, 풍요롭고 충만하리라
“진정한 혁명은 지금으로서는 종교적 형태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몇십 몇백 년 전 인물들은 종교적이었어요. 모든 생물에는 생명이 있고 모두 연결돼 있다고 보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 그게 종교적 태도입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졌죠. 예수는 짬만 나면 기도를 했습니다. 고된 일정을 보내고도. 진정한 혁명가는 영성가이고 진정한 영성가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출발은, 예수의 표현을 빌자면, 회개입니다. 이 말이 한국에서는 오염됐는데, 보수 개신교가 공격적으로 모든 언어를 점거했죠.”
그가 말하는 회개는 그 개신교에서 들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희랍어로 ‘돌아섦’의 뜻이랍니다. 삶을 전환시키고 가치관을 뒤집는 것. “기존의 운동이나 혁명을 보면, 가치관 전복이라는 것이 문제시되지 않아요. 주류 노동운동이 대중의 존경을 잃어가는 것은 부르주아 진영의 음해도 있지만, 스스로 존경을 잃는 부분이 있죠. 노동운동의 가치는 인간이 되는 것인데, 권리나 임금 투쟁만 하다보면 더 상품화가 됩니다. 물론 전태일 열사와 같은 경우도 있지만, 제가 말하는 ‘사람답게’는 기존 가치관에 입각해서는 어렵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뒤집힌다는 것은 남보다 많이 갖고 앞서 가는 것을 불편해하고 더디 가더라도, 같이 가는 가치관을 정하는 것, 그것이 세상이 뒤집히는 것이죠.”
그는 운동의 지향점이 자본의 가치관과 동일하다면, 그 운동은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20대 무렵 처음 운동을 할 때나 대부분 운동의 정서이다 보니, 서른을 넘고 가족이 생기면 현실을 들먹여 운동을 그만두는 것이랍니다. 세간에는 이런 말이 정언처럼 나부끼죠.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고, 나이 들어서 마르크스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다.” 전 이 말 무척 싫어합니다. 비겁한 자기변명이죠. 진짜 마르크스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 한풀 꺾이면서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는 것, 한계가 뚜렷합니다. 물론 타고난 사람도 있습니다. 체 게바라와 같은 인물.
“대개의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죠. 그런 사람의 전기를 읽는 사람들이죠. (웃음) 예수는 고통과 헌신을 감수하면서 세상을 변혁?혁명하겠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잘 놀았어요. (웃음) ‘파티 마니아’라는 별명이 틀린 것은 아니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존 가치관을 가진 상태에서는 고통?헌신일 수밖에 없지만, 다음 가치관을 선취한 사람은 풍요롭고 충만합니다. 가치관이 뒤집히는 것을 예수는 회개라고 표현했고, 가치관이 뒤집힌 사람은 더 즐겁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어요.”
인습에서 벗어나면, 당신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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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치관을 뒤집는 것, 다음 가치관을 선취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앞선 시대의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살아온 여성들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체크나 관리하지 않아도 인습의 틀에 갇혀 자신의 삶을 제한하며 삽니다. 그게 여느 사람입니다. 내면화된 세상의 율법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것.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나 전통적인 사회와 양태는 달라도. 우리를 짓누르는 이런 기제들. 미래가 불안하니까 뭐든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 남들보다 뒤처지면 추락한다는 불안.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는 인습.
“이런 것이 집약된 것이 아이들 문제죠. 애들을 생각하면 공포에 빠지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감옥의 수인처럼 키웁니다.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자본주의의 인습이고, 이게 자본주의 지배의 정수죠. 아무리 좌파라도 아이들 교육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인습에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교육이 지배 체제의 핵심입니다. 급진 좌파라도 다 걸려요. 서로 그래서 (교육) 얘기를 안 해요. (웃음)”
그리하여, 결국은 교육이 문제입니다. 땅의 가치와 사람들의 가치관을 풍비박산으로 만든 부동산 문제도 따지고 들면, ‘교육’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그건 교육이라는 말도 붙이면 안 된다고 봐요. 훈육이고 사육이죠. 어쨌든 그는 경쟁이라는 수사에 휘둘리는 세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아이들 경쟁 때문에 큰일이다 뭐다 하는데, 사실 ‘경쟁’은 생각도 못하는 아이들이나 가정도 많아요.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감사할 줄 알아야죠. 키보드나 두드리면서 너무 처먹어서 돈 주고 운동하고 살 빼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능력이나 나를 뒤돌아보는 습성을 잃어서 그런지, 인간성이 무뎌지고 파렴치해지고 있어요. 사실 우리는 불안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입된 불안감이 그 실체죠. 이런 걸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주입된 인습에 자신의 삶을 속박하는 사람들, 꽤 많습니다. 삶을 심플하게 구성할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잊고 있습니다. 신해철은 15년 전, 이런 노래를 읊었죠.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 질문.
“생각을 전환하면, 인습을 벗어나면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어요. 옛날에는 인습을 벗어나면 죽음이지만, 지금은 벗어난다고 그렇지도 않잖아요. 한국, 참 재밌지 않나요? 삼성을 욕하면서 자식이나 조카가 삼성에 들어가면 좋아하고. 대기업이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게 우는 소리를 합니다. 왜 우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만두면 되지. 자기가 괴로우면 그만두면 됩니다. 안 죽습니다. 더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어요. 물론 경제적으로는 나빠지겠지만 죽지 않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죽지 않아요. 제가 그걸 경험하고 있거든요. 경제적으로 다소 불편해지지만, 그 덕에 달리 보이는 세상이 있고, 또 다른 즐거움이 생깁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것, 중요하더군요. 배는 불러오고, 월급은 마약이었죠. 과감한 포기가 진짜 더 큰 행운을 준다고 마음으로 믿고 싶으면서도, 노예의 편안에 몸이 더 솔깃한 나이였습니다. 직장 생활 10년은, 그런 때이죠. 더구나 남들 보기에도 버젓한 직장.
하지만, 그건 별로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젖어서 살다보니, 꿈은 저 어디 하수구에 처박힌 채, 스무 살엔 혁명을 해도 마흔만 넘으면 모두 현실 속에 귀순하고야 마는 굴레에 풍덩 빠지고야 말 것 같더라고요. 이도저도 아닌, 죽도 밥도 아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박제된 펭귄이 될 것 같았고. 조직의 거짓부렁에 기생한 확성기에 머물 것 같았죠. 그리고 나와선, 버티고 견디고 있죠. 더디지만 새로운 꿈을 기획하고 만들면서. 아직 많은 고뇌들도 있지만 가끔은 스스로가 대견합니다. 이렇게 버티고 견디는 것이.
직접적으로 김규항 선생의 계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과거부터 그의 글을 통해 자극을 받고 존경해 온 저로선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 아닐까도 싶어요. 그는 또 그렇게 몇 명의 대기업 직원을 그만두게도(!) 만들었다죠. 아주 최근에는 강의를 마친 뒤 아이를 동반한 한 여성이 부탁을 했답니다. 동영상을 찍는 카메라에 대고 “대기업 그만둬도 잘 살 수 있어”라고 자신의 남편에게 말해달라는. 강의 때 한 이야기지만 맥락 없이 들릴 수도 있고 사진 찍는 것도 힘들어 난감했지만, 그는 부탁을 들어주면서, 속삭였답니다. “잘 사시길…….”(「GYUHANG.NET’-잘 사시길」)
인민의 자리에서 출발하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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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회개, 즉 가치관의 전복으로서 자유나 해방에 이를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또한 사회 변화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죠. 그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실제 인민들의 삶과 밀착한, 좀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변화. 누구의 삶의 자리에서 출발하느냐가 관건인 변화.
“몇십 년 전 캐릭터가 케로로 중사나 다스베이더처럼 우리 삶에 침투했지만, (웃음) 이것은 대중들 가치관의 반영이죠. 무식하고 거칠다보니까 30년 전 스타일로 막돼먹은 정치를 펼치다보니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이른바 상식의 정치가 많이 부각되고 있어요. 개혁이라는 이름이 한국 사회에 큰 비중을 차지하죠. 정치적 민주주의나 권위주의 타파 등 편견 없이 인정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30년 전 전 세계 인민을 벼랑으로 몰아넣은 신자유주의가 현실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신자유주의에 내몰린 사람 입장에서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조중동(신문)은 신자유주의 극우분파라면, DJ나 노무현 정권과 시민운동 등은 신자유주의 개혁분파라 할 수 있어요. 그들 입장에서는 근본적 차이가 없어요.”
예수는 그랬습니다. 편향적이었습니다. 지배세력이나 기득권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인민의 삶에서 출발했고, 그들과 함께 부대끼고 살았습니다. 예수에게 사회 변혁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변혁이고 진보였습니다. 부자들에겐 감세라는 혜택을 내려주시고,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위한 정책에는 인색하고 무관심한, 최저임금까지 깎으려 드는 것. 과연 예수의 뜻일까요. 몰염치한 지금-여기의 최고 통치자이자 한 교회의 장로는 한국 교회의 주류 목회자 상이 드러나는 듯해서 씁쓸합니다.
예수는, 말하자면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내 것과 남의 것의 철저한 분리, 즉 엄격한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 정신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 사랑에 적대적인 사회체제가 틀림없다. 자본주의에 적응하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예수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예수의 이웃 사랑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태도, 즉 사회주의적 태도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p.204)
예수의 참뜻도 모른 채, 자의적으로 예수를 끌어들이는 그들에겐 오로지 박제된 예수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했던 일곱 교회를 향해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했다지요. 촛대를 옮기는 것은, 본디 정신에서 멀어진 교회를 예수 스스로 버리겠다는 선언이라고 하던데, 아마 지금-여기의 주류 교회에선 촛대가 뽑히고 없을 겁니다. 대신 예수는 교회 밖으로 촛대를 옮겨 인민들과 함께 출발할 겁니다.
모름지기, 편향적이 돼야 할 듯싶습니다. 그동안 기득권과 권력 혹은 화폐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체제가 굴러갔으니, 균형을 맞추려면 이젠 나눔 체제가 자리를 잡아야겠지요. 하지만 즉각적인, 결정적인 변화는 없을 겁니다. 지난하지만 꾸준한 믿음으로 가야한다고 김규항 선생은 말합니다. “당대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오만입니다. 역사를 보면 6개월 만에 혁명을 보기도 하고, 3~4대가 지나도 혁명을 못 보기도 합니다. 조급할 필요도 없고,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세상은 변화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가치관의 변혁, 즉 다음 가치관을 선취함으로써 입점할 수 있습니다.”
책의 얘기도 옮기지요. “변화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꿈을 꾼다며 비웃음과 조롱을 받는 사람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끈기 있는 노력에 의해 일어난다.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지던 세상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일어난 혜택은 시나퍼의 그늘처럼 모든 사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한 사람들은 물론 그들을 적대하고 탄압한 사람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진다. 역사에서 보듯 세상의 변화는 늘 그래왔고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p.80)
너에게 『예수전』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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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도 저축도 없고, 다음달 생계를 걱정하고 살지만, 경제적 풍요 대신 다른 풍요를 선택한 그는,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를 양보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현재에 충만하게 살려다 보니 자유롭고, 아이들에게도 신뢰와 믿음이라는 풍요를 얻고 존중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의 양식을 타인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좋고 편한 것을 선택하세요. 편한 대로 사세요. 왜 멋지게 살려고만 하세요. 결단이 필요하고 고통스러우면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예수전』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는 교회 안에서 박제된,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언제든 인민의 곁에서 혁명과 영성을 함께 빚어내는 존재. 신자유주의의 패악이 휩쓸고 간 자리, 아직 그 찌꺼기들이 덕지덕지 묻어 ‘대박’을 외쳐대지만, 예수가 그러했듯,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혹은 “우리는 어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당신의 주변에게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일단 『예수전』 읽고 시작하시죠. 그리고 오늘, 6월 10일.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출상일을 기해 일어난 독립운동(6.10만세운동)과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을 계기로 일어난 민주항쟁(6.10민주항쟁)의 날. 우리는 정당한 분노를 알고 있지요. 예수도 무조건적인 용서와 순응이 아닌, 단호한 저항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어요. “우리는 흔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의 순서를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되 죄는 분명히 미워하라’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p.189)
그렇게 우리의 정당한 분노가 진정한 용서로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요. 오는 6월 16일 41주기를 앞둔 ‘김수영’을 권합니다. 김규항 선생은 오래전, 가까이 두고 있는 책으로 『김수영 전집 2: 산문』을 꼽았습니다. 그는 김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꼽습니다. “초보 좌파로 자기 규정하는 내가, 마르크스주의 원전이나 신자유주의 비판서 따위를 끼고 살지 않고 반공포로 출신의 자유주의자 김수영을 끼고 사는 일은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수영을 읽을 때 나는 늘 평화롭다.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뜨거움의 총량이 지하를 넘어서면서도 그 뜨거움의 방식이 나 같은 치졸한 인간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의 뜨거움이 한 인간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한껏 고양된 뜨거움이라면, 수영의 뜨거움은 한 인간이 일생에 걸쳐 성격처럼 지닐 수 있는 일상적 뜨거움이다.” 참, 여기서 지하는 ‘김지하’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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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