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누구에게나 가장 궁금한 무엇이다. 헌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오래된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고미숙이 나섰다. ‘사용설명서’를 내걸고, 독자들에게 말을 건넸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고미숙 지음|북드라망 펴냄). 이어 지난 9월24일, 서울 정동 성프란치스코 교육회관, ‘고미숙이 말하는 운명 사용법 특강’이 펼쳐졌다. ‘운명,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에 대한 아주 좋은 팁이다.
고미숙, ‘운명학’을 말하다
고미숙이 진단하는 현 시대는, 풍요롭지만 두려움과 불안이 충만하다. 그것은 부조화다. 풍요롭다면, 더 이상 기대도 두려움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결국 우리는 돈이 기대와 두려움을 메울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일상은 늘 ‘불안’에 둘러싸여 있다. 고미숙은 이것을 ‘(과도한) 경쟁’때문으로 분석한다. “평생을 기대가 채워지지 않아 공허하고, 알 수 없는 불안이 나를 잠식한다.” 시인 박노해도 읊었다.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시대고독」중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배치 안에서 우리의 운명을 밟아가야 할까. 고미숙 왈. “어떤 길 위에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내 고유의 리듬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독창적인 운명의 코스를 밟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자신을 알고, 지금 내 상황과 위치를 알아야 함이다. 많은 우리, 스스로를 알려고 하거나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세계가 어떻게 나를 위해 웃을 수 있겠나! 그러니, 점도 보고 사주도 본다. 길흉, 생로병사, 연애 등. 자본주의는 이것을 화폐화 한다. 고미숙의 문제의식이 발동한다.
“무지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삶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 결과, 사람들은 아주 조그만 상처에도 존재 전체가 기우뚱! 흔들린다.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공감의 지대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p.20)
“사주에는 '음양오행' 밖에 없다. 그 리듬만 있는데, 사람들은 취직, 짝, 아이, 돈 버는 것 등을 묻는다. 음양오행이 언제부터 취직, 짝, 아이, 돈 등을 다뤘다고. 그것이 나는 신기했다. 명리학은 수학적 논리이다. 그것을 터득하면 현대인들이 원하는 욕망에 맞춰 길흉이 나온다. 될 때가 되면 된다. 결혼할 때가 되면 한다. 그러나 변한 게 뭔가. 사유와 욕망에 대해 통찰할 기회가 박탈된다.”
토정 이지함, 토정비결을 만들었다. 민중들도 역학의 원리를 활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비법으로 꿍치지 않고, 인민을 위해 베풀었다. 그러나 이것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의 삶에 대해 통찰하지 않을 것 같아서 30% 오차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오직 소유와 증식을 향한 사다리만으로 이어져 옆을 볼 수도 전체를 볼 수도 없다. 하여, 타자의 삶을 대신 살아가고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모두가 불안하다. 이 불안의 늪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밤하늘의 별과 인생의 길을 하나로 이어 줄 지도를 찾아내면 된다. 사주명리학이 바로 그것이다.”(p.63)
“영적인 활동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차원이 열리는 상황을 경험하면 미래가 보인다. 그것은 앎을 통해 운명을 터득하는 게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내가 몸을 빌려주는 것이다. 점성술과 운명학을 혼동하면 안 된다. 배워서 이치를 터득해야 한다. 자신에 대해 많은 문제가 해결됐다고 느낀 것은 시공간의 원리에 입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인은 자연을 많이 사랑한다. 자연을 많이 파괴했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다. 도시 안에도 자연이 있다. 도시도 오행의 산물이다. 우리는 어딜 가도 춘하추동의 리듬을 벗어날 수 없다. 도시 안에는 금기로 가득차서 서로 경쟁하고 이기고, 살기가 등등하다. 이것도 운명의 산물이다.”
고미숙이 말하기를, 세상 모든 것, 우주에 있는 것을 재료로 한다. 그 질료를 구성하는 것, ‘목화토금수’밖에 없다. 그 힘과 질료가 이합집산, 생명과 무생물의 길항작용이 우주를 만든다. 일단 내가 어떤 시공간에 사는지 아는 것, 운명학의 첫 번째다. 서양의 별자리도 우주에 대해 설명을 한다. 다만 오행론에 비해 설득력도 부족하고 개입할 여지가 없다.
“‘운명학’처럼 고매하면서 또 흥미진진한 공부도 드물다. 자신의 운명을 텍스트로 삼고, 우주적 이치를 네비게이션으로 삼는 것이니 말이다.”(p.5)
“사주명리학의 토대가 되는,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를 움직이는 힘들의 원리가 있고 그것이 곧 각 개체들의 운명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 ‘앎의 법칙’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p.69)
명리학을 배우면서 ‘운명론’이 바뀌다!
고미숙의 경험담이 뒤를 잇는다. 고전평론가는 어떻게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게 됐을까. 앞선 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을 위해 동의보감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육십갑자를 배워야 했고, 이를 활용해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사주였다. 그때 알았다. 의학과 역학은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어떤 질병이 유행할 것인지도 육십갑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주는 의학에서 아주 필요하다. 사주를 보면 어떤 장부(臟腑)를 많이 쓰는지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뭔가 많거나 부족하다. 거기엔 위계가 없다. 살아가면서 넘치는 건 줄이고 모자라는 건 채워야 한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도리고, 사는 이유다. 이게 공부다. 공부는 자기를 아는 것이다. 자기를 아는 가장 구체적인 공부가 역학이다.”
따라서 사람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사이 ‘관계’가 있다. 기운이 감정, 행동, 습관을 만든다. 내 안의 목화토금수, 계속 움직인다. 역시 그런 사람을 만난다. 그것이 상생 상극이다. 그런 관계에 따라 남편 복, 부모 복, 재물 복 등과 같은 구체적인 것들이 도출된다. 그 중간이 운명을 바꾸고 주인이 될 수 있는 장이다.
“산다는 건 관계와 활동이다. 어떤 관계를 맺을지, 또 어떤 활동을 펼치게 될지를 추론할 수 있다. 고로, 의와 역은 하나다. 음양오행론을 ‘의역학(醫易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p.43)
“지금 사주명리학은 중간이 생략된다. 음양오행학은 알고 보면 무척 재미있는 학문이다. 종교와 상관없다. 음양오행이라는 주역의 이치는 전수될 뿐이다. 일종의 물리학적 패러다임이다. 나도 혼동을 했는데, 막상 배우니 그것과 상관없더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살면 운명이라고 하는데 개척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요구에 자신을 끼워 맞춘 거지.”
그는 명리학을 배우면서 ‘운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마저도 이렇게 ‘다르게 보는 힘’은 없었단다. 계급 등을 보고 사람을 판단했던 그는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눈앞의 안개가 사라졌다. 세상의 부귀공명을 하찮다고 할 수 없으나 그건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태도임을 깨달았다. 지금 사람들이 부유하게 살게 됐는데도, 왜 우울한가에 대한 이해가 됐다.
핵가족, 세상 거의 모든 문제의 기원
그리고 답이 나왔다. 그 근원을 알았다. 문제는 핵가족! 화폐가 지배하면서 핵가족이 중요한 주류 가치가 됐다. 일부일처제도 만들어졌고, 사랑이 최고의 가치인양 믿게 됐다. 고미숙은 여기서 존재의 구원 여부를 언급한다. 이렇게 살면 존재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것. 20세기 인류는 참으로 별의별 실험(?)을 다 했다. 혁명을 향한 실험, 대학살을 위한 실험, 실험이라고 명명하기 힘든 거의 모든 것을 행했다. 그것이 20세기였다.
그 실험, 우리 안에서도 일어났다. 화폐를 누리되, 화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것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내적혁명, 실패였다. 그 문제의 근원, 고미숙이 보기엔, 핵가족이 있다. 그것은 절대 가치였다. 지금도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그 가치를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아이를 낳으면 명리학적으론 내 정기를 뺏긴다. 어떤 동물은 벼랑에서 자식을 떨어트려서 살아남은 자식만 키운다. 그런데 사람은 다르다. 이상하다. 나보다 더 예쁘고 똑똑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이를 바란다. 이 욕망이 핵가족에서 만들어진다. 교육 등 모든 게 이것을 향한다. 효(孝)는 자리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니 무슨 소통이 되나. 전부 다 예쁘고 자라는 순간의 이미지만으로 산다.”
그러다 키운 아이, 사춘기만 된다. 아이는 어느덧 괴물(?)이 된다. 부모와 사춘기의 아이, 상극이 된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니, 아이도 부모도 감당이 안 된다. 부모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자기를 모르고 가치 중심을 갖지 못한 부모는 아이의 사회적 성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화폐적 삶으로 치닫는다. 고미숙은 단언한다. “이런 마음으로 혁명은 불가능하다.”
좀 더 솔직하게 선언할 것을 권한다. “지금 내가 지구다.” 왜 후손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표한다. 결국 나를 위한 것이고, 지금의 나를 주시할 것. 후손을 위해서라고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는 그것을 ‘사회과학 담론이 가진 허구성’이라고 표현한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 그건 DNA를 공유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건 헌신이 아니고, 생색낼 일도 아니다. 요즘 딸바보, 아들바보, 하는데 결국 나는 나를 사랑해, 이 말이잖나. 진짜 사랑은 나와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타자를 사랑할 능력이 없다. 가령, 그것을 효(孝에)서 배우라고 하는 것이 유교다.”
고미숙에겐 이런 이치를 알고, 주체적인 원리를 배워서 가족을 떠나는 것이 곧 ‘삶’이다. 문제는, 핵가족으로 다 돌아오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핵가족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래서 핵가족에서 구원은 없는데도 결과적으로 모두 정 여사(<개그콘서트>)가 되고 트라우마에 빠진다. 전국이 온통 힐링캠프로 도배되는 이유다.
상처는 경력사항이자 산업이 됐다. 마음의 상처를 만들어내야 하는 지경. 병원이 이렇게 비대해진 것은,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병을 만들어낸 덕분이다. 환자가 줄면 안 되니까, 병을 만들어서라도 환자를 만드는 것이 지금의 의학이다. 힐링도 마찬가지. ‘힐링산업’이 비대해지면서 사람의 마음이 굳건해지길 바라지 않게 됐다. 인생의 모든 파노라마가 상처라는 이름으로 드러난다.
“나는 광산촌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자랐는지 얘길 하는 건, 잘난 척하려고 그러는 거다. 후배가 ‘광산촌 산업주의’라고 하더라. (웃음) 부모와의 관계가 매끄럽게 돌아가는 가족은 없다. 자라면서 시절인연이 엇갈리면서 좌충우돌한다. 다른 방식을 통해 유년기와 청년기를 버텨낸 거지. 이러면서 어른이 되는 거다. 지금은 핵가족 안에서 사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지금 아이들, 안전한 곳에서 다 받고 자랐는데, 영혼은 갈 데가 없다. 우스개로 지금 청년들은 ‘아프리카 청춘이다’라고 하더라. (웃음) 단군 이래 아프지 않은 청춘이 어디 있었나. 부모는 아이가 굶주리지 않게 밥만 먹여주면 된다. 자기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사냥법을 가르쳐 주는 것. 그게 부모의 역할이다.”
공부가 필요한 이유
굶주림이 해소된 다음에는 공부다. 다만, 돈을 위해서, 짝짓기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공부할 필요가 없다. 고미숙이 강조하는 공부는 이런 것이다. 사회를 통찰하면서, 왜 왜곡이 됐고 생명과 자연에 대한 주시다. 그런 공부가 부족하면, 중년이 돼서 다 가졌는데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을 가질 수밖에 없단다.
“우리가 부자를 부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부자의 삶이 너무 공허하다는 건 명리학을 공부하면 알 수 있다. 화폐로 쾌락을 증식하면 중독이 되는 것 외엔 없다. 그러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지성을 쌓는 것이라면 돈이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 사회는 가치를 모르고 부자를 부러워하는 방식으로 꿈을 만들고 있다. 쾌락이 내려올 때 두려움이 커진다. 부가 증식될수록 부자들에겐 그만큼의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한다. 그걸 목표로 삼은 중산층도 마찬가지다. 끝없는 결핍을 만들어낸다.”
사주명리학의 세계가 필요한 이유는, 그곳에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여덟 글자로 나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생과 상극의 리듬도 있다. 상생으로 다 돼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상극이 동시에 있다. 결국 공짜가 하나도 없으며, 그것이 곧 사람 사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을 먹고 말을 한다. 아이디어, 능력 등이 세상에 내는 기운이다. 이걸로 재물(돈)을 만든다. 이게 자본주의에서 성공한 리듬이다. 능력이 좋아서 돈을 벌고, 다시 순환하는데 이건 반쪽이다. 사회적 관계로 가야한다. 관계 안에서 그것이 흘러가야 한다. 정치라는 영역이 뒤따른다. 여기에 또 공부가 있다. 모든 존재의 근본적인 활동이다. 공부를 해야 나를 상생하게 한다.”
그도 오해를 했었음을 실토한다. 지식인이라서 공부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식인이 아닌 사람에게 공부하라고 말하는 게 약간은 불편했다. 공부가 선택인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모든 사람의 사주팔자에는 공부가 있다! 그것이 나를 상생하게 하고, 운명이 튼튼해진다. 즉, 공부가 운명이라는 것.
명리학을 배우고서 공부가 존재의 근원임을 확인했다. 자기탐구와 내적성찰이 있었는가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됐다. 이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운, 아내(남편)복, 부모복, 동료복 등이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사주를 보러 가서, 심각하게 이런 것을 물어보는데, 고미숙은 그것이 공부 중에 제일 통속적이고 하수라고 말한다. 왕초보 중에 왕초보.
“가족은 명리학에서 보면 상극의 향연이다. 같이 있으면 견딜 수 없는 것, 그게 명리학에서의 가족이다.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근본은 출가이다. 사람은 여기에 머물러 있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동식물만 봐도 알 수 있다. 우주를 향해 나간다. 어디든 천지만물과 함께 확장해나가는 것이 인간이고, 누구나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이러면서 좋은 운명을 바라는 건 우주적으로 어불성설이다. 오이디푸스 안에 있는 한 한치도 나아갈 수 없다. 자본주의가 설정한 한계에서 벗어나 율동과 리듬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자. 그럴 때 우리는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게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바다.”
고미숙에게 묻고 고미숙으로부터 듣다(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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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질문이 있다. 우선, 숙명과 운명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둘째, 이런 강연에는 왜 여성이 많을까? 마지막으로 영생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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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대해 개입할 수 없을 때 있는 것이다. 운명론은 자기 명을 알아서 그 명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런 강연에 여성이 왜 많은가. 요즘 모든 공부의 장에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들이 공부를 안 한다. 사회적으로 도태된다. 예전 지성의 영역은 남성이 점유했는데, 디지털 문명이 여성의 음기를 사회적으로 순환하게 만든 것 같다. 남성은 직업도 유동적인데, 유동성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평생 정규직 방식으로 살다가 적응을 못하는데, 남성들도 곧 적응할 것이다. 음기가 세지는 상황에 적응하면 이런 식의 불균형은 극복될 것이다.
원초적으로 누구나 운명학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남성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한 것은 사회를 바꾸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기가 가진 특성이다. 큰 걸 바꾸고 묻어가면 된다고 보는 거다. 여성은 디테일을 중시한다. 혁명이 일어났어, 그런데 나 실연당했어. 죽고 싶은 거다. 자신의 디테일한 감정의 회로가 더 중요해서 관계에 대한 것을 확인받고픈 욕구가 있다. 여성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 남성이 바뀌는 만큼 여성도 바뀌어야 한다. 가족, 특히 핵가족이라는 조작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억지로 같이 살아서 서로 종속되고 애증이 격렬해지거든. 그런 방식의 시대는 지났다고 본다.
사람은 집중이 가장 어렵다. 기도하면서 별의별 문제가 떠오른다. 모아지지 않는 것을 모으는 것이 스승들이 하신 호흡법이다.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생을 하게 되면 강시로 출몰한다. (웃음) 다른 나, 즉 다르게 바뀌는 것만이 영생하는 길이다. 다른 것을 받아들일 때에만 불멸한다. 우주에서 멈춰있는 것은 죽음이다. 끊임없이 달라져 가는 나로서만이 불멸을 얻는다. 그래서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거다. 고기 없이 못 살아 그러면 고기로 태어날 수도 있다. (웃음) 내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도 시절과 조응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성공해도 자만하지 말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라. 우리에겐 담백한 삶이 필요하다.
“현대사회는 지식정보화 사회로, 전방면에 걸쳐 여성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일종의 후천개벽이 진행 중인 것. 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 곧 양기가 밖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례하여 남성들은 점차 여성화되어 간다. 남성 안에 있는 음기가 작용하는 까닭이다.”(p.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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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만 있다든가, 양만 있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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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방식이 음과 양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느냐에 따라 양으로만 된 양팔, 음으로만 된 음팔로 나뉜다. 양팔은 음으로 보완이 안 되면 균형 잡기가 더 어려워지겠지. 남성이 양팔이면 그나마 괜찮다. 여성이 음팔이면 기가 세다. 남성이 음팔이면 이 남성은 음기를 많이 쓰게 되니까, 남자들 사이에선 적응하기가 어렵겠지. 목화토금수에서 목화는 양에 가깝고, 금수는 음에 가깝다. 양팔이라면, 금수가 섞이면 괜찮지. 육신까지 가는 것은 미분이나 적분 정도로 보면 된다. 이상한 직관 같은 게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예전에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미리 알고 가야한다고 생각했었다. 1~2년 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떤 부분을 채워야 하나 고민하고 공부했다. 그런데 알면서도 잘 안 된다. (웃음)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면 그게 사술이 된다. 무형적인 어떤 것을 터득해야 한다. 그게 용심이다. 자꾸 뭐가 없다고 하면, 유형적으로 뭔가 없다는 것에 집착한다. 명리학은 냉정하다. 배우자 운이 없는데 생길 수는 없다. 그런데 다르게 변주할 수가 있다. 다른 식으로 내 삶의 무형의 자산을 만들 수 있다. 무형의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유형이 안 된다면, 무형의 자산으로 바꿀 수 있음을 기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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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고미숙 저 | 북드라망
이 책은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인문학과 사주명리학의 만남을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회비평서이자, 힐링과 치유가 넘칠수록 상처가 늘어나는 기묘한 시대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한 공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함을 동서양 고전을 넘나들며 말하는 인문서이고, 그 공부의 지도가 되어 줄 사주명리학의 초보 지식까지 친절히 담아 놓은 사주명리 입문서이다…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simuy
2013.09.22
"지금 내가 지구다.” 왜 후손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표한다. 는 글에 큰 공감이 갑니다.
다만, 핵가족, 세상 거의 모든 문제의 기원이라는 의견과, "가족은 명리학에서 보면 상극의 향연이다. 같이 있으면 견딜 수 없는 것, 그게 명리학에서의 가족이다.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등의 근본은 출가이다. 사람은 여기에 머물러 있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네요.
후자는 혈연보다 사회와의 연대를 중시하는 듯 합니다만..
ssal0218
2012.10.31
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라...
샨티샨티
2012.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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