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
한국 근현대 미술에서 지역은 단순한 출신지가 아니라, 작가의 시선과 감각을 형성하는 근원적인 환경이었다. 각 지역의 자연과 풍경, 삶의 방식은 예술가의 내면에 깊게 스며들어 고유한 조형 세계를 만들어냈다. 박수근(양구), 이성자(진주), 전혁림(통영), 김택화(제주). 네 명의 작가는 지역의 삶과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예술 언어를 구축하며, 한국 미술의 다양성과 깊이를 확장한 대표적인 인물로 남았다.
1. 박수근 - 양구의 소박하고 단단한 삶을 그린 화가

박수근의 세계는 강원도 양구의 척박한 자연과 검박한 생활 문화에서 출발한다. 산이 깊고 겨울이 길었던 지역의 특성은 그의 회화에서 두텁고 거친 마티에르, 단단한 선, 소박한 장면으로 나타난다. 양구에서 체득한 삶의 태도는 그가 평생 그린 인물 -어머니, 아이, 노점상, 동네 이웃-의 존재감 속에 녹아 있다. 강원도 특유의 절제된 분위기는 그의 작업을 화려함 대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채워주었다. 지역의 거칠지만 진실한 풍경은 곧 그의 예술의 근원이 되었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예술가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박수근(1914-1965)이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상징적 화가이자, ‘인간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포착한 작가였다. 박수근은 양구에서의 어린 시절과 가난했던 시대의 기억을 바탕으로, 소박한 삶의 순간들을 한국의 질감과 정서로 담아냈다. 서양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한국적 흙냄새가 나는 화면을 만들고자 했으며, 그가 찾아낸 질감은 결국 ‘박수근의 표면’이라는 고유한 언어가 되었다. 그의 화면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깊은 울림을 건네는 돌벽 같은 단단함을 지닌다.
박수근이 지속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주제가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아기를 업은 어머니, 길을 걷는 소녀, 노점의 아주머니, 빨래터의 풍경-그가 그린 대상들은 모두 ‘우리의 이웃이자 우리의 삶’이었다. 그는 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장 깊고 따뜻한 시선을 건넸으며, 그 결과 그의 작업은 단순한 회화를 넘어 ‘삶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담은 기록이 되었다.
양구 출신 예술가로서 박수근이 특별한 이유는, 지역이 그의 정체성과 예술적 감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척박한 자연, 느린 시간, 검박한 삶의 태도는 그의 그림에서 ‘소박하지만 강한 세계관’으로 자리했다. 양구는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그의 예술적 기초 체력을 키운 장소였고, 그곳에서 체득한 감각은 전쟁과 이주, 가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화려한 기교 대신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타인의 삶에 대한 따뜻한 공감, 일상의 소중함에 대한 통찰은 국적과 시대를 넘어 공명한다. 이는 오늘날 많은 작가가 박수근을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무와 두 여인, 1962, 캔버스에 유채 130x89㎝, 리움미술관 소장. 사진 : 국립현대미술관
2. 이성자 - 진주에서 세계로, ‘여정’의 감각을 확장한 작가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작가 이성자는 진주의 자연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출발하여 프랑스에서 새로운 언어를 구축했다. 진주는 예로부터 선비문화와 조용한 감성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그의 작품에서 섬세한 내면성, 여정(旅程)의 서사, 시적 추상성으로 변주된다. 진주에서의 어린 시절이 남긴 정서적 기반은 이후의 이주와 여행 경험과 결합하며, 지도·별·기호와 같은 우주적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그는 지역적 뿌리를 잃지 않되, 이를 세계적 감각과 연결해 낸 대표적 작가로 평가된다.
진주 출신의 이성자(1918-2009) 작가를 떠올리면, ‘우주적 감수성’을 회화에 담아낸 예술가라는 점이 먼저 생각난다. 진주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그는 이후 프랑스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동서양을 잇는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하였다. 지역에서 출발했지만, 세계를 향해 열린 감각으로 작업을 확장해 낸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화면은 언제나 여행, 이주, 우주, 그리고 내면의 길이라는 키워드를 품고 있다.
한국 여성 예술가로서 1950~60년대 유럽 미술계에 진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그 안에서 단순히 ‘동양적 정서’를 소비시키지 않고, 자신의 뿌리와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만들어냈다는 점은 더욱 중요한 가치이다.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지도 같은 형상들, 점·선·면의 추상적 구조는 ‘보이는 세계 너머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했던 그의 시선을 반영한다.
이성자 작가가 진주 출신 지역 예술가로서 어린 시절 마주한 자연과 풍경, 그리고 여성으로서 겪어낸 시대의 감정들은 훗날 그의 작품 속에서 ‘여정의 기억’이라는 형태로 다시 피어났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국적과 문화를 넘나들었지만, 그 근원에는 늘 한국의 기억과 감각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 두 세계가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융합된 점이 그의 회화를 더욱 유니크하게 만든다. 또한 한국 여성 작가로서 드물게 동서양 미술계 모두에게 인정받은 인물이다. 프랑스에서 수많은 개인전과 국제전을 열었고, 귀국 후에는 후학 양성과 지역 문화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며 ‘작가로서의 삶’과 ‘시민으로서의 삶’을 균형 있게 지켜왔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미술계의 성취를 넘어, 한 세대의 여성 예술가가 어떻게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이성자 ‘내가 아는 어머니’, 1962. 개인 소장. 사진 : 이성자기념사업회
3. 전혁림 - 통영의 빛과 바다, 색채로 완성한 지역의 미학

전혁림 작가의 중심에는 언제나 통영의 색이 있다. 남해의 푸른 바다, 골목 지붕들의 적색, 바람과 빛이 만들어내는 강렬한 대비. 통영은 오랜 항구 도시로서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고, 그 다채로움은 그의 작업에서 대담한 색채, 단순하지만 리듬감 있는 형태, 햇빛의 반짝임 같은 화면 구성으로 나타난다. 통영의 자연과 생활 풍경은 박수근이 소박함으로, 이성자가 추상적 서사로 확장한 것과 달리, 전혁림에게서는 생동하는 색채의 조형성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작품은 지역의 시각적 풍요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통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바다의 깊은 청색과 햇빛에 반사된 흰 파편,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오래된 시간의 결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전혁림(1915-2010) 작가는 이 모든 것을 누구보다 오래 바라보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색채 세계를 구축한 작가이다. ‘한국의 마티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을 마주하면 그 어떤 수식어보다도 ‘통영의 색을 가장 통영답게 그려낸 화가’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남해의 강렬한 블루, 통영 붕장어처럼 짙은 그린, 골목 지붕들의 적색, 마을의 햇살을 닮은 옐로우가 한 화면 안에서 흔들림 없이 자리한다. 색을 겹겹이 쌓아가는 그의 방식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통영이라는 삶의 감각을 색으로 번역해 낸 행위’에 가깝다. 형태는 자유롭지만 생동감 있고, 색은 과감하지만 조화로우며, 화면은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리듬을 품고 있다.
평생을 통영에 머물며 그곳의 빛과 계절, 사람들의 삶을 회화적으로 해석해 간 점에 주목할 만하다. 지역에 머문다는 것이 지역성에 갇힌다는 뜻이 아니라, 지역을 통해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음을 작가는 평생의 회화로 보여준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보기 드문 ‘색채 화가’로서의 자리도 확고하게 남긴 그의 작업은 모노크롬과 단색화가 미술계를 주도하던 시기에도, 자신만의 색채 감각을 굽히지 않았다. 통영의 바다와 골목에서 배운 색은 그에게서 결코 멀어지지 않았고, 이를 평생에 걸쳐 변주하며 독보적인 조형 언어로 발전시켰다. 그가 남긴 색채의 기억은 지금도 통영 곳곳에 남아 있으며, 지역을 기반으로 예술을 이어가는 많은 이들에게 ‘자신만의 시선을 믿는 용기’를 일깨워준다. 예술은 결국,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진실한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것을.
전혁림 ‘통영항’ (2005)
4. 김택화 - 제주 신화와 자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

김택화(1940-2006)는 제주가 낳은 대표적 현대미술가다. 1940년 제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격동 속에서 피난 온 화가 홍종명에게 사사하며 미술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제주 최초로 홍익대 미술대학에 진학해 추상회화를 중심으로 작업했고, 1962년 제11회 국전에서 추상 작품 <작품 7>로 대학생 최초 특선을 수상했다. 심사위원은 박수근과 김환기였으며, 당시 평론가 박서보는 김택화의 작품을 “내향적 집념으로 이루어진 예술세계”라 평했다. 이 시기의 그는 형식과 정신의 균형, 서정과 절제의 조화를 추구한 내면적 추상을 전개했고, 같은 해 한국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그룹 Origin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당대 미술 담론 속에 자리했다.
이후 1965년, 그는 도시의 화단을 뒤로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섬의 바람과 오름의 곡선, 굿의 리듬과 신화적 상징은 그에게 새로운 조형 언어의 원천이 되었다. 제주라는 독립적 문화권의 신화·자연·기후는 그의 회화 속에서 강렬한 색면과 단순화된 형상, 원시적 에너지로 나타났다. 붉은색, 검은색, 파란색을 중심으로 한 색면은 바람의 결과 굿의 울림, 그리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명성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제주에 뿌리내린 삶과 자연 감각은 그에게 고유한 조형 문법을 부여했고, 지역성을 동시대 언어로 번역한 그의 화면은 한국적 모더니티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90년대 이후 그는 급격히 변해가는 제주 현실 속에서도 제주의 원형을 지키고자 했다. 그의 캔버스에는 포구와 초가, 마을의 형상이 둥글고 유연한 덩어리로 변모하며, 풍경의 경계는 안개처럼 흩어졌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문 그의 회화는 지역을 넘어선 ‘시각적 사유의 여정’으로 이어졌다. “가장 제주적인 것이 가장 우주적이다”라는 신념 아래, 그는 섬의 풍광 속 빛과 바람, 사람과 생명의 흐름을 통해 보편적 존재의 질서를 탐구했다.
대표작 <한라산>(1999,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이러한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병귤나무와 초가, 퐁낭나무로 둘러싸인 마을 뒤로 솟은 한라산은 제주의 정신적 중심이자 순수함과 강인함의 상징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제주의 소주 브랜드 ‘한라산’의 심벌로 널리 알려졌고, 일본의 디자인 여행서 d design travel JEJU(D&Department 발행) 한국판 표지에도 실리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김택화의 작업은 종종 토속적이라 불리지만, 단순한 향토성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제주라는 구체적 장소의 기억과 신화를 보편적 시각 언어로 변환시켜, 세계 어디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조형성을 제시했다. 지역에 뿌리를 두되 그 시선이 더 넓은 세계로 향했다는 점이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또한 그는 후학 양성과 지역 미술 발전에도 헌신하며 제주 미술 생태계의 정신적 토양을 구축했다.
2019년 제주 조천읍 신흥리에 개관한 김택화미술관(KIM TEKHWA MUSEUM)은 그의 작업과 철학을 이어가고 있다. 작품 신흥리의 배경지에 세워진 미술관은 회화와 드로잉을 상설·기획 전시로 소개하며, 제주의 예술과 일상을 잇는 문화 거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김택화의 예술은 지금도 제주의 바람 속에서 숨 쉬며, 지역적 감수성이 어떻게 세계적 미학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포구, 캔버스에 유채 (1988)
지역의 감각에서 세계의 미술로
오늘 소개하는 네 분의 예술가는 각기 다른 지역의 풍경과 삶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지역의 기후와 문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각각의 작품에서 독립된 세계관으로 정교하게 변환되었다. 이들은 ‘지역 출신 작가’라는 호칭을 넘어, 한국 미술이 얼마나 다양한 뿌리와 감각에서 성장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한 지역의 기억이 한 시대의 예술사를 형성할 수 있음을, 그리고 지역성은 세계와 연결되는 또 하나의 출발점임을 이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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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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