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神에게, 한 몸 바칠 준비가 된 이야기꾼의 ‘노가리’ - 『인간적이다』 성석제
‘성뻥’ ‘이빨꾼’ ‘노가리’ 등과 같은 별명을 가진, 그중에서도 먹는 걸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꾼과 눙친 ‘인간적인’ 이야기들, 아니 노가리들. 한번 들어 보든가, 씹든가. 그러면서 당신도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아 보는 건 어떤가.
2010.04.05
작게
크게
공유
거칠게 말하자면, 세헤라자데의 시대다.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의 등장이 만든 풍속. 블로그, 트위터 등으로 이야기의 장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샤푸리 야르왕처럼 만족을 모르는 포식자가, ‘얼마나 재밌나 두고 보자’며 눈 부릅뜨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생명의 위협 때문도 아니지만, 끊임없이 재잘대고 조곤거리며 때론 외친다. 이야기를 풀어놓거나 듣는(혹은 읽는) 우리들. 차고 넘치는 이야기의 홍수. 그렇다고 범람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데이터 스모그(정보 홍수)가 심미안을 흐려 놓을 때가 있긴 해도.
그렇다. 뭉뚱그리자면, 이야기. 인류의 문명과 함께한 이야기다. 아니 문명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야기다. 언제 이야기가 차고 넘치지 않을 때가 있었느냐는 말도, 맞다. 그만큼 이야기의 역사는 오래되고, 이야기의 힘은 세다.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 아니 이야기!
내가 아는, 이야기의 힘에 대한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 시인, 소설가, 극작가, 자연 철학자였던 괴테(1749~1832)의 경우. 스물다섯 때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낸 그는, 여든셋 『파우스트』 2부를 완성하고 그해 죽기까지 창작 활동을 잇는다. 근 60년을 이어 온 창작샘. 장삼이사인 우리가 생각하기엔 ‘와우, 그게 가능해? 에이, 천재니까 가능했겠지’. 여든셋, 생각해 보자. 노망이나 치매가 먼저 떠오를 나이. 북극에 곰이 사는지, 사자가 사는지도 가물가물하고, 코끼리 다리가 넷인지 다섯인지도 혼란스럽고, 기억하기마저 귀찮지 않을까.
그렇다면 괴테는, 외계의 별에서 왔나? 그의 한 시편에는 그 비밀의 단서를 제공하는 대목이 나온단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생김새를 물려받고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의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Lust zu fabulieren)’을 물려받았다.” 그러니까, 괴테의 어머니는 이야기로 아들을 키웠다. 아들의 세헤라자데. 괴테 어머니의 회고. “바람과 불과 물과 땅ㅡ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도정일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라는 제목의 칼럼. 도 선생님은 “창조성의 다른 이름은 상상력이며, 괴테의 경우 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키워 준 첫 번째 공로자는 밤마다 별과 별 사이에 길을 놓아 주었던 그의 이야기꾼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한 별별 길 놓기. 그리하여, 이야기는 단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반응이며 길 놓기이고 연결하기이다. 이 연결의 능력이 상상력이다. 교육열이 높다는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사다 던져 주고 “네가 읽어”라고 말하거나 무슨 무슨 학원으로 내쫓음으로써 할 일을 다 했다고 흔히 생각한다. 비디오만 열심히 틀어 주는 부모도 많다. “내가 시간이 어딨어?”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 ‘우리’에게 괴테의 어머니는 말한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아라, 함께.”
사실 우리가 이야기꾼이라고 붙일 수 있는 이는, 이야기의 수만큼 많지 않다. 또 괴테의 어머니처럼 세헤라자데의 현명함을 닮은 이는, 더 줄어들리라.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세헤라자데가 있으니까. ‘성석제’라는 이야기꾼. 이야기의 즐거움에 풍자와 해학, 익살까지 섞인 그의 이야기를 듣자면, 별을 향한 길이 어렴풋이 열릴 것 같다. 물론 길이 놓이는 것은, 그 이야기에 반응하는 우리의 자세 혹은 태도와 관련되겠지.
별들 사이에 길을 놓자고 제안하는 이야기꾼이 이번에 ‘자유 단편’을 들고 왔다. 『인간적이다』(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펴냄). 자유 단편? 장편이나 단편에 익숙한 이들에겐 다소 생소할, 어떤 문학적 양상. 숏스토리, 짧은 소설, 엽편(葉片)소설, 장편(掌篇)소설이라고도 불리지만, ‘자유’라는 말 때문에, 길이나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에, ‘자유 단편’이라는 말을 선호한다는 성석제 선생님을 지난 23일 홍대 부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성뻥’ ‘이빨꾼’ ‘노가리’ 등과 같은 별명을 가진, 그중에서도 먹는 걸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꾼과 눙친 ‘인간적인’ 이야기들, 아니 노가리들. 한번 들어 보든가, 씹든가. 그러면서 당신도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아 보는 건 어떤가. 물론 괴테가 되라는 건 아니고, 그저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 보는 것도, 괜찮다~. 그 정도다.
일상의 이야기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면
『인간적이다』, 네 번째 자유 단편이자 열두 번째 소설집으로 알고 있다. 축하한다. 소회나 기분은?
“자유 단편을 모은 것으로 4.5번째다. 처음 소설을 쓴 게, 자유 단편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였고, 『재미나는 인생』 그 사이에 절반은 자유 단편이고 나머지는 산문을 모은 『쏘가리』가 있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3.5번째고.
참 오랜만이다. 처음 소설을 냈을 때는, 시를 쓸 무렵이라, 소설을 쓴다는 의식이 별로 없었다. 시가 아니니까, 일단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왔는데, 지금은 자유 단편을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쓰고 있다. 소설이 포착할 수 있는 인생의 어떤 장면, 섬광 같은 장면, 혹은 단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길고 짧고를 떠나 이런 식의 소설로 접근하는 게, 긴장되고 재미있다. 읽는 분 역시 그런 긴장이나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단편보다 짧은 이야기다. 장?단편 소설과 다른 호흡과 재미가 있다.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드라이하게, 아주 날카롭게, 생의 한 단면이 주는 서늘한 느낌 같은 걸 소설로 쓰는 게 좋았다. 그전에는 한꺼번에 자유 단편을 썼는데, 이번 책은 두 편을 빼고 다 발표한 거다. 세월은 많이 걸렸다. 7년 정도가 흘렀다. 시간의 흔적이 들어 있는 게 느껴진다. 변해왔구나 싶다.”
발표되지 않은 두 편은 뭔가. 그리고 제목이 재밌다. 인간적이고.(웃음) 표지 그림도 재밌고.
“「인간의 예의」와 「처삼촌 묘 벌초하기」다. 전자는 교정까지 마치고, 표지 그림을 부탁하려고 최석운 화백을 만났다.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났는데, 얘길 나누다가 그 얘기를 듣고 썼다. 다음에 만나 보여 줬더니 자기가 얘기한 거랑 다르다는 거야. 소설은 이야기랑 다른 거다. 이야기는 흘러가는 거고, 소설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크기, 의성어, 동작 등을 문장으로 잡아서 시간을 부여한다. 문장이 갖고 있는 틀 안에 이야기를 넣는 것은 다르다. 같은 이야기라도 말로 하는 것과 소설 쓰는 것은 다르다고 말해 주려다 말았다.(웃음)
끝을 약간 손봤다. 책이 나온 뒤 보더니 좋아졌다고 하더라. 제목은 우연히 나왔다. 사실 ‘인간적이다’라는 제목의 자유 단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걸 표제작으로 하면 그 작품이 고생일 것 같더라. 쓸데없는 조명을 받을까 고민도 되고. 제목을 결정한 뒤, 자유 단편의 제목을 바꿨다. ‘인간적이다’라는 제목은, 어느 날 종로4가 향굣말(창덕궁 부근) 앞에서 삼겹살과 낮술을 마셨다.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참, 인간적이네’ 하는 말을 했는데 ‘아, 이거 제목으로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여러 사람에게도 물어봤는데 괜찮다고.(웃음)
‘인간적이다’는 이런 뜻이 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그 자체를 말하진 않는다. 인간 자체에 대해 쓰진 않는다. 인간은 무엇이다, 라고 정리하면 원고료가 안 나오니까.(웃음) 인간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소설의 본령도 아니고. 소설은 원래 이야기에서 출발했으니까, ‘인간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이다. 인간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마시고 먹고, 다투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것을 쓰는 거다. 소설 정의를 내 식으로 하자면, 개인의 역사다. 개인의 역사인데, 인간적이라는 것은 소설이라는 말이다. ‘소설이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대부분 주변 사람에게 들은 얘기가 소재이고, 한 인터뷰를 보니 스스로를 “들은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전달하는 자”라고도 표현했더라. 책도 일상의 속살을 들여다보거나, 술자리에서 이야길 듣는 기분이랄까, 인간적이랄까.(웃음) 일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감각을 열어 놓는 것 같다.
“술 냄새가 나긴 하네.(웃음) 3할 정도는 내가 겪거나 친구들이 해 준 이야기, 혹은 술자리에서의 이야기다. 만나서 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존재하고, 소설은 문장이니까. 다시 재구성하는 건 다른 문제가 된다. 흘러가는 이야기에 시간성을 부여하고, 원료는 있지만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업이다.
귀는 늘 열려 있다. 닫으려고 해도 문이 없다.(웃음)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한 이야기에 예민한 편이다. 그렇게 겪는 것들이 원료가 된다. 의도적으로 메모장을 들고 다니면서 적고 찍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집어넣어 둔다. 시간이 지나면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거기서 발효도 되고 압력에 의해서 변화도 일어난다. 화학적인 변화가 내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아주 잘 가공이 된 것들만 나온다. 그야말로 문장으로 직역해도 될 정도의 이야기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걸 쓰면 기분이 별로 안 좋다. 잘 잡히지도 않고. 그런 건 거저먹는 것 같아서.(웃음)”
일상을 이야기화하는데 기준 같은 게 있나? ‘이건 이야기해 보자, 아니면 버리자’ 하는. 어떻게 이야기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을 법한데…….
“그걸 판단하는 건, ‘기미’ 같은 거다. 아주 작은 기미. ‘소설이다, 아니다’의 판단 기준은 나한테 있다. 물론 독자한테도 있을 테고. 일단은 내가 먼저니까. 소설이 갖고 있는 자장 같은 것들이 있다. 이쪽으로 넘어오면 산문이다, 시다, 희곡이다 분류할 수 있을 텐데, 소설이다 할 수 있는 기미도 있다. 그걸 문장의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바뀐다.
농담 삼아 얘기하는 게 소설이 되려면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소설일 것. 둘은 소설을 쓴 사람이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쓸 것. 셋은, 읽는 사람이 ‘소설이구나’ 생각해야 된다. 물론 다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다수결이 원칙이라, 셋 중에 두 개만 있으면 된다. 독자가 소설 아니라고 하면 소설이 아닐 수도 있고,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설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쓴 글이다. 이 자유 단편들이 발표된 지면은 신문, 잡지도 있고, 연재도 있고, 소설이라고 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런데 내가 소설이라고 쓴 것도 있다.”
이런 말도 있더라. 성석제표 소설은 새로운 문학적 양상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짧은 이야기, 짧은 소설 하면, 곧 성석제를 떠올릴 만큼 독보적이지 않나 싶은데. 이런 짧은 이야기를 쓸 때와 장?단편을 쓸 때, 어떻게 다른가.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결과물은 비슷할지 몰라도 내 경우는 시를 쓰다가 소설을 쓴 입장이라, 자유 단편은 시하고 소설 사이에 있는 중간적인 존재 같다고도 할까. 시는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소설과도 거리가 있는. 그렇다고 콩트도 아니고.(자유 단편이) 내가 처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수많은 선배들도 있고, 사실이 그랬고. 장자의 이야기들이 소설이냐 아니냐고 봤을 때, 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게 많다. 모두 다 그렇진 않아도.
카프카나 브레히트, 루쉰, 빅셀 같은 사람들도 썼고, 그 사람들도 원고 매수에 구애받지 않았다. 충분히 했는가, 즉 태도의 문제다. 충분히 썼는가. 특히 독일어권에서 그런 전통이 강하다. 빅셀은 스위스 사람이고, 카프카도 체코지만 그랬다. 시보다는 덜 상징적이고 덜 함축적이고, 소설보다 더 압축돼 있고 선명하다. 강렬해야 하고, 짧으면서도 강해야 된다.
(자유 단편과 장?단편을 쓸 때) 그림이나 설계가 달라진다. 단편만 해도, 내용을 시간으로 치면 적어도 며칠, 몇 주일, 요새는 길어지는 추세니까, 한 사람의 일생이나 마지막 순간을 담기도 한다. 장편은 한 사람의 일생뿐 아니라 여러 삶이 들어가고. 이런 자유 단편은 그야말로 아주 짧은 순간, 몇 초다.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한눈에, 한 호흡으로 나와야 한다. ‘무산소 글쓰기’라고 해야 하나.(웃음) 중간에 쉬고 그러는 게 아니고. 그렇게 쓰고 있는 사람도 무산소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충분히 서로가 누리는 거다. 쓰는 사람은 쓰고자 하는 바를 쓰고, 읽는 사람이 감흥을 느끼도록 설계를 하고.”
웃음 함량을 높이는 데도 상당한 공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야기를 쓰면서 독자들의 어떤 웃음을 염두에 두나.
“일부러 그렇게 하진 않는다. 일부러 웃기려면 잘 안 웃기잖나. 웃음은 기질도 있겠지만, 낙천성이라든가, 우연히 된 경우도 많다. 그렇게 쓰려는 게 아닌데, 들어가 앉아 있는 씨톾 같은 거지. ? ?신이 우습지 않으면 남을 웃길 수도 없다. 뭐랄까, 누에가 실을 만들 때 실을 품고 있잖나. 나라는 존재 자체가, 가벼운 웃음기랄까, 그런 걸 몸에 많이 담고 있으면 실처럼 잘 나오겠지. 물론 ‘술술~’이라는 게 말이 쉽지, 잘 안 된다.(웃음) 힘들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시와 같은 면도 있다.”
이야기꾼이 말하는 이야기
「독지가들」에 ‘보이스피싱’ 얘기가 나오는데, 분명 직접적인 경험담일 거라는 확신(?)을 하면서 팡 터졌다. 혹시 진짜 있었던 일 맞나? 49개 이야기 중에 직접 겪은 일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얼마나 될까?
“글쎄, 직접 겪은 일이 많지는 않을 거다. 몇 개는 있다. 보이스피싱은 나도 당한 적이 있고, 그게 일부 녹아 있다.(글에서처럼) 그렇게 끝나면 좋은데, 안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라.(웃음) 원고 마감은 다가오고, 아주 급하면, 그런 경우가 흔치 않긴 한데, 급하다 싶으면 할 수 없지.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내 얘기는) 안 쓰려고 했는데 하면서. 소설가의 본능은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나 자신이 주인공인 걸 꺼려하는. 희화화되거나 잘난 체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이가 들면서 말릴 힘은 없는데, 되도록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피해 왔다. 대놓고 자전소설을 쓰라면 모를까.”
「외로울 틈이 없다 - 이야기꾼1」에 이런 말이 있다. “물론 우리도 그런 이야기 덕분에 외로울 틈이 없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퍼 나르기도 하고 또 다른 친구에게 들려주느라 바빠서.”(p.144) 혹은 이야기를 쓰고 듣는 이유는?
“우리는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야기가 아닐까. 과장, 축소, 왜곡도 있지만, 위안을 주고 외롭지 않게도 하고 돈독하게도 해 주고. 이야기는 삶을 기름지게 해 주고 수준을 높여 주기도 한다. 입 다물고 죽으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가 없겠나.”
한편으론, 외로워야 ‘인간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하하.
“인간적이라고 하는 건, 이런 거다. ‘압도적이다’ 이런 말이 나오는. 1,800 계단을 가마로 한 번 나를 때마다 2만 원을 받는 가마꾼이 있다 치자. 얼마나 힘들겠나. 그런데, 그걸 나눈다. 만 원씩. 두 사람이니까. 손님이 없으면 그들은 도박도 한다. 얼마나 번다고 도박을 하느냐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감동한다. 인간적이네. 여기서 잃은 사람은 얼마나 우울하겠나. 이것이 인생의 한 단면이다. 도덕적인 잣대로 들이댈 수는 없고, 그걸 보여 주는 게 소설이다.”
‘소설가’라는 호칭보다 ‘이야기꾼’ 호칭이 더 익숙하다. 이야기꾼 성석제, 어떻게 생각하나?
“이야기라는 게, 문학 범주보다 더 넓은 거다. 상상하는 것도 있고. 문학 작품으로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을 얻은 것은 영광스럽다. 소설을 쓰기 훨씬 전에 후배가 나한테 별명을 붙여 줬다. 그 후배 혼자만 날 그렇게 불렀는데, ‘성뻥’이라고.(웃음) 어떤 얘기를 해 줬더니, 못 믿겠다는 거다. 그때 해 준 이야기라는 게, 사실 같은 이야기라는 게 밝혀지자 (후배가) 그렇게 붙였다. 다른 호칭도 쓴다. ‘이빨꾼’ ‘노가리’라든지. 이왕이면 먹는 걸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
인상적인 말이 있다. “지금도 이 이야기들은 필요에 따라, 사람에 따라, 사정에 따라 변하면서 어떤 때는 강하고 어느 때는 약하고 슬프게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생은 계속된다. 이 또한 흘러가리라.”(「이 또한 흘러가리라 - 이야기꾼2」, p.148) 이 글을 쓸 때, 어떻게 나온 것이었는지 혹시 기억나나?
“음, 이런 것 같다. 인생도 흘러가고, 이야기도 인생과 함께 흘러가고. 이야기를 잡아서 거기에 영혼과 시간성을 부여해서 오래도록 우리의 일부로, 문명의 일부로, 인생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 소설가가 할 일인 것 같다. 이야기가 과장이나, 견강부회, 자기 과시가 아니고 이야기가 풍속도 담고 시대를 담는 거. 그런 것을 문학, 소설이라고 하고. 내가 알기론 그렇다.”
「아무도 모르라고」에서 이런 마지막 문장이 나온다. “너희의 미래는 지금 너희가 되기를 열망하는 바로 그것이다.”(p.172) 혹시 지금 모습, 과거에 열망한 바로 그 모습인가.(웃음)
“그때는 뭐가 될지 몰랐다. 그저 잘 놀기를 바랐다. 재미있게 잘 놀기를. 비슷하게 온 것 같다. 지금은 거부가 되는 꿈을.(웃음) 열망하면 되는 것이, 소설이 아닐까.”
이 책에는 웃음, 해학과 함께 감동이 있다. 「감동의 힘」에서는 그 감동이 지닌 힘도 말한다. “감동이라는 무병장수의 명약을 먹고 있다.”(p.204)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과거보다 감동이나 감탄하지 않는다. 무병장수의 명약을 먹지 않는다.
“인터넷 때문인지, 매체별로 개별화돼서 감동을 크게 하는 것도 아니고, 픽 웃거나 잠시 뜨끔할 뿐, 그냥 지나가는 것이 많아졌다. 그런 일이 워낙 많이 노출돼서. 명약을 제대로 복용하려면, 직접 겪어야 한다. 그러면서 가슴이 뛰고 그런 게 좋다. 몸을 움직여서 껴안아도 보고, 눈물도 흘려 보고 이런 게 좋은데 그런 기회가 많지 않다. 간접적으로 살아서 그렇다. 직접 나가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낙타 경주」에서 ‘인간적이다’라는 말이 나오더라. “낙타 경주는 시설이 잘 된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리는 국가대표들의 달리기 경쟁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p.208) 낙타 경주를 직접 보고 느낀 감회인가?
“직접 봤다. 아, 감동이었다. 조금 더 세밀하게 디테일한 묘사를 할 수도 있었는데, 이 작품을 쓸 때만 해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면이 한정돼 있어서 걸러 내서 썼다. 아마 내가 꽤 큰 감동을 받은 순간 중의 하나일 거다. ‘왜 저런 짓을 하고 있나’ 하고 처음에는 굉장히 웃겼다. 그렇게 막 웃다가, 계속 보니 숙연해지고 뭔지 모를 감동을 느꼈다. 그 정도로, 쓸데없는 짓을 열심히 하고 있는 데서. 그게 나라는 인간인 것 같다.(웃음) (좀 더 긴 소설로 써 볼 생각은 없나?) 그건 그거대로 다 했으니까. 다음에는 개 경주? 하하.”
유명한 냉면 전문점에서 낸 비싼 주차비 영수증도 직접? 그렇다면 아직 잘 갖고 있나?
“직접 겪었다. 영수증은 없어졌다. 잠깐 갖고 있었는데. 억울해서라도. 다른 식으로라도 본전을 뽑아야 되니까. 원고료로라도.(웃음)”
언어 사용도 재미있다. 가령, 「게를 먹는 게 맞는 게 아닌 게요?」. 본능적인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맛깔 나는 이런 언어의 조탁은 어떻게?
“말장난이라고 하잖나. 소설도 말장난 중의 하나이다.(웃음) 언어 자체가 사실 아주 예민한 거다. 그것이 가진 힘이나 영향력도 크고. 한 단어가 다른 단어에 미치는 영향도 아주 예민하다. 말의 힘 가운데 장난이 갖고 있는 힘, 그러니까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드는 힘 같은 게 아주 중요하다.(언어 조탁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그냥 그대로. 문학은 묘비명이 아니니까.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시 중에서도 서정시와 서사시를 쓰는 사람이 다르듯이, 그렇게 쓸 때도 있고, 무거운 추를 얹어서 쓸 수도 있다. 뇌 세포가 그런 식으로 정렬이 된다.”
인간의 땀, 숨, 피, 심장 고동이 녹아든 이야기가 필요해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라는 인간세의 보석에 나는 언제나 홀려 있을 것이다. 소설 쓰는 인간이다, 나는”이라고 선언 혹은 다짐을 했다. 어렸을 때 성경과 햄릿을 100번 넘게 읽고, 무협지를 통해 풍자와 역설을 배웠다는 인터뷰도 봤다. 이야기를 향한 애정이 철철 넘친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존재의 일부였다. 이야기를 녹용이나 산삼 먹듯이 많이 섭취했다.(웃음) 지금도 그러니까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나 싶다. 이야기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도 없고. 이야기가 우리 삶의 질도 높여 주고, 인류 문명의 수준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그런대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혹시 이야기의 신이 있고 재단이 있다면, 이 한 몸을 바칠 준비가 돼 있다.(웃음)”
지금, 엄혹한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어떤 숫자나 전광판이나 엘시디로 환원되지 않는, 인생 그대로의 인생이 아닐까. 살아 있는 순간에 대한 이??들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인생의 결이 들어가고, 인간의 땀, 숨, 피, 심장 고동이 녹아 있는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만 부패가, 악취가, 인간의 향기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최석운 화백의 표지 그림, 참 인간적인 그림이다.(웃음) 생년월일이 같고, 재미난 인연이 있을 것 같은데.
“최 화백이 그리게 된 동기가, 지난번 다른 소설책을 냈을 때다. 그 책에 조그만 표지 그림이 있었는데, 그걸 보더니 욕을 하더라. 수준이 낮아졌다고. 다음에 책을 낼 때 자기 허락을 받으라더라.(웃음) 그래서 이번에 책 낼 때, 그려 봐라. 큰소리쳤으니까. 자기를 똑 닮은 그림을 그려 놓고는, 그게 나라고 주장하더라. 배 나온 건 맞다. 나머지는 아니다. 최 화백이 생각한 인간상을 그렸다.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사고뭉치 같기도 하고, 뭔가 재미있는 걸 온몸에 내장하고 있는 듯한 그림이다. 처음에는 나 아닌데 하다가, 계속 보니 친근해지더라.(웃음)
우리 둘이 친하다는 게 알려져서 최 화백이 내가 쓴 소설의 인물이나 이미지를 가지고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루아침에 될 작업은 아니고 몇 년에 걸쳐서 했다. 전시회가 다음 달 제주 올레 길에서 열릴 예정이다. 독자들 신청을 받아서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할 것이다. 소설가와 화가가 함께 동참하는.”
지난해 독일에서 작품집이 번역 출간됐다. 독일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모르겠다. 다음 달에 독일을 갈 예정인데, 한번 물어보려고.”
다음은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각자 가족의 명운을 걸고 싸우는 아버지들의 격투를 다루는. 얼마나 진도가 나간 상태며,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써야 된다. 5월 중순이나 6월에 연재를 시작할 예정이다. 인터넷을 활용해서 연재하게 된다. (인터넷 연재는 처음이지 않나?) 옛날 PC통신이 있던 시절, 하이텔에서 해본 적은 있다. (책으로는 언제쯤?) 대개 연재를 하면 몇 달 있다가 책으로 나오지 않나? 그렇게 보면 책으로는 올해 안에 나올 거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인간적인’ 한마디 건넨다면.
“한창 날이 좋으니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세상 공기를 들이켜면서 바람도 느끼고, 살아 있는 것을 온몸으로 만끽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런 게 가장 좋은 게 아닐까, 인간적이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서 『인간적이다』를 읽고?) 사실, 날 좋고 이럴 때는 책을 안 읽는다. 여행 갈 때, 기차나 비행기를 탈 때 책을 읽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여행 가서, 휴가 가서 읽는 게 제일 좋다. 책이 있으면 읽으니까.”
문득 스쳤다. 성석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이 순간도, 선생님 안에서 어떤 화학적 작용이 일어난다면, 자유 단편이 되겠지? 만약 그리된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나도 한번 이야기를 풀어 볼까. 이야기가 차고 넘치는 시대라고 했지만, 우리는 ‘진짜’ 이야기에 늘 목마른 것 아닐까. 그래서 외롭고 지치고, 소통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선생님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야기가 있다면, 외로울 틈이 없다고. 더구나, 이야기를 통해 감동이라는 무병장수의 명약까지 먹을 수 있는데.
이야기는 늘 삶과 맞닿아 있지만, 우리가 지금 나누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허공에 뜬 가짜 이야기, 짝퉁 이야기. 다시 말하지만, 이야기는 단순 오락이 아니다. 상호 반응이며 길 놓기. 진짜 이야기가 부족하고, 별들 사이에 길을 놓지 못해서. 우리가 이야기에 목마른 까닭.
당신이라는 별, 나라는 별, 그렇게 별별 사이에서 이야기를 놓자. 이야기꾼의 노가리에 우리의 마음과 감각을 열어 놓자. 그러면 우리는 서로 연결된 별로 반짝반짝. 저 별은 당신의 별, 이 별은 나의 별. 나는 당신이라는 별이 궁금해서 가닿고 싶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자.
거참, 별별 이야기, 다 한다.
그렇다. 뭉뚱그리자면, 이야기. 인류의 문명과 함께한 이야기다. 아니 문명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야기다. 언제 이야기가 차고 넘치지 않을 때가 있었느냐는 말도, 맞다. 그만큼 이야기의 역사는 오래되고, 이야기의 힘은 세다.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 아니 이야기!
그렇다면 괴테는, 외계의 별에서 왔나? 그의 한 시편에는 그 비밀의 단서를 제공하는 대목이 나온단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생김새를 물려받고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의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Lust zu fabulieren)’을 물려받았다.” 그러니까, 괴테의 어머니는 이야기로 아들을 키웠다. 아들의 세헤라자데. 괴테 어머니의 회고. “바람과 불과 물과 땅ㅡ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도정일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라는 제목의 칼럼. 도 선생님은 “창조성의 다른 이름은 상상력이며, 괴테의 경우 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키워 준 첫 번째 공로자는 밤마다 별과 별 사이에 길을 놓아 주었던 그의 이야기꾼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업한 별별 길 놓기. 그리하여, 이야기는 단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반응이며 길 놓기이고 연결하기이다. 이 연결의 능력이 상상력이다. 교육열이 높다는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사다 던져 주고 “네가 읽어”라고 말하거나 무슨 무슨 학원으로 내쫓음으로써 할 일을 다 했다고 흔히 생각한다. 비디오만 열심히 틀어 주는 부모도 많다. “내가 시간이 어딨어?”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 ‘우리’에게 괴테의 어머니는 말한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아라, 함께.”
사실 우리가 이야기꾼이라고 붙일 수 있는 이는, 이야기의 수만큼 많지 않다. 또 괴테의 어머니처럼 세헤라자데의 현명함을 닮은 이는, 더 줄어들리라.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세헤라자데가 있으니까. ‘성석제’라는 이야기꾼. 이야기의 즐거움에 풍자와 해학, 익살까지 섞인 그의 이야기를 듣자면, 별을 향한 길이 어렴풋이 열릴 것 같다. 물론 길이 놓이는 것은, 그 이야기에 반응하는 우리의 자세 혹은 태도와 관련되겠지.
별들 사이에 길을 놓자고 제안하는 이야기꾼이 이번에 ‘자유 단편’을 들고 왔다. 『인간적이다』(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펴냄). 자유 단편? 장편이나 단편에 익숙한 이들에겐 다소 생소할, 어떤 문학적 양상. 숏스토리, 짧은 소설, 엽편(葉片)소설, 장편(掌篇)소설이라고도 불리지만, ‘자유’라는 말 때문에, 길이나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에, ‘자유 단편’이라는 말을 선호한다는 성석제 선생님을 지난 23일 홍대 부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성뻥’ ‘이빨꾼’ ‘노가리’ 등과 같은 별명을 가진, 그중에서도 먹는 걸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꾼과 눙친 ‘인간적인’ 이야기들, 아니 노가리들. 한번 들어 보든가, 씹든가. 그러면서 당신도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아 보는 건 어떤가. 물론 괴테가 되라는 건 아니고, 그저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 보는 것도, 괜찮다~. 그 정도다.
일상의 이야기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면
『인간적이다』, 네 번째 자유 단편이자 열두 번째 소설집으로 알고 있다. 축하한다. 소회나 기분은?
“자유 단편을 모은 것으로 4.5번째다. 처음 소설을 쓴 게, 자유 단편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였고, 『재미나는 인생』 그 사이에 절반은 자유 단편이고 나머지는 산문을 모은 『쏘가리』가 있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3.5번째고.
참 오랜만이다. 처음 소설을 냈을 때는, 시를 쓸 무렵이라, 소설을 쓴다는 의식이 별로 없었다. 시가 아니니까, 일단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왔는데, 지금은 자유 단편을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쓰고 있다. 소설이 포착할 수 있는 인생의 어떤 장면, 섬광 같은 장면, 혹은 단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길고 짧고를 떠나 이런 식의 소설로 접근하는 게, 긴장되고 재미있다. 읽는 분 역시 그런 긴장이나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단편보다 짧은 이야기다. 장?단편 소설과 다른 호흡과 재미가 있다.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드라이하게, 아주 날카롭게, 생의 한 단면이 주는 서늘한 느낌 같은 걸 소설로 쓰는 게 좋았다. 그전에는 한꺼번에 자유 단편을 썼는데, 이번 책은 두 편을 빼고 다 발표한 거다. 세월은 많이 걸렸다. 7년 정도가 흘렀다. 시간의 흔적이 들어 있는 게 느껴진다. 변해왔구나 싶다.”
발표되지 않은 두 편은 뭔가. 그리고 제목이 재밌다. 인간적이고.(웃음) 표지 그림도 재밌고.
“「인간의 예의」와 「처삼촌 묘 벌초하기」다. 전자는 교정까지 마치고, 표지 그림을 부탁하려고 최석운 화백을 만났다.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났는데, 얘길 나누다가 그 얘기를 듣고 썼다. 다음에 만나 보여 줬더니 자기가 얘기한 거랑 다르다는 거야. 소설은 이야기랑 다른 거다. 이야기는 흘러가는 거고, 소설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크기, 의성어, 동작 등을 문장으로 잡아서 시간을 부여한다. 문장이 갖고 있는 틀 안에 이야기를 넣는 것은 다르다. 같은 이야기라도 말로 하는 것과 소설 쓰는 것은 다르다고 말해 주려다 말았다.(웃음)
끝을 약간 손봤다. 책이 나온 뒤 보더니 좋아졌다고 하더라. 제목은 우연히 나왔다. 사실 ‘인간적이다’라는 제목의 자유 단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걸 표제작으로 하면 그 작품이 고생일 것 같더라. 쓸데없는 조명을 받을까 고민도 되고. 제목을 결정한 뒤, 자유 단편의 제목을 바꿨다. ‘인간적이다’라는 제목은, 어느 날 종로4가 향굣말(창덕궁 부근) 앞에서 삼겹살과 낮술을 마셨다.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참, 인간적이네’ 하는 말을 했는데 ‘아, 이거 제목으로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여러 사람에게도 물어봤는데 괜찮다고.(웃음)
‘인간적이다’는 이런 뜻이 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그 자체를 말하진 않는다. 인간 자체에 대해 쓰진 않는다. 인간은 무엇이다, 라고 정리하면 원고료가 안 나오니까.(웃음) 인간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소설의 본령도 아니고. 소설은 원래 이야기에서 출발했으니까, ‘인간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이다. 인간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마시고 먹고, 다투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는 것을 쓰는 거다. 소설 정의를 내 식으로 하자면, 개인의 역사다. 개인의 역사인데, 인간적이라는 것은 소설이라는 말이다. ‘소설이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
대부분 주변 사람에게 들은 얘기가 소재이고, 한 인터뷰를 보니 스스로를 “들은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전달하는 자”라고도 표현했더라. 책도 일상의 속살을 들여다보거나, 술자리에서 이야길 듣는 기분이랄까, 인간적이랄까.(웃음) 일상의 거의 모든 순간에 감각을 열어 놓는 것 같다.
“술 냄새가 나긴 하네.(웃음) 3할 정도는 내가 겪거나 친구들이 해 준 이야기, 혹은 술자리에서의 이야기다. 만나서 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존재하고, 소설은 문장이니까. 다시 재구성하는 건 다른 문제가 된다. 흘러가는 이야기에 시간성을 부여하고, 원료는 있지만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업이다.
귀는 늘 열려 있다. 닫으려고 해도 문이 없다.(웃음) 지나가다가 사람들이 한 이야기에 예민한 편이다. 그렇게 겪는 것들이 원료가 된다. 의도적으로 메모장을 들고 다니면서 적고 찍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집어넣어 둔다. 시간이 지나면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거기서 발효도 되고 압력에 의해서 변화도 일어난다. 화학적인 변화가 내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아주 잘 가공이 된 것들만 나온다. 그야말로 문장으로 직역해도 될 정도의 이야기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걸 쓰면 기분이 별로 안 좋다. 잘 잡히지도 않고. 그런 건 거저먹는 것 같아서.(웃음)”
일상을 이야기화하는데 기준 같은 게 있나? ‘이건 이야기해 보자, 아니면 버리자’ 하는. 어떻게 이야기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을 법한데…….
“그걸 판단하는 건, ‘기미’ 같은 거다. 아주 작은 기미. ‘소설이다, 아니다’의 판단 기준은 나한테 있다. 물론 독자한테도 있을 테고. 일단은 내가 먼저니까. 소설이 갖고 있는 자장 같은 것들이 있다. 이쪽으로 넘어오면 산문이다, 시다, 희곡이다 분류할 수 있을 텐데, 소설이다 할 수 있는 기미도 있다. 그걸 문장의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바뀐다.
농담 삼아 얘기하는 게 소설이 되려면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소설일 것. 둘은 소설을 쓴 사람이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쓸 것. 셋은, 읽는 사람이 ‘소설이구나’ 생각해야 된다. 물론 다 만족시킬 필요는 없다. 다수결이 원칙이라, 셋 중에 두 개만 있으면 된다. 독자가 소설 아니라고 하면 소설이 아닐 수도 있고, 소설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설이 되는 경우도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쓴 글이다. 이 자유 단편들이 발표된 지면은 신문, 잡지도 있고, 연재도 있고, 소설이라고 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런데 내가 소설이라고 쓴 것도 있다.”
이런 말도 있더라. 성석제표 소설은 새로운 문학적 양상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짧은 이야기, 짧은 소설 하면, 곧 성석제를 떠올릴 만큼 독보적이지 않나 싶은데. 이런 짧은 이야기를 쓸 때와 장?단편을 쓸 때, 어떻게 다른가.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결과물은 비슷할지 몰라도 내 경우는 시를 쓰다가 소설을 쓴 입장이라, 자유 단편은 시하고 소설 사이에 있는 중간적인 존재 같다고도 할까. 시는 아니고, 그렇다고 일반적인 소설과도 거리가 있는. 그렇다고 콩트도 아니고.(자유 단편이) 내가 처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수많은 선배들도 있고, 사실이 그랬고. 장자의 이야기들이 소설이냐 아니냐고 봤을 때, 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게 많다. 모두 다 그렇진 않아도.
카프카나 브레히트, 루쉰, 빅셀 같은 사람들도 썼고, 그 사람들도 원고 매수에 구애받지 않았다. 충분히 했는가, 즉 태도의 문제다. 충분히 썼는가. 특히 독일어권에서 그런 전통이 강하다. 빅셀은 스위스 사람이고, 카프카도 체코지만 그랬다. 시보다는 덜 상징적이고 덜 함축적이고, 소설보다 더 압축돼 있고 선명하다. 강렬해야 하고, 짧으면서도 강해야 된다.
(자유 단편과 장?단편을 쓸 때) 그림이나 설계가 달라진다. 단편만 해도, 내용을 시간으로 치면 적어도 며칠, 몇 주일, 요새는 길어지는 추세니까, 한 사람의 일생이나 마지막 순간을 담기도 한다. 장편은 한 사람의 일생뿐 아니라 여러 삶이 들어가고. 이런 자유 단편은 그야말로 아주 짧은 순간, 몇 초다.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한눈에, 한 호흡으로 나와야 한다. ‘무산소 글쓰기’라고 해야 하나.(웃음) 중간에 쉬고 그러는 게 아니고. 그렇게 쓰고 있는 사람도 무산소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충분히 서로가 누리는 거다. 쓰는 사람은 쓰고자 하는 바를 쓰고, 읽는 사람이 감흥을 느끼도록 설계를 하고.”
웃음 함량을 높이는 데도 상당한 공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야기를 쓰면서 독자들의 어떤 웃음을 염두에 두나.
“일부러 그렇게 하진 않는다. 일부러 웃기려면 잘 안 웃기잖나. 웃음은 기질도 있겠지만, 낙천성이라든가, 우연히 된 경우도 많다. 그렇게 쓰려는 게 아닌데, 들어가 앉아 있는 씨톾 같은 거지. ? ?신이 우습지 않으면 남을 웃길 수도 없다. 뭐랄까, 누에가 실을 만들 때 실을 품고 있잖나. 나라는 존재 자체가, 가벼운 웃음기랄까, 그런 걸 몸에 많이 담고 있으면 실처럼 잘 나오겠지. 물론 ‘술술~’이라는 게 말이 쉽지, 잘 안 된다.(웃음) 힘들인다고 되는 게 아니고. 시와 같은 면도 있다.”
이야기꾼이 말하는 이야기
“글쎄, 직접 겪은 일이 많지는 않을 거다. 몇 개는 있다. 보이스피싱은 나도 당한 적이 있고, 그게 일부 녹아 있다.(글에서처럼) 그렇게 끝나면 좋은데, 안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라.(웃음) 원고 마감은 다가오고, 아주 급하면, 그런 경우가 흔치 않긴 한데, 급하다 싶으면 할 수 없지.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내 얘기는) 안 쓰려고 했는데 하면서. 소설가의 본능은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나 자신이 주인공인 걸 꺼려하는. 희화화되거나 잘난 체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이가 들면서 말릴 힘은 없는데, 되도록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피해 왔다. 대놓고 자전소설을 쓰라면 모를까.”
「외로울 틈이 없다 - 이야기꾼1」에 이런 말이 있다. “물론 우리도 그런 이야기 덕분에 외로울 틈이 없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퍼 나르기도 하고 또 다른 친구에게 들려주느라 바빠서.”(p.144) 혹은 이야기를 쓰고 듣는 이유는?
“우리는 숙명적으로 주어지는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를 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야기가 아닐까. 과장, 축소, 왜곡도 있지만, 위안을 주고 외롭지 않게도 하고 돈독하게도 해 주고. 이야기는 삶을 기름지게 해 주고 수준을 높여 주기도 한다. 입 다물고 죽으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가 없겠나.”
한편으론, 외로워야 ‘인간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하하.
“인간적이라고 하는 건, 이런 거다. ‘압도적이다’ 이런 말이 나오는. 1,800 계단을 가마로 한 번 나를 때마다 2만 원을 받는 가마꾼이 있다 치자. 얼마나 힘들겠나. 그런데, 그걸 나눈다. 만 원씩. 두 사람이니까. 손님이 없으면 그들은 도박도 한다. 얼마나 번다고 도박을 하느냐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감동한다. 인간적이네. 여기서 잃은 사람은 얼마나 우울하겠나. 이것이 인생의 한 단면이다. 도덕적인 잣대로 들이댈 수는 없고, 그걸 보여 주는 게 소설이다.”
‘소설가’라는 호칭보다 ‘이야기꾼’ 호칭이 더 익숙하다. 이야기꾼 성석제, 어떻게 생각하나?
“이야기라는 게, 문학 범주보다 더 넓은 거다. 상상하는 것도 있고. 문학 작품으로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을 얻은 것은 영광스럽다. 소설을 쓰기 훨씬 전에 후배가 나한테 별명을 붙여 줬다. 그 후배 혼자만 날 그렇게 불렀는데, ‘성뻥’이라고.(웃음) 어떤 얘기를 해 줬더니, 못 믿겠다는 거다. 그때 해 준 이야기라는 게, 사실 같은 이야기라는 게 밝혀지자 (후배가) 그렇게 붙였다. 다른 호칭도 쓴다. ‘이빨꾼’ ‘노가리’라든지. 이왕이면 먹는 걸로 불러 줬으면 좋겠다.”
인상적인 말이 있다. “지금도 이 이야기들은 필요에 따라, 사람에 따라, 사정에 따라 변하면서 어떤 때는 강하고 어느 때는 약하고 슬프게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인생은 계속된다. 이 또한 흘러가리라.”(「이 또한 흘러가리라 - 이야기꾼2」, p.148) 이 글을 쓸 때, 어떻게 나온 것이었는지 혹시 기억나나?
“음, 이런 것 같다. 인생도 흘러가고, 이야기도 인생과 함께 흘러가고. 이야기를 잡아서 거기에 영혼과 시간성을 부여해서 오래도록 우리의 일부로, 문명의 일부로, 인생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 소설가가 할 일인 것 같다. 이야기가 과장이나, 견강부회, 자기 과시가 아니고 이야기가 풍속도 담고 시대를 담는 거. 그런 것을 문학, 소설이라고 하고. 내가 알기론 그렇다.”
「아무도 모르라고」에서 이런 마지막 문장이 나온다. “너희의 미래는 지금 너희가 되기를 열망하는 바로 그것이다.”(p.172) 혹시 지금 모습, 과거에 열망한 바로 그 모습인가.(웃음)
“그때는 뭐가 될지 몰랐다. 그저 잘 놀기를 바랐다. 재미있게 잘 놀기를. 비슷하게 온 것 같다. 지금은 거부가 되는 꿈을.(웃음) 열망하면 되는 것이, 소설이 아닐까.”
이 책에는 웃음, 해학과 함께 감동이 있다. 「감동의 힘」에서는 그 감동이 지닌 힘도 말한다. “감동이라는 무병장수의 명약을 먹고 있다.”(p.204)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과거보다 감동이나 감탄하지 않는다. 무병장수의 명약을 먹지 않는다.
“인터넷 때문인지, 매체별로 개별화돼서 감동을 크게 하는 것도 아니고, 픽 웃거나 잠시 뜨끔할 뿐, 그냥 지나가는 것이 많아졌다. 그런 일이 워낙 많이 노출돼서. 명약을 제대로 복용하려면, 직접 겪어야 한다. 그러면서 가슴이 뛰고 그런 게 좋다. 몸을 움직여서 껴안아도 보고, 눈물도 흘려 보고 이런 게 좋은데 그런 기회가 많지 않다. 간접적으로 살아서 그렇다. 직접 나가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낙타 경주」에서 ‘인간적이다’라는 말이 나오더라. “낙타 경주는 시설이 잘 된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리는 국가대표들의 달리기 경쟁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p.208) 낙타 경주를 직접 보고 느낀 감회인가?
“직접 봤다. 아, 감동이었다. 조금 더 세밀하게 디테일한 묘사를 할 수도 있었는데, 이 작품을 쓸 때만 해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지면이 한정돼 있어서 걸러 내서 썼다. 아마 내가 꽤 큰 감동을 받은 순간 중의 하나일 거다. ‘왜 저런 짓을 하고 있나’ 하고 처음에는 굉장히 웃겼다. 그렇게 막 웃다가, 계속 보니 숙연해지고 뭔지 모를 감동을 느꼈다. 그 정도로, 쓸데없는 짓을 열심히 하고 있는 데서. 그게 나라는 인간인 것 같다.(웃음) (좀 더 긴 소설로 써 볼 생각은 없나?) 그건 그거대로 다 했으니까. 다음에는 개 경주? 하하.”
유명한 냉면 전문점에서 낸 비싼 주차비 영수증도 직접? 그렇다면 아직 잘 갖고 있나?
“직접 겪었다. 영수증은 없어졌다. 잠깐 갖고 있었는데. 억울해서라도. 다른 식으로라도 본전을 뽑아야 되니까. 원고료로라도.(웃음)”
언어 사용도 재미있다. 가령, 「게를 먹는 게 맞는 게 아닌 게요?」. 본능적인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맛깔 나는 이런 언어의 조탁은 어떻게?
“말장난이라고 하잖나. 소설도 말장난 중의 하나이다.(웃음) 언어 자체가 사실 아주 예민한 거다. 그것이 가진 힘이나 영향력도 크고. 한 단어가 다른 단어에 미치는 영향도 아주 예민하다. 말의 힘 가운데 장난이 갖고 있는 힘, 그러니까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드는 힘 같은 게 아주 중요하다.(언어 조탁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그냥 그대로. 문학은 묘비명이 아니니까.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시 중에서도 서정시와 서사시를 쓰는 사람이 다르듯이, 그렇게 쓸 때도 있고, 무거운 추를 얹어서 쓸 수도 있다. 뇌 세포가 그런 식으로 정렬이 된다.”
인간의 땀, 숨, 피, 심장 고동이 녹아든 이야기가 필요해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라는 인간세의 보석에 나는 언제나 홀려 있을 것이다. 소설 쓰는 인간이다, 나는”이라고 선언 혹은 다짐을 했다. 어렸을 때 성경과 햄릿을 100번 넘게 읽고, 무협지를 통해 풍자와 역설을 배웠다는 인터뷰도 봤다. 이야기를 향한 애정이 철철 넘친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존재의 일부였다. 이야기를 녹용이나 산삼 먹듯이 많이 섭취했다.(웃음) 지금도 그러니까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나 싶다. 이야기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도 없고. 이야기가 우리 삶의 질도 높여 주고, 인류 문명의 수준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그런대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혹시 이야기의 신이 있고 재단이 있다면, 이 한 몸을 바칠 준비가 돼 있다.(웃음)”
지금, 엄혹한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어떤 숫자나 전광판이나 엘시디로 환원되지 않는, 인생 그대로의 인생이 아닐까. 살아 있는 순간에 대한 이??들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인생의 결이 들어가고, 인간의 땀, 숨, 피, 심장 고동이 녹아 있는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만 부패가, 악취가, 인간의 향기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최석운 화백의 표지 그림, 참 인간적인 그림이다.(웃음) 생년월일이 같고, 재미난 인연이 있을 것 같은데.
“최 화백이 그리게 된 동기가, 지난번 다른 소설책을 냈을 때다. 그 책에 조그만 표지 그림이 있었는데, 그걸 보더니 욕을 하더라. 수준이 낮아졌다고. 다음에 책을 낼 때 자기 허락을 받으라더라.(웃음) 그래서 이번에 책 낼 때, 그려 봐라. 큰소리쳤으니까. 자기를 똑 닮은 그림을 그려 놓고는, 그게 나라고 주장하더라. 배 나온 건 맞다. 나머지는 아니다. 최 화백이 생각한 인간상을 그렸다.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사고뭉치 같기도 하고, 뭔가 재미있는 걸 온몸에 내장하고 있는 듯한 그림이다. 처음에는 나 아닌데 하다가, 계속 보니 친근해지더라.(웃음)
우리 둘이 친하다는 게 알려져서 최 화백이 내가 쓴 소설의 인물이나 이미지를 가지고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루아침에 될 작업은 아니고 몇 년에 걸쳐서 했다. 전시회가 다음 달 제주 올레 길에서 열릴 예정이다. 독자들 신청을 받아서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할 것이다. 소설가와 화가가 함께 동참하는.”
지난해 독일에서 작품집이 번역 출간됐다. 독일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
“모르겠다. 다음 달에 독일을 갈 예정인데, 한번 물어보려고.”
다음은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각자 가족의 명운을 걸고 싸우는 아버지들의 격투를 다루는. 얼마나 진도가 나간 상태며,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써야 된다. 5월 중순이나 6월에 연재를 시작할 예정이다. 인터넷을 활용해서 연재하게 된다. (인터넷 연재는 처음이지 않나?) 옛날 PC통신이 있던 시절, 하이텔에서 해본 적은 있다. (책으로는 언제쯤?) 대개 연재를 하면 몇 달 있다가 책으로 나오지 않나? 그렇게 보면 책으로는 올해 안에 나올 거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인간적인’ 한마디 건넨다면.
“한창 날이 좋으니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세상 공기를 들이켜면서 바람도 느끼고, 살아 있는 것을 온몸으로 만끽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런 게 가장 좋은 게 아닐까, 인간적이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서 『인간적이다』를 읽고?) 사실, 날 좋고 이럴 때는 책을 안 읽는다. 여행 갈 때, 기차나 비행기를 탈 때 책을 읽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여행 가서, 휴가 가서 읽는 게 제일 좋다. 책이 있으면 읽으니까.”
문득 스쳤다. 성석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이 순간도, 선생님 안에서 어떤 화학적 작용이 일어난다면, 자유 단편이 되겠지? 만약 그리된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나도 한번 이야기를 풀어 볼까. 이야기가 차고 넘치는 시대라고 했지만, 우리는 ‘진짜’ 이야기에 늘 목마른 것 아닐까. 그래서 외롭고 지치고, 소통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선생님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야기가 있다면, 외로울 틈이 없다고. 더구나, 이야기를 통해 감동이라는 무병장수의 명약까지 먹을 수 있는데.
이야기는 늘 삶과 맞닿아 있지만, 우리가 지금 나누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서일지 모른다. 허공에 뜬 가짜 이야기, 짝퉁 이야기. 다시 말하지만, 이야기는 단순 오락이 아니다. 상호 반응이며 길 놓기. 진짜 이야기가 부족하고, 별들 사이에 길을 놓지 못해서. 우리가 이야기에 목마른 까닭.
당신이라는 별, 나라는 별, 그렇게 별별 사이에서 이야기를 놓자. 이야기꾼의 노가리에 우리의 마음과 감각을 열어 놓자. 그러면 우리는 서로 연결된 별로 반짝반짝. 저 별은 당신의 별, 이 별은 나의 별. 나는 당신이라는 별이 궁금해서 가닿고 싶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자.
거참, 별별 이야기, 다 한다.
3개의 댓글
추천 상품
필자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마을
2010.04.18
인터뷰 할 때 말 받아 적는 거..물론 중요하겠죠. 기사 쓰셔야 하니까요.
하지만 인터뷰 내내 노트북 화면만 바라보면서 타닥타닥 소리 내가며 너무 심하게 자주 "네~네~" 하면서 말을 받아적기보다는 인터뷰 대상의 눈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말과 생각을 함께 느끼고 공감하시면서 녹음을 하시고, 그 느낌을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시면 어떨른지.
인터뷰를 보는 내내 타자치는 소리와 습관적으로 하는 것처럼 너무 자주 들리는 "네~네~" 소리가 너무 불편합니다. 작가님의 말씀에 집중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예전에 다른 기자분께 쪽지를 남겨서 위의 의견을 전해드렸지만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습니다. yes24 관계자 여러분, 인터뷰 방식에 대해서 좀 더 심도있게 생각해 주시면 좋겠네요.
l0790
2010.04.13
아자아자
2010.04.12
인간적이다 관심이 가서 목록에 담아놨지요.
외로워서 인간이다/인간이 외로워서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면서도 부대끼려 어울린다는건 더 외로움을 자초하는 것 같아요. 공허함을 확인하는 계기만 되는거죠. 그렇다고 고독과 벗 한다는 것도 엄밀히 궁상같구요. 다만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허락된다면, 자신이 고독을 쥐락펴락 한다면 더이상 외로워서 인간이다 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