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방문을 굳게 잠그고 읽어야 하는 시집
“시와 나 말고는 알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서윤후 시인이 혼자만 알고 싶은 세 편의 시집을 소개합니다.
글: 서윤후
202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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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가 한 사람을 보다 잘 들리도록 열어젖힐 때의 순간이 좋다. 잠들기 전 난데없이 내담자로 만들어 시가 던지는 질문에 콕콕콕 마음이 뚫려버리는 일도. 비벼서 먹는 컵라면 뚜껑의 구멍처럼 뜨거운 증기를 내뿜으며 물을 모두 쏟아낼 때의 개운함을 느껴볼 수도. 이 모든 일은 은밀하게 혼자서 하고 싶다. 혼자만 알고 싶고, 혼자서 잊고 싶다. 시와 나 말고는 알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맹세. 한 편의 시가 한 사람을 잘 들키도록 파놓은 함정에 기꺼이 발을 빠트려보는 것이다. 침대 곁으로 데려온 시집들은 잠겨 있는 문에 안심하고 있는 당신에게로 있는 힘껏 열리기 시작한다. 

 


『화살기도』

여세실 저 | 민음사

 

제가 깬 컵을 좀 보십시오

빛이 납니다요

 

나의 어리석음으로 하여금 아첨의 배면이 들통나게 하시고

나의 수치를 거쳐 아름다움의 진위가 판명 나게 하세요

 

허방을 디뎌 본 자

절룩임의 리듬을 기억하는 발이

무람없이 파편 위로 내뻗게 하세요

 

새로운 걸음을 발명하게 하세요

(「만종」의 부분, 『화살기도』 21-22쪽)

 

 

시인 여세실의 두 번째 시집. 바라는 것이 많은 자의 장황한 기도가 아니라, 여기서부터는 그 기도를 들어주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증명의 시다. 화살도 과녁도 한 몸을 쓰게 되면서부터 쓰게 된 시. 믿음을 지우면서 믿음을 쓰는 형국이다. “나의 수치를 거쳐 아름다움의 진위”를 밝히려는 화자의 태도는 존재라는 통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자신을 소진시키거나 희생함으로 하여금 “새로운 걸음”을 발명해 무엇이든 지속하게 만드는 운명을 헤아려보게 한다. 잠과 죽음, 아침과 용서가 서로를 어설프게 모사하며 알려주려고 하는 배반적인 운명을 짓이긴다. 시인의 기도는 마치 자기 자신을 명중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집을 읽으며 시인의 기도에 동참하고 싶어진다면 그건 당신에게도 지우고 싶은 믿음이 있어서다. 믿음을 지우고 나면 새로운 걸음이 태어날 것이다. 화자는 배반으로 엮은 촘촘한 그물을 던져 자신을 구하러 간다. 기도를 운반하는 것은 기도를 하는 사람일까, 기도를 듣는 사람일까? 이 시집은 그 기도가 자신에게로 기꺼이 가는 사람, 자기 자신이었던 때로 돌아가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믿게 한다.


 

『나의 끝 거창』

신용목 저 | 현대문학

 

비어 있는 네 자취방 들어가 잠들었다 네가 깨워 일어난 아침 멀리까지 내 뒷모습 지켜보던 너를 또 돌아보던 나를 잠시 다녀갔던 슬픔도 끝나고

 

죄를 사하여주신 것과 몸이 다시 사신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은,

죄를 앞질러 형벌을 사는 것

 

없어도 좋을 기적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믿으면, 쑥쑥 자라는 십자가들

 

저녁은 종탑에 올라 한 장 한 장 구름을 찢어 불사른다 종소리가,

검은 재가 되어 떨어진다.

(「빨간 날의 학교」의 부분, 『나의 끝 거창』 99-100쪽)

 

시집에 함께 수록된 산문을 읽으면 알 수 있지만 ‘거창’은 시인의 시작과도 같은 곳이다.  공교롭게 시집의 제목에서 밝히는 ‘끝’의 의미를 추적해보면 끝과 시작이 만나는 곳에 우리는 서 있게 된다. 그 시절 수많은 이름들이 나오는 이 시집은, 그 시절의 환생이나 복원을 바라며 쓴 시들이 아니라 그럴 수 없어 적히게 된 마지막 이야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가 들려주는 듯한 음성과 잡음, 그 재생된 시간을 홀로 걸어 들어가 마침내 자신의 고향을 끝이라는 주소로 뒤바꾸는 모험은 반복해오던 어떤 꿈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시집 한 권으로 만난 이 아름다운 작별 속에서 나는 꿈에서 자주 찾아가던 곳들의 지도를 구겨버렸다.


 

『기다리는 류에게』

이리영 저 | 시인동네

 

나의 피리가 연주하지 못하는 음악이 없고

너희는 부르지 못하는 노래가 없으니

 

우리는 아름다우리

피리가 멈추지 않는 한

 

내 너희를 위해

사랑의 감옥이 되리라

(「피리」의 부분, 『기다리는 류에게』 47쪽)

 

제목이 없던 기다림에 응답을 받는 기분이 들었던 이 시에 오랫동안 매료되어 있었다. ‘기다리는 류’에게 하고 싶었던 말처럼. 이 시집은 기다림에도 매듭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다. 머무르는 일은 고되었겠지만, 그럴 수 있어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 펼쳐진 “사랑의 감옥”에 수감되어 어떤 죄와 벌을 고할 수 있을까. 기도를 운반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었으니,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나의 순서에 있을지 모른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길이 하나라 길을 잃”(「홈리스」)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기도라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나면 시집은 덮혀 있고, 어젯밤 스스로 잠근 방문을 내가 다시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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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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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dong23

2025.11.10

큐레이션 원고 자체가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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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기도

<여세실>

출판사 | 민음사

나의 끝 거창

<신용목>

출판사 | 현대문학

기다리는 류에게

<이리영>

출판사 | 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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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후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휴가저택』 『소소소』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나쁘게 눈부시기』와 산문집 『햇빛세입자』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쓰기 일기』 『고양이와 시』가 있다. 시에게 마음을 들키는 일을 좋아하며 책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