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그녀, 보헤미안 노마드
보헤미안 노마드의 이미지를 가장 잘 입고 있는 가수 이상은을 만났다. 올 3월 발표한 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 의아한 인터뷰일 수도 있다. 왜 지금인가? 정답은 없다.
201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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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본인에게도 우리에게도. 인터뷰가 가지는 의미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왜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났는가? 굳이 애써 앨범을 들어달라 강요하지도 않고 자신과의 공감을 급하게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자리 해 음악 이야기와 삶이라는 여행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음악은 꼭 그를 닮아 있다. 무형의 것. 정해진 틀 없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물처럼. 홍대에 위치한 그의 2층 작업실에서 길지 않은 그러나 조금은 어렵고 복잡한 그의 세계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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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라디오, 그것도 아침 방송 고민이 되지 않았을까?
“예전에 했던 방송이랑은 조금 달라요. 예전에는 음악도 마음대로 틀고 하다가 도중하차하게 된 경우도 있어요. 지금은 7개월 동안 가만히 한걸음씩,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선에서 너바나(Nirvana), 라디오헤드(Radio head) 노래도 틀게 됐죠. MBC 라디오가 한걸음씩 움직이는게 대중들의 속도에요. 너무 세게 변화를 주면 오히려 반동이 되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록도 대중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어요. 누군가가 강력하게 얘기하면 저도 반발을 일으키니까요.”
라디오를 진행하게 줄 몰랐다. 이상은 씨와 잘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권철 국장님께서 저를 설득하셨어요. 망설이고 있던 차에 “지금 음악 프로가 다 죽어버렸다. 그래서 음악 시장도 다 죽어버렸다. 하지만 음악 시장이 살려면 음악 프로가 살아야 한다.”는 설득에 공감하게 됐죠. 저는 개인적으로 사명감에 불을 지피면 뭐든지 하는 스타일이잖아요.(웃음)”
“근본적인 것은 프로듀서가 와다 상인가 아니었는가의 차이에요. 13집에서 <공무도하가> 의 감성이 베어난다면, 14집은 <외롭고 웃긴 가게> 랑 느낌이 비슷하죠. 제 몸속에는 어른과 아이의 모습이 공존해요. 어른들하고 작품 했을 때는 13집처럼 앨범이 나오고 애들 같은 것, 풀어헤친 것, 놀고 싶다 하면 14집처럼 나오죠.”
그렇더라도 두 앨범에 담긴 메시지는 모두 자유가 아닌가? 노래 가사처럼 자신의 삶도 자유로운가?
“삶은 매일이 전쟁이죠. 자유라는 게 얻었다고 해도 잃을 때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 소멸되기도 했다가 그렇잖아요.”
앨범 판매량, 다운로드 등과 같이 상업적이면 면에도 신경을 쓰는 편인가?
“전혀 무관심 할 수 없죠. 신경이 쓰이는 마음과 안 쓰는 마음 둘 다 있어요. 프로듀서가 틀을 짚어준 13집은 많이 팔렸어요. 하지만 14집처럼 또래 친구들과 하고 싶은 데로 풀어 헤쳐 놓으면 잘 안 팔리는 게 사실이에요.”
앨범을 발표하고 반응이 느리게 오면 조금 서운하지 않나?
“크게 관여하지는 않아요. 김창완 아저씨도 해 넘기면 사람들이 반응할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하셨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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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은 우리나라 여성 아티스트의 대표고 젊은 여자의 이상을 실현한다. 하지만, 이상은 음악세계에 대해서는 동조하는 숫자가 적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딘가 모르게 우리세대의 예술적인 수용 형태가 거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앨범을 구매 하는 사람들도 적고 대략 추정 되는 우리나라 록 팬은 5만이자만 정말로 록 씬을 움직이는 사람은 2만 명쯤이다. 사실상 지산록페스티벌에 가는 사람이 모두 록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점이 섭섭하지 않는가?
“섭섭하죠.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꾸준히 그 자리에서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볼(유행)이 날아오는 때가 있어요. 2~3년 마다 볼이 사라져요. 예를 들면 오다기리죠의 <메종 드히미코> 같은 영화를 볼 수 있죠. 그 전까지는 가난하던 사람이 영화가 대박이 나서 난리가 난거에요. 빌딩도 막 짓고, 꼭 그런 성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그 볼이 날아왔을 때 이걸 어떻게 세일즈를 할지 모를 때는 볼이 소용이 없겠죠.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뮤지션의 늘 새로운 음악 시도와 세일즈 마케팅, 파트너들이 생기면 그 때 볼이 날아오죠. 지금 예전만큼 볼이 안 날아오는 이유는 고생을 안 하려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매니저도 구하기 힘들어요. 지금은 외국인노동자 매니저를 써야 할 판입니다. ”
앨범의 색이 일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 앨범보다는 항상 나아지고 싶어요. 저는 나름대로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저 포커스를 어디에 두고 나타나느냐의 차이입니다”
“음악이 대중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시간이 빨리 걸릴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어요. 시간이오래 걸리는 이유는 음악이 난해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된 과정에서는 울퉁불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다음단계를 넘어야지 싶죠. 보통 기획사가 있어서 금방 평가가 나야 했어요. 기획사는 이번 앨범으로 수익을 내야 하는데, 그런데 내가 손을 잡은 곳은 다 망했어요. 이것은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에요. 이것은 한꺼번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의 음악은 나중에 더 잘 알려지는 편이에요. ‘비밀의 화원’이 지금 와서 뜬다던가. 그래서 저는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삶은 여행」, 「에코송」 당시에 특별하게 그 음반을 만들게 된 기본적인 테마는?
“이번 14집이 도시가 테마라면, 저번 13집은 오키나와가 테마입니다. 이번에는 뉴욕에 윌리엄스 버그에서 만든 노래에요. 여행을 하며 그 때의 감정을 따라 그려나가요.”
현재 음악 시?에서 음반을 알리기 위해 개인적으로 특별한 방법이 있나 ?
“기획사가 힘드니까 자립을 해야겠다 싶죠. 특히 요즘은 너무 마케팅 위주니까 Mnet에 뮤직비디오라도 틀어야 하나, 하다못해 마트의 선반위에까지 올려놔야 하나 여러가지 생각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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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 13집을 제작할 때 본인의 심정은 어땠나?
“그땐 제가 실연을 당해서 모두 프로듀서와 연주자에게 맡겨놓았어요. 신나면 에너지틱한 게 나오고 저번 앨범 때는 너무 상태가 안 좋았어요. 반면 14집은 정말 즐거웠어요. 뉴욕에 있으니까 아무 눈치도 안 보게 되더라고요.”
일상에서는 음악이 나오기 힘든가?
“저는 한국을 떠나야 곡이 나와요. 자기 일상에서 벗어나야 음악이 나오는 거죠. 일상 안에서 음악이랑 공존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레코딩 할 때가 되면 정리하고 가야되죠.”
팬에게 많이 듣는 이야기는?
“늘 새롭다. 나도 언니처럼 보헤미안(Bohemian), 노마드(Nomad)가 되고 싶다기 보다는 여행을 좀 많이 다녀야 겠다. 내 자신을 건사를 좀 해야겠다. 스스로를 탈피를 좀 해야겠다.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요.”
이상은 음악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나?
“저는 제가 패션디자이너와 가깝다고 생각해요.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와 샤넬(Channel)은 펑크(Punk)의 원조거든요. 공통된 색깔 안에서 시즌마다 새로운 것들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끌고 나가는 것이 명품 브랜드가 지향하는 거잖아요. 그런 음악을 하는 뮤지션을 좋아해요. 데이빗 보위(David Bowie)도 그렇고요.”
「Something in the air」 는 어떻게 썼나?
“뉴욕에 있으면 떠있는 것 같아요. 문화/예술 쪽으로 자유로워 너무 좋죠. 제가 데이빗 보위를 좋아하잖아요. 때마침 뉴욕에서 팬들이 모이는 트리뷰트 파티가 있었어요. 그 곳에 가서 보고 느낀 것을 곡으로 쓴 거예요. 실내에서는 데이빗 보위 카피밴드들이 연주를 하고 남자들은 여장을 하고 말이죠. 일반인들이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처럼하고 다녀요. 거기는 스타가 없어요. 다 자기가 스타니까.”
13집, 14집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노래는?
“개인적으로 「삶은 여행」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요. 「Wild things」를 좋아해요. 저는 사실 펑크였던거예요. 이제 나이도 먹었으니 “펑크를 좋아해요.” 라고 솔직하게 얘기할래요. 물론 제 안에는 「에코송」 같은 면도 있어요. 있기는 한데 만약 기획사가 또 안정이 되고 편안하게 만들 수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음악 만드는데 고생을 하니까 펑크가 나올 수밖에 없죠. 힘드니까 노동요가 나올 수밖에 없죠. 알고 보니 저는 ‘펑크 할머니’였어요. (웃음) 저는 펑크계의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되고싶어요.”
나이가 마흔이 넘었잖아요. 안정 지향적이 된다는 게 아니라 내 몸이나 에너지나 포스를 봤을 때 이제는 결혼도 하고 이런 생각이 아예 없나요?
“나이 먹은 것에 집착 안 해요. 저는 그게 너무 지루해요. 매력이 없어요. 결혼을 안 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그런 틀이 재미가 없는 거죠. 삶에 자극이 있어야 되잖아요. 특히 나이들 수록 그래요. 어릴 때는 너무 모르니까 옆에서 잡아줘야 되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에요.”
가까운 미래 계획은?
“저는 계획을 안세우면 더 활기가 생겨요. 조신하게 있다가 라디오에서 줄리안 카사블랑카스(Julian Fernando Casablancas)를 트는 게 꿈이에요.(웃음)”
상은 씨는 CD 풀 앨범만 낸다. EP나 싱글 앨범을 내 계획은 없나?
“그런 거에 관심 없어요. 뭔가 유행이야 하는 거 별로 재미없는 것 같아요.”
지난 앨범의 러닝 타임이 1시간이 넘는데다. 최근 아이돌 가수의 앨범과 비교했을 때 꽤 긴 시간이다. 요즘 그런 앨범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게 집중력이 없어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이거 나가도 되요?) 집중력을 키웁시다. 긴 걸 못 견디는 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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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음악계가 너무 우울해요. 아티스트로서 우리 음악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지금 상황을 나쁘게 보지는 않아요. 하루에 한걸음씩이지만 조금씩 개선되고 있고 홍대 씬만 보더라도 10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거든요. 쇼핑몰에까지 하나의 문화 코드로써 홍대스타일이 있어요. 여기 있었던 사람들이 부암동으로도 가고 문래동으로 가고 정릉 쪽으로 새로운 둥지를 트는 것들이 잘 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로 인해 다른곳에도 홍대만한 센터가 생긴다고 하면 뿌듯하죠.
다음에는 이런 서울의 모습에 관련된 책을 내려고 해요. 그리고 CJ 아지트의 프로젝트를 도와주고 있는데 인디밴드하는 팀을 만나서 선후배 사이로 얘기도 하고 있어요. 그런것도 하나의 좋은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인디밴드들을 한 단계 올리는 작업이잖아요. 쉽게 말하면 인디밴드도 단계가 있는 거죠.
게임처럼 맨 마지막 스테이까지 있어줘야 한다고요. 나는 잘해서 지산록페스티벌에 서겠다 던가 그런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홍대가 에메랄드 성화 된다? 이런 것도 없으면 성취를 일으킬만한 욕구도 없겠죠.
외국을 보면 아이돌과 다르지만 록쪽에도 강력한 자본이 받치고 있거든요.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라는 영화도 필그림이라는 아이가 뮤직베틀을 해서 위로 올라가는 얘기인데요. 이 스토리처럼 다음 스테이지가 있어야 꿈을 가지고 갈 것 아니에요. 그 스테이지가 코인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 도 있고요.
홍대가 지금 변질되거나 오염되었을 수 있지만 일본과 비교하면 젊은 여자처럼 보여요. 좋게 말하면 조금 어리지만 생기발랄하고 여기는 세포분열이 막 일어나고 있으니까 한창 혼날 때 고3정도 될까요? 그렇지만 자라고 있고 생명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걸 희망적으로 받아들이고 언제가 성숙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트리뷰트하고 싶은 사람은?
“오노 요코(Ono Yoko)에요. 저한테는 최고죠! 얼마 전 서울의 큰 화랑에서 전시회가 있었죠. 그 때 인터뷰를 했었어요. 존 레논(John Lennon)과 오노 요코가 최초였던 것 같아요. 모든 선동의 시작, 음악을 사회운동화 시킨다던가, 음악과 사회의 연결 고리를 만들게 된 최초의 사람이죠!”
우리나라 음악가 중에는 없나?
“사운드 면만 봐서는 내가 지향하는 소리자체로 끌리는 것은 산울림이고요.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중현 아저씨에요. 라이프스타일은 한대수 아저씨가 좋고 요즘에는 산에 형(강산에)도 좋아요. 저번에 시장을 갔는데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 나오는 거예요. 아줌마들 사이에서 파를 고르는데 뭔가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았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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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도 많이 하고 싶지만 음악을 넘어선 사람이잖아요? 앞으로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게 필요할까요?
“교육! 학교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관점이 바뀐 것은 외국에서 교육을 받게 되면서부터였죠. 물론 학비가 없어서 끝까지는 못했지만 외국은 전혀 다르게 교육을 시키니까요. 우리나라는 핑크플로이드의(Pink Floyd) 「Another Brick In The Wall」처럼 아이들을 통조림으로 만드니까요. 모두가 다 균질화 된 시험도 문제요. 특히 예술 쪽 공부가 외국과 너무 달라요. 외국에서는 뭔가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틀을 벗어나야 된다는 걸 교육을 시켜요. 파괴가 있어야 창조가 생긴다는 그런 상식적인 얘기가 한국에는 없는 거죠. 남의 것을 잘 베껴서 성공해야 한다고만 교육시키는 것 같아요.”
가장 보람된 순간은? 이게 바로 내가 꿈꾸던 거다 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공무도하가>가 명반에 뽑혔을 때 매우 행복했어요. 일본에서 열심히 밑바닥부터 얼터너티브 뉴 뮤직 신( Alternative new music scene)에 들어가 3~4년 활동을 하고 결국 버진 재팬이(Virgin Japan)랑 계약을 하게 됐어요. 완전 무명이었다가 런던에서 펫샵보이즈(Pet Shop Boys) 프로듀서랑 같이 일하고 같은 스튜디오에서 버브(The Verve)가 녹화하고 했을 때 행복함을 느꼈죠.”
한국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홍대 주변에 ‘무경계’라는 대단한 곳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도 이야기도 문화 전반을 주제로 삼아 즐기던 때가 가장 즐거웠어요.”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에는 A타입, B타입, C타입이 있잖아요 구분 짓기를 좋아하잖아요. 그렇지만 “인간은 정신이야” 하면서 어른들을 해방시키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저는 그녀가 자유로워서 너무 좋아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규정지어 놓고 살지 않고, 나이 들어서도 끝까지 펑크로가는 거 그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생각이 스트레이트한 것이 멋있죠.”
이상은에게 늘 붙는 꼬리표 「담다디」가 있다.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회자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분이 무척 나빴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지금은 뭐라고 하든 말든 상관안하는 경지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내공이더라고요. 그런 날이 오겠지요.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문화 예술 전반에 대해 오픈되어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이상은 씨다. 같은 세대 1970년대 여성과의 삶을 스스로 비교해 본다면?
“제가 살아있다는 느낌,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3040세대 중에 학교 때는 개방적이다가 지금은 보수화된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1970,1980년대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되는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밥 딜런(Bob Dylan)을 좋아하고 우드스탁(Wood stock)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취직을 하고 사회로 가고, 그리고 남는 사람들은 남는 거고요. 그 남는 사람들이 잘해야 되는 거죠.”
이상은에게 프로듀서는 어떤 의미인가?
“프로듀서란 ‘아버지’와 같은 존재죠. 뮤지션도 알고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프로듀서라고 생각해요. 앨범을 만들기까지의 모든 계획을 다 가지고 있어요. 이런 면에서 단순히 주어진 프로젝트에만 몰두하는 영화 디렉터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마치 주치의처럼 앨범과 활동의 다음 단계를 넘기 위한 조언자 같은 역할을 하니까요. 프로듀서는 아티스트와 모든 세세한 것을 다 챙겨요. 여러 프로듀서들과 일을 하다보면 저도 프로듀서 능력이 생기죠. 여러 사람에게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으니까요.”
인터뷰: 임진모, 김반야, 옥은실
사진: 김현이
정리: 옥은실
글 / 옥은실(lamet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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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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