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km나 걸었다고? 미친 게 틀림없어! - 천 년의 산티아고 순례자 길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온다. 산티아고의 길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몇백 킬로미터에서 몇천 킬로미터까지 걸어오게 하는 힘이 있다. 비행기와 열차, 자동차와 버스가 버젓이 다니는 21세기에 걸어서 목적지로 가다니! 그것도 일부러 사서 고생하면서! 이 길에 관심 있는 사람만이 이 같은 마음을 헤아리리라 생각하니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201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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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곧바로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에까지 들려온다. 산티아고의 길은 세계인들로 하여금 몇백 킬로미터에서 몇천 킬로미터까지 걸어오게 하는 힘이 있다. 비행기와 열차, 자동차와 버스가 버젓이 다니는 21세기에 걸어서 목적지로 가다니! 그것도 일부러 사서 고생하면서! 이 길에 관심 있는 사람만이 이 같은 마음을 헤아리리라 생각하니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예전에 기차에서 만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이곳에서 800km를 걸었다고 했더니 황당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힘들게 뭐 하러 걷느냐며 나보고 미친 게 틀림없다고 했다. 맞아, 어쩌면 우리는 미칠 만큼 걷고 싶었는지 모른다.
흔히 순례자 길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하이라이트는 조금 다르다. 내게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계단에 앉아 광장으로 속속 도착하는 순례자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이라이트다. 성당 안에 고이 모셔둔 성 야고보의 유골함을 보는 것보다 순례자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더 감동적이다.
오전부터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서양인 특유의 핏기 없이 새하얗던 그네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발갛게 익은 모습이다. 걸음걸이 역시 어딘가 불편한 듯 느리고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힘들고 피곤해 보이는 육체와 달리, 그들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난다.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감격에 겨워 터져 나올 듯한 울음을 겨우 참아내던 얼굴들이 주변의 순례자와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 바쁘다. 순례자들은 벅찬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곳은 그런 매력을 지닌 곳이다. 순례자들의 눈빛을 직접 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죽기 전에 한 번쯤 이곳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리라.
순례자들은 지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하려는 듯 쉽사리 광장을 떠나지 못했다. 누군가는 앉아서, 또 누군가는 누워서 산티아고 대성당의 모습을 눈과 가슴에 담았다. 순례자들의 마음속에는 더 많은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으리라.
순례자들을 따라 나도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광각 렌즈로 찍기조차 부담스러운 대성당은 높이 100m, 폭 7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한다. 이 성당은 오랜 세월 지어진 만큼 로마네스크 양식, 바로크 양식, 고딕 양식이 함께 섞여 있다.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면서 순례자의 길 역시 함께 등재되었다고 한다.
성당 안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하다. 입구로 들어서면 뒤쪽에 섬세하게 조각된 오래된 기둥이 보인다. 예수의 계보를 조각해놓은 기둥으로, 성당에 들어선 순례자들이 가장 먼저 들러 기도하는 곳이다. 예전에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울타리를 쳐놓았다.
마침 미사 중이었다.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주민이나 순례자나 모두 경건한 얼굴이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몇 차례 반복한 다음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순례자에게 보내는 신부님의 축복 메시지가 이어졌다. 전 세계에서 도착한 순례자 수와 출발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도 어제 둘이 도착했단다. 혹시나 하고 두리번거렸지만, 너무 많은 인파에 나랑 비슷한 얼굴이 어디 있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곳곳에 순례자들의 낡은 배낭이 눈에 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광경이다.
발걸음을 옮겨 순례자 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무실에서는 이곳에 도착했다는 확인도장을 크레덴시알Credencial에 찍어주고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발급해준다. 여기서 수집한 정보는 다음 날 미사 때 발표한다.
순례자 사무실은 성당과는 전혀 다른 작고 조용한 건물이다. 아치형 입구를 지나 정원으로 들어가자 자전거와 배낭들이 나를 반긴다. 순례자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어느새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문 안쪽으로 차례를 기다리던 한 순례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사뭇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 나도 땀에 절어 꼬질꼬질한 차림새로 6년 전 저 순례자처럼 사무실을 찾았지. 그러나 더러운 차림새와 달리,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두 손을 모은 저 순례자의 손 안에도 그 순간이 담겨 있겠지.
순례자들은 이제 가슴속에 켜진 자신만의 빛을 소중히 간직한 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이곳 순례자의 길을 그리워하면서 세계 곳곳, 저마다 제자리에서 자신의 빛을 환히 밝힐 것이다.
‘별들의 들판’이란 뜻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옛날에는 성 야고보를 가리켰지만, 지금은 길을 걷는 사람들의 별처럼 반짝이는 마음을 가리킨다는 생각이 든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이곳에 다시 오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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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소도시 여행 박정은 저 | 시공사
중남미 여행 중 스페인어를 배우며 시작된 이 나라에 대한 관심은 저자를 마침내 순례자의 길로 이끌었다, 순례자의 길은 저자에게 큰 깨달음이자 행운의 길이었다. 이 길에서 저자는 스페인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에 감동하고, 감칠맛 나는 음식에 매혹당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저자는 다시 스페인을 찾았다. 이번에는 스페인 소도시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마치 둘시네아 공주를 찾아 걸었던 돈 키호테처럼. 흔히 정열, 사랑, 자유로 표현되는 스페인은 감히 한 단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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