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유명한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자전적인 작품 <유리동물원>이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면서 많은 연극 팬들과 배우들에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1930년대 경제대공황으로 암울한 현실을 살아야 했던 미국이 배경이지만, 그들이 겪는 위태롭고 불안한 삶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요. 그래서일까요, 한태숙 연출을 필두로 김성녀 씨와 이승주, 정운선 등 베테랑에서 젊은 배우들이 빚어내는 무대는 2014년에도 제법 자연스럽습니다. 특히 신체적인 장애를 안고 자기 안에 갇혀 사는 로라 역의 정운선 씨와 가족에 대한 부양과 지긋지긋한 일상에 지쳐 있는 톰 역의 이승주 씨는 이 무대에서 가장 위태롭고, 그래서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인물들인데요. 공연이 시작되기 전, 두 배우를 분장실에서 직접 만나봤습니다.
<유리동물원> 정운선
공연이 중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작품인데, 생각만큼 잘 풀리고 있나요?
이승주 : “막공까지 끊임없이 계속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한태숙)선생님도 한 회도 빠짐없이 보시고 세세하게 코멘트를 주세요.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이번 공연은 특히 인물에 대해 공부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 나쁘게 말하면 헤매고 있는 부분도 있고, 좋게 말하면 더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같아요. 꼭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고, 연극을 전공한 배우들에게는 교과서 같은 작품이거든요. 그래서 잘 하고 싶고, 잘해야겠다는 압박감도 있는 것 같아요.”
무대 자체가 기울어져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연기하기에 불편하지는 않나요.
이승주 : “힘이 들 정도의 기울기는 아니에요. 미학적으로, 시각적으로, 수평이 깨지면서 주는 위태로움이나 불균형, 아슬아슬한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뭔가 떠 있는 느낌도 들고. 제가 객석에서 보면 떠다니는 배 같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뭔가 허공에 떠 있고, 위태로운 불균형을 의도하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관객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작품인데, 전달하려는 메시지 자체는 시대가 바뀌어도 영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극하는 분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아닐까 싶고요.
이승주 : “저는 누구나 극에 나오는 짐이고 톰, 아만다, 로라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극복하지 못한 부분을 갖고 있고, 요즘 젊은 세대들은 특히나 엄청난 꿈이 있고,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잖아요. 그래서 저의 모습을, 제 주변의 모습을 굉장히 많이 봤어요. 2014년이 아니라 2100년이 돼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감을 얻고 싶었어요. 무대 위의 저를 보고 관객들도 자신의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고요. 어떤 분은 이 작품이 윌리엄스의 변명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기억이라고 생각해요. 뭔가에 억눌린 채 양심의 가책을 갖고 평생 살았다는 것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면서 관객들도 슬픔과 공감을 느꼈으면 좋겠는데, 제가 표현하는 건 그것까지는 못 미치지 않나...”
정운선 : “작품 전반적으로는 오빠와 비슷한 생각을 해요. 주변에도 있지만 내 안에도 모든 등장인물이 존재하죠. 저를 통해, 작품을 통해서 잠깐이라도 자신을 봤으면 좋겠고, 나의 부모와 형제를 이해하고 어떤 부분은 거리를 두고 봤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모두에게 극복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부서질 듯 위태로운 것들에 대해서, 모두 그런 부분이 있다는 공감과 위로를 관객들이 조금이나마 느끼고 돌아가시면 좋겠어요.”
두 분이 작품에서는 남매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동국대 연극학과 선후배죠?
정운선 : “네, 제가 눈도 못 쳐다보던 선배였죠. 오빠가 41기고 저는 45기. 오빠가 공연할 때 저는 스태프로 뭐 갖다 나르고 있었어요(웃음).”
<유리동물원> 이승주
배우로서 서로의 장점을 얘기해 볼까요?
이승주 : “이번에 <유리동물원>을 한다고 했을 때, 로라는 운선이가 하느냐고 물어 봤어요. 제가 봤을 때 잘 맞을 것 같더라고요. 배우는 많지만 색을 가진 배우는 드물어요. 저 역시 끊임없이 색을 내고 싶어서 그 과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고. 그런데 운선이는 어느 정도 자기 색을 내는 것 같고, 이미 <아워타운>으로 한 선생님과 작업을 했고. 한 번 작업했던 연출이 다음 작품에서 다시 불러준다는 것은 배우로서 굉장히 영광이거든요. 함께 작업을 해보니까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독보적인 기운이 있더라고요. 그게 집중력이 될 수도 있고, 묘한 색깔일 수도 있고.”
정운선 : “저 오늘 생일이에요? 계속 듣고 있으려니 민망하네요(웃음). 오빠는 작품을 해석하거나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척 깊고, 지독하리만큼 집요한 부분이 있어요. 그럴 때면 내가 무척 얄팍하다는 생각이 들죠. 대화를 하다 보면 제가 막히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인물이나 작품, 전체적인 것을 바라보는 것이 타고나고, 일반적이지 않으면서도 일반적인 것을 빚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부분에 있어서 스스로 가혹하리만큼 치열하고, 그래서 앞으로 기대 돼요. 오빠가 하면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기대. 오빠로 인해 많이 생각할 기회들이 있었고, 저도 겸손해져야겠구나 생각했어요.”
어제 무대에서 봤을 때는 톰이 조금은 외향적이고 로라는 지극히 내성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성격들은 반대인 것 같습니다.
정운선 : “오빠가 저더러 가증스럽다고 그랬어요(웃음). 전 무척 털털하고, 오빠는 진짜 섬세하고 진지해요.”
이승주 : “그런 면이 부러워요, 동물적인 감각이라고 생각하고 배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런 면이 없어요. 이런 것들을 텍스트로 접근하고, 생각해서 물꼬를 트는 편인데, 배우는 표현하고 행하고 펼쳐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너무 생각만 하고 있지 않나. 깊고 많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펼쳐 보이는 게 중요한데, 제가 생각한 만큼 펼쳐 보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것에서 한계를 느끼곤 하죠.”
이승주 씨의 경우 KBS 공채 탤런트로 알고 있습니다. 매스컴의 기회를 얻으려 노력하는 배우들도 분명히 있을 텐데, 연극무대를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승주 : “처음 연극을 하다 남들 다 하는 고민에 빠졌죠. 아무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무슨 배우인가... 경제적으로 힘든 부분도 있었고. 생각이 많을 때 매체를 살짝 접해보긴 했는데, 그것에 부정적인 견해가 있어서 연극을 고집하는 건 아니고, 무대가 더 잘 맞고 더 좋았어요. 매체들은 호흡이 좀 빠르잖아요. 제가 가진 호흡 자체가 느린 것도 있고, 연극에서 찾아야 할 것들이 더 많다고 생각했어요. 구부러진 물음표가 느낌표로 확 펴졌으면 좋겠는데, 그 물음표를 펴는 작업은 연극에서 하고 싶고, 답을 찾고 싶어요. 물론 저에게 그럴만한 선택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은 이 작업이 좋아요.”
다시 돌아온 무대에서는 생각한 대로 걸어가고 있나요?
이승주 :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어떤 작품을 했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저는 그 작품에서 굉장히 명확하게 몫을 해내는 배우가 되고 싶거든요. 존재감이나 역량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배우의 당연한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그런 부분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채워지지가 않아요. 선배님들 표현을 빌리면 무대 위에서 논다고 하잖아요. 연습도 많이 했고, 그런 것들을 믿고 놓아야 하는데, 의심도 많은 편이고 스스로를 많이 괴롭히는 편이에요.”
정운선 씨의 경우 이미지가 요즘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여배우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특한 색깔이 있는 것 같고, 한편으로는 이미지가 규정되는 면도 있지 않나 싶어요.
정운선 : “저뿐 아니라 누구나 자기 안에 다양한 모습들이 있고, 그 중에 어떤 부분이 도드라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에서 인물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고. 저와 비슷한 부분에서 만나면 좀 더 쉽고, 로라 같은 경우는 저와 간극이 커서 힘들었죠. 보시는 분들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매번 다른 것들을 했다고 생각해요. ‘같은 이미지로 굳혀지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도리어 저를 규정하는 것 같아서 좀 더 나를 믿고 작품과 만나는 편이에요.”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유리동물원>일까, 유리동물원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쉽게 부서질 수 있기 때문에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어쩌면 깨지길 바라는 것이지 않을까 싶은데, 스스로에게 ‘유리동물원’이 있다면요?
정운선 : “지금 제 자신인 것 같아요. 계속 만나야 하고 부딪혀 깨져야 하고, 그러면서도 지켜야 하는. 성장을 하려면 아프지만 깨져야 하잖아요, 배우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하지만 자신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만나고 깨지는 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이승주 : “신기하게도 똑같은 대답을 했어요. 내가 서 있는 중심, 고집일 수도 있고 신념일 수도 있고. 어떤 시각이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데,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고 굉장히 깨고 싶은 부분도 있고. 극복하고 싶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계속 하거든요. 이 작품에서 제가 좋아하는 장면 중에 하나가 로라에 대해서 ‘누나는 다른 여자와 다르다’고 엄마한테 현실을 보라고 말하는데, 결국은 자기한테 하는 말이거든요. 저도 끊임없이 그러는 것 같아요.”
이승주 씨와는 진지하게, 정운선 씨와는 조금 발랄하게 훨씬 더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두 배우와의 인터뷰이다 보니 모든 얘기들을 담을 수 없어서 아쉽네요. 배우들도 그들의 생각을 뜻대로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일 수 없어서, 원하는 만큼 객석과 나눌 수 없어서 여전히 매일 속앓이를 하는 것이겠죠? 여러분에게 유리동물원은 무엇인가요? 연극 <유리동물원>은 8월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됩니다. 명확한 메시지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두 배우가 말한 것처럼 순간순간 내 모습을 발견하고 어떤 위로와 공감을 얻는 것은 사실이에요. 무엇보다 분명히 제 몫을 해내고 있는 4명의 배우를 만나는 것, 그들의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소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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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