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대학(University College of London)의 회랑 어느 곳에 가면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왁스 인형을 볼 수 있다. 왁스 인형의 골격은 벤담 자신의 뼈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는 이를 유머러스하게 ‘자기 도상’(Self-Icon)이라 불렀다고 한다. 보통 ‘도상’이란 실물을 재현하는 기호, 즉 회화나 조각을 가리키나 이 왁스 인형에는 기호와 지시대상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이라고 할까? 흥미로운 것은 왁스 인형이 착용하고 있는 옷, 손에 든 지팡이는 물론, 인형이 앉아 있는 의자까지도 실은 벤담이 살아생전에 애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이 모두는 물론 벤담 자신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자답게 그는 자신의 사체를 의대에 기증하여 과학적 연구의 수단이 되게 했다. 시체 해부에 대해 사회적 반감이 컸던 그때 당시에 벤담은 합법적인 사체 기증 제도의 도입을 역설하며 제 주장을 몸소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벤담은 제 사체가 사용가치를 다하면 그것을 왁스 인형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왁스 인형이 되어 자기가 생전에 참석했던 회의에 계속 참가하기를 원했고, 그 유언에 따라 시체를 참석시킨 그 엽기적 회의가 몇 차례 열리기도 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탈근대 철학ㅡ특히 미셸 푸코의 근대 비판ㅡ과 더불어 오늘날 ‘벤담’이라는 이름은 곧바로 ‘파놉티콘’을 연상시킨다. 단 한 명의 간수가 모든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이 원형감독의 발상은 오늘날 우리의 눈에 벤담의 유해를 골격으로 한 저 자기 도상만큼이나 엽기적으로 느껴진다. 푸코에게 파놉티콘은 어느 괴짜의 엽기적 발명에 불과하지 않다. 그에게 파놉티콘은 이성의 질서 위에 세워진 근대사회 자체의 상징이었다. 벤담 자신도 파놉티콘을 그저 감옥의 원리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앞으로 지어질 다른 시설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파놉티콘의 원리는 감시와 경제성을 연결해야 하는 거의 모든 시설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 이 계획에 따라 지어진 공장은 진정한 산업 건물로서 한 사람이 수많은 작업을 감독하는 편리함을 주고, 개폐가 가능한 다양한 공동주택에는 이 원리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한편 파놉티콘식 병원은 청결함이나 환기, 의약품 관리에서 어떤 소홀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 마지막으로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는 모두 적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감옥에서 “까다로운 주의사항 몇 개만 없애면” 이 구조를 “다른 시설에 연속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사회 전체를 파놉티콘으로 디자인하자는 제안이나 다름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벤담이 예로 제시한 병원, 병영, 학교, 공장이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주요한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 푸코는 아마도 벤담의 이 책에서 근대적 이성 비판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학교, 병원, 병영, 공장 등 근대의 “거의 모든 시설”이 파놉티콘을 모형으로 한 것이라면, 결국 근대사회의 이상은 곧 감옥이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당혹스러운 것은 이것이 당시로서는 꽤 개화된 사람의 생각이라는 점이다. 책의 곳곳에서 벤담은 간수에 의한 죄수의 학대, 비인간적인 대우와 비위생적인 환경, 범죄의 학교로 전락한 교정 시설 등, 아직 전근대에 머물러 있는 감옥 시설의 문제를 지적한다. 파놉티콘은 원래 이 모든 전근대적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이자 대안으로 제시된 휴머니즘의 기획이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꽤 진보적이고 인도적이었던 이 기획이 오늘날 우리 눈에는 끔찍한 호러 비전으로만 보인다. 벤담의 유토피아에서 우리는 그저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를 볼 뿐이다.
언젠가 우연히 구한 18세기 오스트리아의 법령집을 읽으면서 이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낀 적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으로 선포된 이 법령집은 피의자에 대한 고문이 인도주의적 테두리를 넘지 않도록 보장하는 여러 규정들을 담고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가령 죄수의 살을 지지는 촛불 묶음에서 촛대의 수는 일곱 개를 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법령은 당시의 혹독한 고문의 악습을 줄이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문은 인도주의적으로 해야 한다’는 발상은 오늘날 우리에게 당혹감을 준다. ‘휴머니즘적 고문’, 그것은 형용모순이 아닌가?
시선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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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이 구상한 파놉티콘의 구조는 6층으로 된 원형의 수감 시설과 중앙의 감시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시탑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층에서 각각 두 층의 수감 시설을 감시하게 되어 있다. 감시탑에는 밖을 환히 내다볼 수 있는 발이 설치되어 있어, 간수는 모든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는 반면, 수감자들은 간수를 볼 수 없다. 폴 비릴리오의 말대로 ‘시선은 권력이다’. 이 시선의 불평등으로 인해 파놉티콘은 “거대한 권력을 부여받은 단 한 사람의 인간이 있는 새로운 국가의 도구”가 된다. 벤담은 자신을 그 “단 한 사람의 인간”, 즉 파놉티콘의 간수로 자처했다.
죄수들은 자기들끼리 자유로이 소통할 수가 없다. “정신적 오염에서 수감자 각각을 완전하게 떼어놓기 위해” 파놉티콘은 그들을 “완벽히 고립시켜서 반성이나 회개에 몰두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담이 모든 감옥을 독방으로 만들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한 방에 두세 명을 함께 수감하는 시스템이다.) 그뿐인가? 파놉티콘의 죄수들은 동료의 악행을 보고해야 한다. 안 그러면 처벌을 받는다. “이 구상은 동료의 수만큼 감독관이 있는 것과 다름없게 만듦으로써 감시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서로를 감시하고 결국 전체적인 안전에 공헌하게 한다.”
이 정도면 완벽한 감시의 체제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벤담이 감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죄수들만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계획의 여러 주요한 장점 중의 하나는 수감자들뿐만 아니라 하위 감독관, 즉 온갖 하급 관리원들을 수감자들만큼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놉티콘이 그저 감옥만의 원리가 아니라, “까다로운 주의사항 몇 개만 없애면 다른 시설들에 연속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원리라면, 벤담의 유토피아는 “단 한 사람의 인간”, 즉 조지 오웰이 빅 브라더라 부른 권력자의 시선이 전 국민을 내려다보는 완벽한 감시사회인 셈이다.
상상의 감옥
흥미로운 것은 파놉티콘의 효과가 사실이 아니라 상상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죄수들은 감시탑에 설치된 발 때문에 간수를 볼 수 없기에, 설사 간수가 그 자리에 없다고 해도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 죄수들의 시선을 차단했기에 간수는 부재하면서도 언제든지 존재하는 권능을 갖게 된다. “이것은 감각보다는 상상을 자극하며 그 감시 테두리 안에서 항상 어디든지 존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수백 명의 사람을 맡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관은 마치 유령처럼 군림한다. 이 유령은 필요할 때는 곧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유령처럼 군림”하다가 “필요할 때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는 감독관. 이는 “신은 도처에 존재한다”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명제를 연상시킨다. 파놉티콘은 세속화한 신학이다. 그것의 감독관은 건축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부활한 중세의 신이다. 신 앞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태도는 당연히 완전한 복종이다. 감시의 시선에 벗어날 수 없는 “수감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처지에 순응하게 되고, 이 강요된 굴복은 점차 기계적인 복종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파놉티콘은 자신의 최종 목표에 도달한다. 모든 구성원의 기계적 복종.
감옥은 그저 수형 제도로서만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여러 교육방식 중 공포가 가장 뛰어난 본보기가 된다는 것은 분명 기묘하다.” 벤담은 이 기묘함의 효능을 비판 없이 인정한다. 상상의 힘을 통한 통제는 이제 감옥 밖의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파놉티콘의 감시탑은 일요일에는 공공의 예배당이 된다. 예배를 드리러 온 내방객들에게 파놉티콘의 인상은 “그 자체로 보는 이의 상상을 자극해 강력한 본보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표상들로 인해 이 감옥은 범죄에 대한 공포를 각인시키는 하나의 도덕 극장이 된다.” 상상의 공포는 이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원리가 된다.
근대적 주체의 형성
푸코를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파놉티콘의 원리가 근대적 주체 형성의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은 감시자가 부재할 때에도 그가 존재한다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그들은 상상을 통해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된다. 굳이 감시를 하지 않아도 수감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벤담이 생각한 파놉티콘의 이상적 효과가 아닐까? 이는 물론 감옥의 수감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그 효과는 동시에 학교의 학생들, 병영의 병사들, 공장의 노동자들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굳이 감시하지 않아도 감시를 받을 때와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 이를 근대 철학에서는 “자율적 주체”라 불렀다. 가령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칸트의 명법. 한마디로 남이 감시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사회적 규범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라는 얘기다. 어떤 의미에서 벤담의 파놉티콘은 칸트를 비롯한 근대 철학자들이 주창한 자율적 주체의 형성을 위한 사법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벤담의 독특함이 있다. 그 어떤 철학자도 자율적 주체를 양성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 철학에서 말하는 ‘자율’이란 실은 내면화한 타율에 불과하다. 파놉티콘의 감독관, 즉 부재해도 존재하는 감시자를 통해 주체는 외적 감시를 내면화하게 된다. 그때쯤이면 수감자 스스로가 알아서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게 된다. 이렇게 감시의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되는 현상을 흔히 ‘반성’이라 부른다. 자율적 주체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이 ‘반성’의 능력은, 부재하는 감시자를 현존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습관의 산물일 뿐이다. 근대적 주체는 학교, 병영, 공장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파놉티콘의 효과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현대의 파놉티콘
수감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된다는 ‘고통 완화의 원칙’, 수형자에게 사회의 빈민층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줘서는 안 된다는 ‘엄격함의 원칙’, 그리고 수형자의 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공공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경제성의 원칙’. 이 세 원칙으로 인해 파놉티콘은 인도주의적이고 정의로우며, 효율적인 제도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만인이 자신과 타인을 감시하는 디스토피아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 이중성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사체를 기증하는 그 숭고한 뜻이 시체로 만든 왁스 인형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을 바라보는 당혹감을 닮았다.
벤담이 사회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데에 건축적 구조를 이용하려 했다면, 현대사회는 같은 목적에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이용한다. 도처에 널린 CCTV, 신용카드, 휴대전화나 GPS, 인터넷의 로그인 흔적을 통해 오늘날 권력은 개인의 일상을 남김없이 재구성해낼 능력을 획득했다. 얼마 전 검찰이 모 교육감 후보의 7년 치 메일을 압수했다는 소식을 읽었다. 그 메일들을 쓸 당시에 아마도 권력은 부재했을 것이나, “권력은 필요할 때면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다.” 이 소식은 당연히 인터넷 사용자들의 “상상을 자극”하고 “공포를 각인”시켰다.
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 국내에 있을 때에는 진보적 문화운동 단체였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간부로 활동했다.
1998년 4월부터 『인물과 사상』 시리즈에 '극우 멘탈리티 연구'를 연재했다. 귀국한 뒤 그는 지식인의 세계에서나마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과 논쟁의 문화가 싹트기를 기대하며, 그에 대한 비판작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변화된 상황 속에서 좌파의 새로운 실천적 지향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9년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겸직 교수로 재직 하였다.
그를 대중적 논객으로 만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박정희를 미화한 책을 패러디한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은 ‘박정희 숭배’를 열성적으로 유포하고 있는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과 작가 이인화씨, 근거 없는 ‘주사파’ 발언으로 숱한 송사와 말썽을 빚어온 박홍 전 서강대 총장,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한 작품 〈선택〉으로 논란을 낳은 작가 이문열씨 등에 대한 직격탄이다. 탄탄한 논리, 정확한 근거, 조롱과 비아냥, 풍자를 뒤섞은 경쾌하면서도 신랄한 그의 문장은 '진중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prognose
2012.06.28
앙ㅋ
2012.01.12
이향*
2010.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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