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대학시절, 학교 안팎에 큰 사건이 있을 때 간혹 학생회관 등에서 열리는 철야농성에 참여했다. 수업이나 시험거부 투쟁, 87년 6월항쟁, 학내에서의 분신…. 돌이켜 세어보니 족히 10회는 넘을 듯싶다. 그래봤자 중고등학생 때 참여한 ‘철야기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내가 다니던 교회의 중ㆍ고등부 학생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다같이 밤을 새우며 합동기도회를 했다. ‘토요일 밤 토요일 밤에’ 교회 교육관에서 불을 끈 채로 목이 쉬도록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혼자 하거나, 둘씩 짝을 짓거나, 네다섯씩 그룹을 짓거나, 30여명 전원이 함께 손을 부여잡고 기도했다. 묵상기도를 하다가, 낮게 깔리는 중저음으로 중얼거리다가, 하이톤의 통성기도를 하다가, 때로는 방언의 은사를 받겠노라며 미친 듯이 울부짖기도 있다.(남들이 보면 정말 미친 줄 알았을 거다^^)
저녁 8시쯤 시작한 기도회는 그 다음날 4시의 새벽기도회 참여와 함께 끝났다. 그렇다면 그 많은 시간, 기도의 주제는 무엇이었던가. 내 공부를 위해, 가족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 친구들과의 우정을 위해, 교회의 부흥을 위해, 그 시점에 걱정되는 특정 이슈나 인물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고도 주제가 떨어지면? 국가와 사회를 위해 기도했다. “자비로우신 주님, 불철주야로 나라를 돌보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위해 기도합니다.” 중등부에 들어가 철야기도회를 시작한 지 1년도 안 돼 내용이 바뀌었지만. “고인이 되신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 간절히 바라옵기는….”
그동안 이 칼럼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비판의 칼을 살짝 들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 수많은 시간을 들여 그 분의 건강과 지혜를 위해 목놓아 기도했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다. 전문용어로 하자면,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못하여 대통령은 비극적 죽음을 당했다.
1979년 10월27일 아침의 조회시간을 떠올려본다.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서거하셨다”고 짤막하게 입을 연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교실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지.” 뒤숭숭한 불안감으로 팔뚝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며 아버지의 스크랩 제11권(1977~1978년)과 제12권(1979년)을 편다.
강신명 목사 영결식 기도 |
스크랩 제12권 표지를 열자마자 등장하는 글이다. 1979년 11월3일 아침10시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기독교 대표로 강신명 목사가 읽은 기도문이다. 일간신문에 실리진 않았다. 아버지가 구독하던 기독교계 신문의 하나로 추정된다.
강신명 목사는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 학교의 총장이었다. 1학년 여름방학 중에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 날 교문 앞에 도열하여 영구차를 보내던 기억이 새롭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쪽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그는 ‘조찬기도회’로 학생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앞에서 나는 ‘철야농성’보다 ‘철야기도’를 훨씬 많이 했다고 밝혔다. 생전에 강신명 목사는 내가 참여한 ‘철야기도회’보다 훨씬 많은 횟수의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뛰었다.
이번 회의 주제는, 대통령을 위한 기도들이 왜 먹히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중딩 시절의 내 철야기도가 있는가 하면, 조찬기도회 자리에서 강신명 목사가 한 ‘국가지도자를 위한’ 기도도 있다. 신은 기도를 져버리고, 죽ㆍ여ㆍ버ㆍ렸ㆍ다. ‘박정희의 레임덕’이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후반의 기사를 읽으며, 왜 신이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풀어본다.
최덕신씨 美망명 【동경 외신연합】5ㆍ16혁명직후 외무장관을 지낸 최덕신씨(63)가 18일 해외에서의 반정부활동에 가담하기위해 미국으로 망명하겠다고 밝혔다. 최씨는 이날 동경에 있는 반한단체 한민통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히고 지난해 미국에 망명 요청을 한뒤 최근 영주권을 얻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전직각료가 해외로 망명한 경우로는 처음인 최씨는 예비역 육군중장이며 정전회담대표 주서독, 월남대사 천도교교령 통일원 고문을 지냈다. 서울에는 최씨의 82세 노모와 장남이 살고 있으며 그의 부인은 서독에 거주하고 있는 차남을 방문하기 위해 앞서 서울을 떠났는데 최씨는 이날 밤8시 미국으로 출발했다. 최씨는 지난 76년 한국을 떠나 미국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으며 자신은 소위 ‘민주민족통일해외한인연합회’의 회원이라고 밝혔다. 최씨는 지난10일 일본에 도착했는데 주한미군철수와 미국의 대한원조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국ㆍ민족을 배반” 주일대사관성명 【동경합동】주일한국대사관의 유지호수석공보관은 18일 오후 전 천도교교령 최덕신씨가 기자회견에서 미국망명을 발표한데 대해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인격파탄자의 언동에 아무도 현혹되지 않을것”이라고 담화를 발표했다. 유 수석공보관은 최씨가 천도교내 재산싸움에 패한 후 미국에 도망갔다가 다시 일본에 와 망명을 선언한 것은 민족을 우롱하는 매국적 행위라고 반박했다. 최씨는 18일 오후 8시30분 ‘캐나디언 패시픽’ (CP) 항공편으로 동경을 출발, 미국으로 떠났다. (1977년11월19일치 <동아일보>) | ||
기사에서 정부 관계자는 최씨의 망명이 “민족을 우롱하는 매국적 행위”라고 했다. 과장스런 언사다. ‘박정희를 우롱’했다면 모를까. 박정희로서는, 자기 휘하의 사람들에게 자꾸만 ‘우롱’당한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신경질이 늘어가던 시점이었다. 최덕신은 전직 각료로서는 최초의 망명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사단장으로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고 군사정전회담 때는 한국군 대표였다. 60년대 이후엔 외무부 장관과 서독대사를 지냈다. 박정희와 멀지 않은 관계였지만, 색안경을 쓰고 보자면 한참 위험한 인물이었다.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1892~1963)와 김일성이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어린 시절 ‘화성의숙’이라는 군정학교를 다닐 때 최동오는 그곳의 교장선생이었다. 한국전쟁 때 김일성은 ‘모시기 공작’의 일환으로 최동오를 북으로 데려갔고, 196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관급 대우를 해줬다.
최덕신은 1967년 제7대 천도교령에 취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실권을 잃은 데다 박정희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보고 미국 망명을 택한다. 위 기사에서처럼, 떠나기 전 도쿄에서 박정희를 비난하는 기자회견까지 한다. 1년 뒤부터 평양에 드나들던 최덕신은 1986년 김일성의 제안을 받고 북한에 영주 귀국한다.
박정희는 이미 김형욱의 미국 망명 후 행각 때문에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최덕신 망명으로부터 5개월 전의 기사를 보자.
“박동선은 공작원…내가 조종” 재미 김형욱씨 미 회견서 주장 【뉴우요오크 합동】‘뉴우요오크 타임즈’는 지난 5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동선은 중앙정보부 공작원이었으며 그가 직접 박을 지휘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한데 뒤이어 ‘워싱턴 포우스트’는 6일 김형욱씨가 75년10월부터 미연방수사당국에 박동선사건에 관해 첩보를 제공해왔다고 소식통을 인용 보도했다. NYTㆍWP지 회견내용 서로 달라 남북대화엔 북괴주장 지지 발언도 김씨는 ‘뉴우요오크 타임즈’의 ‘리처드 헬로란’기자와의 회견에서 박동선은 한때 한국중앙정보부의 공작원이었으며 문선명 역시 중앙정보부를 위하여 이따금 일했으나 중앙정보부는 그를 신임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 회견에서 “박동선은 내가 정보부장으로 있을 때에 나의 공작원으로 일했다”고 말하고 “내가 당시에 그를 조종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남북대화에 언급, “박대통령이 72년부터 북한과 대화를 함에 있어서 북한을 기만했다”고 주장하면서 남북평화조약의 체결과 관련,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해괴한 발언을 일삼았다. 이밖에도 ‘뉴우요오크 타임즈’는 김씨의 말을 인용, 박동선 사건과 관련, 정보부요원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는 보도를 되풀이했다. ▲김한조= 박동선이 75년 정보부의 눈밖에 나자 새로이 선임한 요원으로 활동을 했으며 한국정부로부터 60만달러를 받았다. ▲박보희= 중앙정보부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한국자유문화재단을 통하여 활약했으며 문선명을 유명하게 만든 인물임. ▲한병기= 최근까지 ‘유우엔’ 대표부부대사로 있으면서 대미공작방향을 정하고 미국내 공관에 파견된 정보부요원들을 지휘, 재미한국인반정부활동을 억압. ▲‘수지 박 톰슨’= 이준 ‘알렉산더 김’ ‘차알스 김’ 등도 비중은 적으나 모두 정보부요원으로 활동함. (하략) (1977년 6월 8일치 <동아일보>) | ||
김형욱은 최덕신보다 4년 전인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대만 중화학술원에서 초청한 명예 박사학위 수여식 참석을 구실로 대만을 갔다가 일본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티켓을 바꿔 미국으로 내뺐다. 1969년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났던 그는 1971년 5월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지만 유신 직후인 1973년 3월엔 ‘유정회’(유신정우회) 명단에서 빠져 야인이 되었다. 박정희에게 ‘팽’을 당했다고 여긴데다, 천하를 호령하던 수경사령관 윤필용 등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하루아침에 군법회의에 넘겨지는 것을 보며 자신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법 하다.
뉴욕에서 3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77년부터 활발하게 움직인다. 위 기사에서처럼 <뉴욕타임스> 리처드 헬로란 기자와 만나, 한국에서는 기밀 취급당할 이야기를 거침없이 폭로한다. 양궁으로 치면, 박정희의 가슴에 10점 화살을 쏜 사건이다. 더 큰 문제는 연달아 쏠 화살이 많이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김형욱의 옆엔 또 한 명의 망명자 김상근이 있었다. 미주지역 중앙정보부 책임자로 미국 언론에 의해 ‘동양의 제임스본드’라 불리기도 했는데, 1976년 11월 김형욱의 도움으로 망명에 성공했다. 그는 망명 직전 ‘백설작전’이라 불리던 비밀공작의 주역이었다. ‘백설작전’은 ‘불국사 주지’(공작명) 박정희를 최고사령탑으로 하고,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를 참모장으로 하여 재미공사 양두원-재미교포 김한조의 특수 루트로 연결되는 대미 공작이었다. 미국 내 한국에 대한 여론을 유리하도록 조작하기 위해 유력 정치인과 언론인, 학자들을 포섭하는 작전이었다. 김상근은 박동선으로부터 자금을 받아 김한조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한조의 자금 착복 등 여러 문제가 생겼다. 중앙정보부 내 파워게임에서도 밀렸던 그는 본국 소환령을 받고 신변의 위기를 직감하자, 감시자들을 따돌리고 김형욱이 거처하던 뉴욕에 찾아와 상의를 한다.
“부장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김상근에 따르면, 망명하는 편이 한국에 돌아가 맞아죽는 것보다 나았다. 이 점은 김형욱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한국 같았으면 맞아죽을 행동과 발언을 미국에서 서슴없이 해나간다. 1977년 6월부터 10월까지 열린 프레이저 위원회 청문회는 그 무대였다. 두 사람에겐 박동선과 김한조가 미국에서 벌인 뇌물로비에 관한 정보가 지나치게 풍부했다. 그들은 청문회에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로인해 한-미관계는 최악의 위기로 치달았다. ‘미운 놈’ 김형욱은 결국 1979년 10월 파리에서 실종된다.
실종! 김형욱의 실종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면, 영화배우 최은희의 실종에선 공작의 냄새가 난다. 1978년 1월14일, 홍콩에서의 일이다. 6개월 뒤인 7월19일엔 신상옥이 같은 장소에서 실종된다.
검찰, 최은희씨 납북결론 검찰은 20일 영화계의 최은희씨 실종사건과 관련, 반공법위반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규화피고인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실종된 최씨는 북괴의 납북지령을 받은 홍콩교포 이상희 여인에 의해 납치됐다고 밝혔다. 지난 1월14일 홍콩에서 실종된 최씨는 그동안 현지경찰의 수사결과에 따라 북괴로 납치됐으리라는 심증이 굳혀져있었는데 이날 검찰이 김피고인에 대한 논고를 통해 최씨의 실종이 북괴의 납북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힌것이다. (1978년9월21일치 <한국일보>) | ||
여전히 미스테리다. 신상옥의 경우엔 스스로 북한행을 택했을 개연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최은희를 구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 초기 신상옥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과 혜택을 받으며 영화사의 규모를 키우지만, 70년대로 가면서 관계가 악화된다. 특히 1972년 유신선포 이후의 강화된 검열체제 아래서 영화사 ‘신필름’은 쪼그라들고 심지어는 등록취소까지 당한다. 신상옥의 친구이자 <죽음의 다섯손가락>등 홍콩영화 감독으로 유명했던 정창화는 2011년 8월 <한국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종 직전 홍콩에서 만나 주고받은 대화내용이다.
(앞 생략) 귀국을 권유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사과해. 그리고 기회를 한 번 달라고 애원해봐. 몇 달 고생하면 기회가 올 것 아냐? 군사정권 실권자에게 맞서봐야 자네가 상처를 받지. 승산 없는 싸움은 안 해야지 자네와 신필름을 키워준 사람들이잖아. 안양촬영소까지 줘가면서 말이야. 그들은 자네보고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
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신상옥은 ‘망명’을 했는지도 모른다.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적 재능을 자유롭게 펼칠만한 마당이 필요했을 뿐이다. 남이냐, 북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건이 더 좋고 자신에게 호의적인 상사가 있는 직장으로 가는 회사원의 선택과 다를 바 없다. 그는 김정일의 파격적인 지원 아래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다가, 1986년 다시 탈북을 한다.
김형욱, 김상근, 최덕신, 그리고 신상옥…. 박정희 자신도 ‘망명’하고 싶었을 것만 같다.
이란왕정 종식 팔레비왕, 미에 망명 데모1년만에 38년 집권굴복 왕비와 함께 埃(이집트)로 출국 【테헤란16일 외신=연합】지난 38년간 중동회교국 이란을 통치해온 전제군주 모하마드ㆍ레자ㆍ팔레비국왕(59)이 78년1월부터 시작된 이란국민의 1년여의 반국왕데모에 굴복, 16일 하오 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영구망명길에 오름으로써 사실상 왕권의 막을 내렸다. 출국에 앞서 예정된 기자회견은 취소됐으며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흐느끼는 측근들에 “짐은 쉬러갈뿐이다” 출국회견도 취소…거리엔 환호의 군중들 팔레비왕은 이날 하오5시45분(한국시간) 파라왕비와 함께 특별기편으로 이집트의 애스원시로 떠났으며, 안와르ㆍ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회담한 후 17일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팔레비의 부재중 왕권은 9인섭정회의가 대행한다. 이날 팔레비왕이 메하바드 공항으로 떠나기 위해 헬리콥터에 오르며 작별인사르 건네자 측근 신하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비탄에 잠긴 신하들에게 “걱정하지 말라. 짐(朕)은 잠시 쉬러 갈 뿐이다”고 말했다. 팔레비왕은 이어 언제 돌아올 것이냐고 묻는 한 이란기자의 질문에 “모른다. 그것은 짐의 건강상태에 달렸다”고 답했다. 왕은 이어 “짐은 몹시 지쳤다. 오늘에야 떠나게 된 것은 떠나기 전에 바크티아르 수상이 안정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왕은 “지금 이 순간 이란에 필요한 것은 모든 국민이 합심해서 경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파라왕비는 “이란 주권의 독립과 국토의 통일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흐느껴울었다. 한편 팔레비왕의 출국소식이 전해지자 테헤란 거리의 자동차 운전사들은 일제히 클랙션을 울리면서 환호성을 질렀고 군중들은 거리에서 춤추고 노래불렀으며 일부 군인들도 이 축제행렬에 끼어들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1979년1월17일치 <한국일보>) | ||
“짐(朕)은 잠시 쉬러 갈 뿐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짐’이란 왕이 자신을 가리킬 때 쓰는 1인칭 대명사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41년 권좌에 올라, 중간에 잠깐 외국망명을 한 3년(1951~54년)을 포함해 38년간 집권했던 팔레비 국왕이었다. 자신을 ‘짐’이라 스스럼없이 표현했으나, 그는 이란 인민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였다. 결국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가들에 의해 이집트로 쫓겨났다. 박정희는 팔레비를 동정의 눈길로 보면서도 일말의 부러움이 없지 않았으리라 본다.
카터는 인권외교를 표방하며 ‘미군 철수’등으로 박정희를 압박했지만, 이란의 팔레비에게는 다른 태도를 취했다. 미국은 팔레비 휘하 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하고 군사협정을 맺으며 황제권을 되찾아주기까지 한 역사가 있다. 이집트로 떠난 팔레비가 여러 나라를 전전하자 미국으로 초청까지 했다. 만약 상대가 박정희였다 해도 흔쾌히 그랬을까?
박정희 정권시절부터 40년간 망명객(이 분도 망명객!)으로 지내온 문필가 정경모 선생은 팔레비의 망명을 박정희의 죽음과 연결시켜 해석한다. 팔레비는 미국을 등에 업고 중앙정보국 사바크(SAVAC)를 동원해 폭력을 행사했다. 팔레비가 망명길에 오른 지 한 달만인 1979년 2월16일, 격렬하게 타오른 호메이니 혁명의 불길 속에서 나시리 장군 등 사바크의 실권자 4명이 전격 처형당한다. 한국의 ‘사바크’인 중앙정보부의 수장인 김재규가 이 사진을 봤다면 공포와 충격을 느꼈을 만하다. 자신이 모시는 독재자 때문에 사바크의 나시리처럼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란 혁명과 뒤이은 처절한 보복이 김재규의 ‘거사’에 동기를 제공했다는 시각이다.
측근과 각료, 예술인들의 잇따른 망명 속에서 ‘멘붕’를 일으킬 만도 한데, 박정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서운 파국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심야의 기습 울부짖은 여공들 천여 경관 몰린 신민당사 안팎 집단투신 대비 당사 밑엔 매트리스 10여분새 모두 끌어내 여공 한명 손목 동맥 끊어 사망 의원ㆍ기자에도 마구잡이 폭행 11일 새벽2시경 YH무역 여공들이 농성중인 서울마포구 도화동 신민당사에서 서울시경산하 1천여명의 정사복 경찰관들이 들어가 4층 강당에서 지난 9일 오전9시반부터 40여시간동안 계속 농성을 벌여온 여공 1백72명과 여공의 연행을 제지하려던 신민당원 26명을 끌어내 미리 대기시켜놓은 경찰버스에 싣고 서울시내 7개 경찰서에 연행, 수용했다. 경찰은 이날 ‘101호 작전’이라고 명명된 강제해산작전을 실시, 여공들을 연행했는데 여공중 김경숙양(21)이 왼쪽 팔목의 동맥절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신민당 박권흠 대변인 백(白)영기업무부국장 등 신민당원과 취재중이던 기자 여공 및 경찰관 등 많은 사람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찰은 10일밤10시40분경 여공들이 ‘집단결사총회’를 열고 경찰이 당사에 들어올 경우모두 4층 강당에서 뛰어내려 집단자살하겠다는 결의를 한 후 농성중이던 4층 강당 창틀에 매달려 소란을 피우는 것을 김영삼 신민당총재등 국회의원들이 진정시키고 총재실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중 11일 새벽1시58분경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의 강제해산통고 전화와 때를 같이 해 전격적으로 당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찰은 작전개시와 동시 당사건물 주변에 매트리스 등을 들고 여공들의 투신에 대비하는한편 정문출입구를 통해 밀고들어왔고 당사 뒤쪽에서 고가사다리차 2대를 이용, 담을 넘어들어와 4층강당과 2층...(하략) (1979년8월11일치 <동아일보>) 경찰진입 소문듣고 여공들 ‘결사총회’ 경찰의 당사진입에 앞서 10일 밤 10시 40분께 농성중인 여성근로자들은 경찰이 당사에 난입 자기들을 연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흥분하기 시작 ‘긴급결사총회’를 열고 경찰이 강제해산을 시키려고 할 때는 모두 “투신자살하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정부는 장용호 회장을 즉각 소환할 것 ▲조흥은행은 YH무역을 은행관리 기업으로 인수할 것등을 요구했었다. 농성여성근로자들은 결사총회후 ‘투신자살조’와 ‘할복자살조’로 나위어 사이다병을 들고 비명을 지르며 4층 창살에 매달려 “정부는 우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울부짖다가 4~5명이 실신, 인근 녹십자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이때 2층 총재실에 앉아있던 김총재는 신민당의원들과 함께 4층으로 뛰어올라가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한다. 나와 30여명의 신민당의원들이 여러분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말라”며 이들을 설득했고 밤 11시30분께 여성근로자들은 강당 바닥에 누워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여성근로자들이 진정되자 김총재는 “당사밖에 몰린 경찰을 보고 여성근로자들이 흥분하니 모두 몰라내라”고 지시한 후 당사 밖으로 나와 당사 주변을 서성거리던 마포서 보안과장 김준기 경정의 따귀를 때렸고 사복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청년당원들이 달려들어 김경정의 옷이 찢어지기도 했다. 4층에서 농성하고 있던 김경숙 양은 11일 새벽2시30분께 높이 15m의 창문 아래로 떨어지면서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의 철제쓰레기통에 부딪친 듯 허리를 몹시 다치고 머리 정수리부분에 3cm의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발견됐다. 경찰은 김양의 손목에 깊이 1cm, 길이 3cm의 예리한 칼로 벤 자국을 발견, 경찰의 진입 전후 자해를 가한 후 창문을 통해 뛰어내려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양은 인근 녹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숨졌다. 한편 김양의 시체는 이날 상오6시께 서대문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시체부검후 어디론가 옮겨졌다. (1979년8월12일치 <동아일보>) | ||
3부작이라 칭하겠다. ‘YH농성 진압’은 ‘김영삼 제명’과 ‘부마사태’로 완결되는 박정희 자폭 3부작의 제1편이었다.
YH무역은 미국에 가발을 수출하는 업체였다. 1966년 설립되어 한때는 종업원이 4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여공들의 요구는 소박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주 장용호가 물건만 가져가고 대금을 결제하지 않았다. 임금체불이 계속됐다. 폐업 통보까지 받았다. 사기성이 역력했다. 여공들에겐 약값과 학비를 부쳐야 할 고향의 부모와 동생들이 있었다. 밀린 임금을 받아야 했다. 살아야 했다.
YH노조에 문제가 있다면, 70년대에 드물게도 어용노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녀들은 정치권에 해결을 호소하기 위해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했다. 기사를 읽어보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호소할 만한 존재’였다. 기사에서 보듯 ‘당사 밖으로 나와 당사 주변을 서성거리던 마포서 보안과장 김준기 경정의 따귀’를 때린다. 이때가 ‘정치인 김영삼’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박정희는 YH여공들을 박살냈고, 여공들을 보호하려던 김영삼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제2편 김영삼 제거!
김영삼총재 의원직 제명 신민의원 단상점거 농성속 경호권 발동, 법사위선 40초만에 처리 국회는 4일 하오 4시20분 본회의에서 공화ㆍ유정 등 여당의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제명했다. 이날 김총재의 제명은 백두진국회의장의 경호권 발동으로 본회의장을 옮겨 1백46호실에서 여당측 의원만이 참석한 가운데 재석 1백59명 전원의 찬성으로 결정되었다. 헌정30년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 특히 야당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한 이날 투표에는 와병중인 김성환 의원(유정) 한 명만을 제외한 여당의원 전원이 참석, 단 15분만에 처리되었다. “반민주적 정치폐풍 추방” 공화ㆍ유정서 성명 오유방 공화당 대변인과 정재호 유정회 대변인은 4일하오 국회본회의에서 김영삼 신민당총재의 제명처리안이 전격 처리된 뒤 성명을 발표, “김의원을 제명한 것은 무책임한 선동으로 폭력혁명노선을 치닫는 반민주적인 정치폐풍을 추방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여당대변인들은 “국가기본질서의 원인무효를 주장함으로써 무정부상황을 조성하려고 책동한 반의회정치인을 엄격히 다스리는데 있을 뿐 야당의 반대기능을 위협하거나 해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강조하고 “다시는 이 땅에 반민족적인 분론분열을 빚는 무분별한 정치작태가 재연되지 말아야 할것”이라고 말했다. 이 성명은 또 “우리는 신민당 의원들이 의장석과 단상을 점거, 정상적인 의사진행을 폭력으로 방해한 원색적인 정치폭거를 개탄하며 국회법에 따른 경호법 발동을 강요한 야당의 반이성적 행위를 국민 앞에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오열ㆍ통곡으론 울분 못풀어 신민당대변인 성명 신민당 정재원 임시대변인은 4일 하오 성명을 통해 “오열과 통곡으로도 분노를 풀길 없는 오늘의 폭거를 당하여 우리는 침통한 심정으로 이땅에서 꺼져버린 민주주의에 장송곡을 울릴뿐”이라고 말하고 “여당이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여야 할 국회에서 사상초유의 변칙을 자행하고 불법을 저질러 그들 스스로 법질서를 파괴 유린하여 민주주의와 의회주의 원칙을 자폭시키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정임시대변인은 또 “비록 김총재가 제명됨으로써 의석은 빌망정 그의 의회주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아 오늘 그를 추방한 죄인들을 의회주의의 이름으로 징계할 날이 올 것을 믿는다”고 말하고 “여당이 김총재를 정정당당하고 떳떳하게 징계할수도 없었던 여당의 죄악을 국민은 알고있다”고 말했다. (1979년 10월5일치 <한국일보>) | ||
보복이었다. 김영삼은 1979년 9월10일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하야’를 요구하고, 9월15일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카터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이를 문제 삼은 민주공화당과 유정회는 10월4일 국회에 징계동의안을 제출한다. 10여분 만에 변칙 통과. 그리고 두 주일 뒤 부산과 마산이 들썩거린다. 제3편 부마사태!
학생 등 3천여 연이틀 난동 21개 파출소 파괴 또는 방화 부산에 비상계엄령 박대통령 특별담화 사회혼란 조성 개탄 박정희 대통령은 18일 부산직할시 일원 비상계엄선포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발표, “이번 비상계엄은 오로지 악랄한 선동과 폭력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국리민복을 해치며 헌정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분자들의 일체의 경거망동과 불법행위를 발본색원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대통령은 이날 상오 임방현 청와대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이 담화에서 이같이 밝히고 “따라서 정부는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의 사회활동과 공사생활에는 추호의 불편이나 위축을 주지 않도록 할 것이며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여 국력배양에 계속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학생소요로 어제 자정기해 언론검열ㆍ통금 밤 10시부터 심야 임시각의서 결정 각 대학 당분간 휴업령 계엄사령관에 박찬극 중장 (<1979년10월19일치 <한국일보>) 마산에 위수령 데모대 주위 군중 의법죄 조병직 사령관 담화문 발표 구경하다 체포되지 말도록 【마산】경남 마산지역 위수작전사령관 조병직 육군소장은 김성주 경남지사의 요청에 따라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지구(창원출장소 포함)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한다고 발표했다. 조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아 취해진 위수령 발동에 즈음한 담화를 발표 “우리 군은 마산시 일원의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들의 난동, 소요사태로 치안유지가 곤란하여 병력출동을 요청받고, 마산시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치안유지에 적극 노력하겠다”고 밝히고 “우리군은 데모대 주위의 모든 군중을 시위군중으로 판단하고 전원 의법조치하겠다”고 경고 “시민들은 시위군중에 끌려 시위를 구경함으로써 주동자 체포나 질서확립에 지장을 초래케 하고 데모군중으로 체포돼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유의해달라”고 당부했다. “학생등이 방화ㆍ파괴로 소요 사제총ㆍ화염병써 폭동비슷 마산서장 발표 이틀계속…불순세력 개입징후” 【마산】최창림 마산경찰서장은 20일 하오5시 마산소요사건의 개요와 특징을 발표했다. 발표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18일과 19일 이틀동안 마산에서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가 합세해서 소요를 일으켜 공공건물을 방화ㆍ파괴하고 공용장비를 파괴했으며 상가점포를 파괴하는 등 난동을 일으켰다. 소요의 특징은 단순한 시위가 아닌 폭동에 가까운 것으로 방화ㆍ파괴등 행위를 자행하면서 화염병ㆍ각목등을 사용하고 사제총기까지 사용했다. 18일 하오10시 마산시 창동황금당 골목 소요현장에서 불순분자가 사제총기를 발사하고 도주하는 것을 부근에서 목격한 시민이 이를 추격하자 총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이 사제총기는 길이 15.7cm, 구경 1.15cm의 크기로 스프링식으로 탄환을 한발씩 발사할 수 있고 인명살상용으로 사용가능하며 한손에 쥐고 50m 이내의 목표물을 쏠 수 있게 되어있으며 탄환을 바꾸어... 이 사제총기의 사용목적은 소요군중속에 섞여 소요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을 등뒤에서 사격, 살상케 하여 군중을 흥분시켜 사태를 악화시키고 발포책임을 당국에 전가하려는 데 있는 것이었다. 이번소요배후에 조직적 불순세력이 개입한 징후가 농후하므로 시민들은 이에 부화뇌동하여 경거망동을 삼가고 질서유지에 적극협조해주기를 바란다.” (1979년10월21일치 <한국일보>) | ||
10월16일 부산엔 5만여 명이 모였다. 10월18일부터는 마산으로, 10월20일부터는 마산과 창원으로 시위의 불길이 퍼졌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0월19일 부산으로 내려가 시위 현장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 파악했다. 박정희에게 민심 수습책을 건의했다. 부마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될지 모른다고 했다. 박정희는 화를 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 옆에 있던 경호실장 차지철도 거들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항소보충이유서’, 1980년 1월28일) 1979년 10월26일로부터 며칠 전이었다.
신은 더 간절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박정희 대통령을 위한 나의 기도는 관념적이었다. 불타는 신앙심과 순진한 애국심만 있을 뿐,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별하는 눈은 없었다. 대통령에게 축복을 한 강신명 목사의 기도도 그랬다. 힘센 자에게 계속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달라는 요구. 나와 강신명 목사의 기돗발을 능가할 정반대편의 다른 기도가 있지 않았을까? 그 기도 볼륨이 훨씬 크고 내용이 간절하지는 않았을까? 박정희 군사정권한테 두들겨맞거나 가족을 잃거나 거지가 된 이들의 눈물 젖은 기도. “주여, 제발 저들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는 인생을 기도로 보낸 사람이다. 내 기억엔, 병상에 누워 계시던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단 하루도 새벽기도를 빼먹지 않았다. 시골 촌구석과 소도시의 새벽 정적을 때리던 교회종 소리(나중엔 차임벨)를 잊을 수 없다. 그 소리는 날마다 새벽녘 꿈결 속에 찾아와 희미하게 젖어들곤 했다. 아버지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교회로 향했다. 아버지는 기도 중에 박정희를 언급했을까? 했다면 무어라 했을까.
1979년이 담긴 스크랩 제12권은 건조하다. 첫 장의 서시를 제외하고는 단 한편의 시도 없다. 섭섭하게도 이때부터 아버지는 손수 만든 수제 스크랩이 아닌 비닐에 종이를 끼우는 이른바 ‘면장철’을 사용했다.
(재미가 없으셨는지 13권부터는 다시 수제 스크랩을 만들었다가 14권부터는 계속 시중에서 파는 스크랩북을 이용했다) 박정희의 죽음을 알리는 여러 기사들에 대해 아무런 시도 남기지 않았다. 마지막 글을 찾아보았다. 스크랩 11권에 있다. 1978년 7월6일치인 ‘박정희 후보 9대 대통령 당선’ 기사 밑이다. 이때 박정희는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총 2,578표중 2,577표를 획득했다. 1표는 무효였다. 최후을 맞기 열다섯 달 전.
체념과 동정 |
그렇다. 이미 약을 쓸 수 없었다. 약 먹느라고 괜히 고생만 한다. 그는 약을 먹지 않고, 총을 맞고 갖다. 내 기도는 소용없었다. 주여~.
◆ 참고한 책과 자료
『한국일보』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23회. 2011. 8. 2
『한국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2)
『대한민국사1』(한홍구 지음, 한겨레신문사, 2003)
『김형욱 회고록 3』(김형욱 박사월 지음, 아침, 1985)
『미국사 산책 11』(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10)
『시대의 불침번』(정경모 지음, 한겨레출판, 2010)
『위대한 영화인 신상옥』(한국영화인복지재단 펴냄, 2006)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항소보충이유서’(1980년 1월28일)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laneee
2012.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