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감상실의 핑크 플로이드
이 앨범은 나 같은 바보가 아니라 진짜 천재들이 만들었다. 언제 다시 들어도 완벽한 짜임새와 아름다운 음률에 몰입되어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런 앨범이 존재할 수 있다니. 핑크 플로이드라는 거장의 존재성 자체가 예술의 반열 아닌가 싶다.
글ㆍ사진 박상 (소설가)
201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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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때였다. 내가 문학 천재인 줄 알고 바보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고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관대한 여자였다. 아니면 나처럼 상태가 좋지 않은 여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그녀를 여자박상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녀와 부산 가는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내 인생에서 여자와 함께 하는 첫 여행이었다. 대전 쯤 지났을 때 그녀가 물었다. 


 “오빤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 뭐야?”
 “하나만 꼽기 아니꼬운데.”
 “그럼 지금 가장 듣고 싶은 음악은?” 


 나는 시디플레이어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아주었다. 안에 들어있는 앨범은 핑크 플로이드의 <Wish you were here>였다. 

 

 


 “음악이 아니라 라디오가 나와.”
 “앞부분이 그래. 좀 있으면 나온단다.”
 “볼륨이 너무 작아.”
 “잠시 후 커진단다.”


 곧이어 그녀는 전설의 명반이 건네는 서정성에 빠져들었다 -고 생각한다. 턱을 괴고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으니까.

 

 차가운 겨울, 이 음악을 다시 들으며 방구석에 찌그러져 있다 보니, 그때의 기차 여행이 사무치게 그립다. 당장 부산 가서 아나고와 소주 앞에서 흡성대법을 쓰고 싶다. 여자와 함께 부산스런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싶다. 그러나 곁엔 아무도 없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나이를 먹어서도, 21세기가 되어서도, 내가 문학 천재인 줄 알고 바보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앨범은 나 같은 바보가 아니라 진짜 천재들이 만들었다. 언제 다시 들어도 완벽한 짜임새와 아름다운 음률에 몰입되어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런 앨범이 존재할 수 있다니. 핑크 플로이드라는 거장의 존재성 자체가 예술의 반열 아닌가 싶다. 타이틀곡 <Wish you were here>를 듣다 보면 음악적인 측면은 둘째 치더라도, 내가 쓴 어설픈 습작보다 이천 배쯤 시적(詩的)인 가사에 전율하게 된다.

 

 그 무렵 부산에는 음악다방이 남아 있었다. 


 “여기서 음악 좀 듣고 갈까.”


 

 여자는 공감보단 단순한 호기심인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벽에 LP가 잔뜩 꽂혀있는 디제이 부스가 복판에 있고, 그걸 바라보는 극장식 테이블이 있는 가게였다. 망해가는 중인지 손님은 몇 없었다. 우리는 맥주를 주문하고 신청곡을 써내려갔다. 내가 신청한 곡을 틀어주기에 앞서 디제이 엉아가 긴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겼다. 그는 목소리를 밑장빼기 하는지 어지간히 낮게 깔았다. 


wish-you-were-here-pink-flo.jpg

 

 “오우, Wish you were here. 이 명곡을 신청한 분이 계시군요. 이 곡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일화가 생각나요. 건강이 나빠져 핑크 플로이드 활동을 함께 할 수 없게 된 기타리스트 시드 배릿이 병원에 입원하자 베이시스트 로저 워터스가 문병을 갔답니다. 그때 병상에서 시드 배릿이 악보를 하나 건넨 거죠. 자기가 새로 만든 곡이라면서. 근데 집에 돌아와 펼쳐보니 그건 백지였어요. 로저 워터스는 잠시 눈물을 흘린 다음 그 백지에 즉흥적으로 곡을 써내려갔답니다. 그 곡에 <네가 여기 있다면>이라고 제목을 붙였죠. 이 앨범에 담긴 Shine on you crazy diamond라는 곡도 시드 배릿에 대한 우정과 애도의 뜻이 담긴 곡으로 알려져 있어요. 이 좋은 곡을 신청해 주신 분은 음…. 해방촌에서 온 천재시인, 이라고 씌어있는데 오오, 누구시죠?……. 부끄러워서 손을 못 드시는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부디 좋은 시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 Wish you were here 같이 들어요.”
 
 정말 믿거나 말거나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그럴 듯한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음악 감상실의 키 큰 스피커가 뿜어낸 LP음질의 고풍스러운 감상은 이 곡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얼마 전 리마스터링 된 이 앨범을 다시 들었을 때 매끈해진 음질이 정말 좋았지만 그때의 고슬고슬 공명하던 음악 감상실의 질감만은 여전히 그리웠다.
 
 밤이 되자 우리는 광안리 해변에 앉았다. 여자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여행에 나는 통기타를 들고 갔었다. 서정적인 낭만이 파도치는 듯 했다. 문득 그 순간이 인생에 다시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먼 훗날 그리운 장면이 될지도 몰랐다. 나는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대뜸 기타를 꺼냈다. 난 기타에 매우 소질이 없지만 그때 이곡을 죽어라 연습하고 있었다. 내가 전주 부분을 다섯 마디 쯤 치자 그녀가 기타 목을 콱 잡았다. 


 “분위기 깨지 마 오빠. 여기서 좋은 곡을 왜 망쳐?”


 나는 주섬주섬 기타를 집어넣었다. 연습 좀 더하고 들려줄 걸.
 잠시 후 그녀는 내 등짝을 강 스매싱으로 후려쳤다. 


 “생각하니 선곡도 열 받아. 나 여기 있는데 또 누가 있길 바래?”
 
 오랜만에 <Wish you were here>를 다시 듣고 있자니 음악도 아련하고, 뜨거운 문장을 쓰던 그 후배도 아련하다. 그리고 등짝이 아직도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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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턴테이블 #핑크플로이드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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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5.01.13

“음악이 아니라 라디오가 나와.”
“앞부분이 그래. 좀 있으면 나온단다.”
“볼륨이 너무 작아.”
“잠시 후 커진단다.”
라는 대화 읽고 ㅎㅎ
전설의 음반이 나오는 순간 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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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