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크너, 대기만성의 노력형 작곡가
그의 음악적 연보에서 눈에 띄는 장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성악을 포함한 종교음악이지요. 특히 린츠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있을 때 작곡했던 미사곡 3번 f단조, 또 브루크너가 남긴 종교음악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테 데움’(Te Deum) 등이 유명합니다.
글ㆍ사진 문학수
201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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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안톤 요제프 브루크너 [출처: 위키피디아]

 

음악이 대중적인 것과 순수한 것으로 나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런 식의 이분법으로 음악을 쪼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19세기의 음악가들은 ‘그냥 음악가’였습니다. 베토벤이나 슈베르트는 물론이거니와, 좀 더 후대로 내려와서는 리스트나 파가니니 같은 비르투오소 계열의 음악가들, 혹은 점잖고 묵직한 이미지로 표상되는 브람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순수하고 고급스러운 음악가들’로 인식되는 그들조차도 당대에는 그저 ‘음악가’로만 존재했습니다. 말하자면 음악적 순수함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까지 두루 갖춘 음악을 써내는 것이 그들의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변화인 자본주의 체제의 도래는 음악의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더욱 부채질했을 겁니다. 콘서트홀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활성화하기 시작한 대중매체는 이른바 ‘스타 음악가’를 찾아내 그의 이름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겠지요. 그렇게 근대로의 진입이 본격화되면서 음악에서의 대중성이라는 요소가 이전 시대에 비해 점점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19세기의 문화사적 풍경이었습니다.

 

안톤 브루크너(1824~1896)는 바로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다간 음악가입니다. 이른바 후기 낭만주의 시대를 관통했던 그의 삶은 20세기를 고작 4년 앞두고 막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그는 나이 마흔 살이 넘어서야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으니, 활동 시기가 주로 19세기 후반에 집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대중성이 음악에서 점점 중요해지던 시기였지요.

 

그런데 어떤가요? 이 브루크너라는 음악가는 한마디로 그런 시대에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도시 린츠(Linz)에서 남쪽으로 약 15km쯤 떨어져 있는 안스펠덴(Ansfelden)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성품이 매우 우직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엄격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습니다.

 

이런 특성들은 당연히 그의 음악에도 반영돼 있지요. 특히 9개 교향곡(스스로 ‘습작’이라 밝힌 f단조와 0번으로 칭한 d단조까지 포함하면 모두 11개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그의 음악은 ‘웅장하고 광대한 음의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곤 하는데, 그 뿌리를 더듬다 보면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오랜 세월을 보낸 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에서 울려나오는 웅장한 음향과 그의 교향곡들은 매우 밀접한 친연성을 보여줍니다.

 

브루크너는 시골학교 교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본인도 교사로 일했습니다. 슈베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브루크너는 16세에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이듬해에 보조교사로 교편을 잡습니다. 한데 그는 아버지로부터 직업을 물려받은 것뿐 아니라 오르간도 배웠습니다. 시골 성당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열 살 무렵부터 오르간을 연주했다고 합니다. 약 2년 뒤에는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성가대에 들어가지요. 이 수도원은 브루크너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그는 1845년부터 1855년까지, 이 수도원에서 처음에는 교사로, 나중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니까 10대의 일정 기간과 20대의 전부를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어땠을까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웅장한 수도원에서의 삶이 그의 음악은 물론이고 인간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브루크너는 바로 이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음악에 대해 심도 있는 학습을 했을 뿐 아니라 마침내 작곡가로서의 행보를 내딛기도 하지요.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곡은 아니지만, d단조의 레퀴엠과 b플랫단조의 장엄미사가 바로 이 시기에 작곡된 음악들입니다.



 



브루크너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손꼽히는 몇 번의 이주(移住)는 1856년 린츠의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취임한 것, 또 1868년 음악의 도시 빈으로 들어선 것 등입니다. 물론 빈으로 가기 전이었던 1863년에 린츠에서 공연된 바그너의 음악극 <탄호이저>를 보고 받았던 충격이 이후의 브루크너 음악, 특히 교향곡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요. 하지만 브루크너의 삶에서 가장 근원에 자리했던 마음의 고향은 역시 성 플로리안 수도원이었습니다. 도시 생활을 두려워했던 약간의 은둔자적 성향, 또 시골 농부와도 같은 우직한 성품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을 겹겹이 쌓아올리는 듯한, 웅장한 대성당 건축물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교향곡들은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부터 몸 속에 저장된 오르간의 중층적(重層的) 음향에서 비롯했을 겁니다.

 

그의 음악적 연보에서 눈에 띄는 장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성악을 포함한 종교음악이지요. 특히 린츠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있을 때 작곡했던 미사곡 3번 f단조, 또 브루크너가 남긴 종교음악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테 데움’(Te Deum) 등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브루크너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까닭은 역시 교향곡 때문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어느 정도나마 굳힌 것은 40대에 들어서였습니다. 서양 음악사를 수놓은 수많은 음악 천재들, 모차르트는 말할 것도 없고 낭만 시대의 음악가들인 슈만이나 쇼팽, 리스트, 브람스 같은 이들이 20대 초반에 이름을 날린 것에 비하자면 참으로 대기만성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빠트릴 수 없는 멘토, 말하자면 브루크너의 음악적 여정에서 커다란 자극이 됐던 인물로 바그너를 빼놓을 수 없지요. 브루크너는 서른아홉 살이었던 1863년에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봤고, 2년 뒤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을 보기 위해 뮌헨으로 갑니다. 이때 바그너를 직접 만나기도 하지요. 바로 이렇게 바그너에게서 큰 자극을 받으면서 브루크너는 마침내 교향곡 작곡에 손을 댑니다. 1863년에 자신의 첫 번째 교향곡이었던, 하지만 ‘습작’이라며 스스로 평가절하했던 ‘교향곡 f단조’를 작곡합니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교향곡 d단조’를 작곡합니다. 이 곡은 훗날, 브루크너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이었던 1895년에 작품을 정리하다가 발견된 곡이지요. 그러니까 본인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곡이었습니다. 브루크너는 다시 발견한 이 곡의 악보에 ‘0번’이라고 써넣고는 ‘전혀 써먹을 수 없는 단순한 시험작’이라고 부기합니다.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강한 자의식이 느껴지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그는 바그너의 대담한 화성과 조바꿈, 거대한 관현악적 규모, 특히 관악기들의 힘찬 음향에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빈번히 연주되는 그의 교향곡들이 보여주는 특징도 그렇습니다. 특히 브루크너는 린츠를 떠나 빈으로 이주한 다음부터 교향곡 작곡에 더욱 매달립니다. 1871년부터 세상을 떠난 1896년까지 그는 거의 해마다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는 한편, 이미 작곡한 교향곡들을 다시 고치는 작업을 쉼 없이 병행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중에는 자신의 음악적 우상이었던 바그너에게 헌정한 곡도 있지요. 1872년에 작곡했던 교향곡 3번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바그너 교향곡’이라고도 불립니다.

 

오늘 함께 들을 곡은 4번입니다. 1874년에 처음 작곡했고, 1878년과 1880년 사이에 대폭 수정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 곡은 여러 버전으로 존재합니다. 3악장을 수정한 악보는 ‘노바크 판’으로, 4악장을 수정한 악보는 ‘하스 판’으로 불립니다. 브루크너가 남긴 11개의 교향곡(9번은 미완성) 중에서 이 곡을 첫번째로 감상할 곡으로 고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의 교향곡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낭만적’(로맨틱)이라는 표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친숙하게 끌어당깁니다. 브루크너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알기 쉬운 것”이라는 언급을 남겨놓기도 했습니다. 그의 다른 교향곡들에 비하자면 좀더 밝고 낙천적인 느낌을 풍깁니다. 아울러 좀 더 감각적이기도 합니다. 음의 빛깔은 선명하고 선율은 직접적인 호소력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복잡하고 거대하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선입견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거나, 접근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아쉬운 일입니다. 처음 듣는 분들은 특히 1악장 시작 부분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안개 속에서 여명이 밝아오는 느낌으로 시작합니다. 현악기의 트레몰로 속에서 호른이 주제 선율을 연주합니다. 이 주제 선율을 잘 붙잡고 있으면 됩니다. 전곡을 관통하는 모티브입니다. 아울러 금관악기들이 힘차게 연주하는 코랄풍의 악구를 기억하면 됩니다. 워낙 인상적이어서 들으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듣다 보면 음악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리는, 묘한 기분의 명상적 체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아를 잠시 잊어버리고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느낌과 비슷합니다. 혹은 음악으로 샤워를 한 것 같은 느낌일 수도 있을 겁니다. 
  

칼뵘▶칼 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73년/Decca


오래도록 애호가들에게 사랑받아온 음반이다. 현재 국내에서도 보편적으로 가장 애청된다. 칼 뵘은 대체로 느린 템포의 지휘자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브루크너 4번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이 곡의 연주에서 가장 느린 템포로 손꼽히는, 첼리비다케가 뮌헨필하모닉을 지휘한 1988년의 녹음(EMI)에 비하자면 훨씬 빠른 속도로 흘러간다. 1970년대 초반의 빈 필하모닉이 들려주는 합주력은 지금 들어도 역시 명불허전이다. 악기들 사이의 균형, 브루크너 교향곡의 조형미 등 여러 측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

 

 

 

반트▶귄터 반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98년/Sony


2002년 타계한 귄터 반트는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여러 차례 녹음했다. 모두 뛰어난 연주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교향곡 4번을 연주한 음반을 딱 한 장만 추천한다면, 개인적으로는 북독일 방송교향악단(NDR)을 지휘한 녹음을 꼽고 싶다. 같은 지휘자가 쾰른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녹음보다 연주의 질적 우위가 느껴질 뿐 아니라, 반트의 음악적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견고함과 묵직함이 느껴지는 호연이다. 한데 아쉽게도 국내 매장에서 구입이 어렵다. 대신 추천하는 음반은 1998년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녹음이다. 80세를 넘긴 고령의 거장을 실황 연주로 만나볼 수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NDR에 비하자면 다소 밝은 음색의 사운드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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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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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k7723

2014.07.02

잘읽었습니다. 다시 여러번 들어봐야겠네요. 작년 가을 교향곡 7번의 충격을 잊을 수 가 없습니다. 가슴을 넘어 핏속까지 줄달음치는 감동으로 가을 내내 그 곡으로 달린 기억이 납니다. 그 후 4번까지 기대하면 들었는데 생각만큼 다가서질 않더군요. 저에게는 더 시간이 필요한 곡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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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