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문학과 발레 같은 문화 수준이 높은 이유가 기나긴 겨울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너무 추워서 안에만 있다 보니 그런 실내 문화가 발달했다는 얘기다. 말로만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는 꿈보다 해몽이네, 하고 웃었는데 정말 겨울에 여행을 하다 보면 그 얘기가 비단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겨울에는 붉은 광장 같이 유명한 관광지를 가봐도 나 같은 여행자만 드문드문 있고,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대체 러시아 사람들은 다 어디 갔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미술관, 박물관에 다 모여 있었다. 평일 한낮에도 초등학생부터 할머니들까지 다양하고 진지한 관람객들을 보면 이 사람들 뭐지,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 사실.
그렇다면 오늘은 나도 이들 한번 슬쩍 끼어 문화생활 좀 해볼까.
러시아 미술, 어디까지 알고 있니?
서유럽 미술만 보고 배운 우리들에게 러시아 미술은 생소하기만 하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수많은 갤러리와 그 수준을 짐작해 보면 러시아의 미술도 범상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지의 세계, 러시아의 미술의 집약체를 보고 싶다면 트레챠코프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미술관이 있는 지하철역은 트레챠콥스카야 역. 무사히 도착해 역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애초에 지상으로 나오면 미술관이 바로 떡하니 있을 줄 알았던 것이 착각이었다.
흔한 표지판 하나 없는 길가에 서서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몇 미터쯤 앞으로 갔다가 괜히 우회전해서 몇 미터쯤, 다시 좌회전해서 몇 미터. 그렇게 괜히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느새 다시 지하철역에 와 있었다.
드디어 길을 잃은 건가…
사실 모스크바는 길을 잃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다. 일단 거리에 표지판이 별로 없다. 있긴 있어도 방향만 알려줄 뿐 정확한 위치를 알기가 어려운 게 대부분이다. 여기에 러시아어를 모른다면 백전백패. 영어 표기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는 게 좋다.
여하튼 그래도 낯선 곳에서라면 길을 묻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현지 사람들에게 ‘트레챠코프…’라고만 말해도 대부분 길을 알려준다. 여기서 길을 헤매는 건 나뿐만이 아닌 것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은 트레챠코프 가문의 형제가 수집한 작품들이 기반이 되어 만들어졌다. 다른 나라의 그림들처럼 그 나라의 역사를 알면 그림이 보이듯 러시아 미술도 마찬가지다. 파란만장하기로는 그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은 역사와 러시아 특유의 깊고 애잔한 정서가 어우러진 그림들은 잘 몰라도 자꾸 눈이 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유명한 그림들 중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면들이 회화로 표현되어 있는 것들이 많으므로 중요한 사건들을 미리 알고 간다면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처음엔 생소하기만 했던 러시아 미술이지만 갤러리를 나오면 어느새 레핀, 수리코프 등 유명 화가의 알게 되고 러시아 역사를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든다.
이른 아침에 간 미술관이었는데 곱게 화장한 할머니들이 우아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한편에서는 초등학생 꼬맹이들이 재잘대며 그림을 보느라 갤러리는 이미 북적이고 있었다. 어쩐지 쓸쓸하기만 했던 겨울의 모스크바 거리. 그럴 땐 추위도 피할 겸, 충만한 러시아의 문화생활도 체험할 겸 갤러리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불가능은 없다, 볼쇼이
아침부터 한나절을 트레챠코프 미술관에서 보낸 탓에 꽤 풍부해진 감수성으로 볼쇼이 극장으로 향했다. 저녁에는 볼쇼이 극장에서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다. 일단 그렇게 계획은 잡았지만 사실 나는 티켓이 없었다. 여행 오기 한 달 전에 예약을 하려했지만 이미 매진. 그래도 모스크바에까지 왔는데 볼쇼이를 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단 가고 보는 거다.
이미 극장 앞에는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극장 로비까지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으련만 볼쇼이 극장의 정문은 꼭 닫힌 채로 표가 있는 사람만이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표를 보이며 당당히 들어가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그 문 안의 온기가 매우 갈급했다.
그때 다가오는 한 남자. 바로 암표상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레벨의 티켓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좌석도까지 보여주며 어느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까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토록 예매하고자 했으나 살 수 없었던 그 표들을 이 사람은 이렇게 많이 갖고 있었다니. 더욱 분한 건 역시 가격이었다. 거의 3~4배에 가까운 가격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가격의 압박은 있지만 암표라니… 역시 러시아에서 불가능은 없구나.
암표 중에서도 가장 싼 좌석을 사서 드디어 극장에 입장했다. 극장은 무대를 뺀 나머지 3면이 발코니 형식으로 된 객석이었다. 무대 정면의 2층 VIP 좌석을 빼고 당연히 무대 앞 1층 좌석이 제일 비싼 좌석이었고 점점 올라가면서 좌석은 싸진다. 6층 좌석에 앉으니 무대가 멀긴 멀다. 배우 얼굴이나 보일까 걱정이 되었다.
공연이 시작되었고 역시나 배우가 앞으로 나오면 보이지도 않아서 일어서야 했지만 소리만큼은 아주 잘 들렸다. 배우들의 노래도 좋았고 무대 연출도 스케일이 커서 볼거리가 많았다. 보는 눈, 듣는 귀가 없는 평균 이하 관객인 내가 봐도 화려한 볼쇼이 극장의 위용에 걸맞은 멋진 공연이었다.
극장 밖으로 나오니 그새 또 눈이 내리고 있다. 오페라를 보고 나와서인지 눈이 반짝이는 듯 모스크바 거리를 밝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 번을 보아도 이렇게 감성이 충전되는데 문화를 생활화 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감성의 깊이와 그 결과물이 대단하지 않을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춥고 어둡고 우울한 러시아의 겨울.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그 시간들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보내면서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고 하니 그렇게 치면 이 지긋지긋한 추위도 이들에게는 축복인걸까.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오늘밤, 문화적인 인간으로 모스크바 거리를 걸어본다.
* 이 글은 『내 안의 그대 러시안 블루』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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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경
본업은 글을 써서 먹고 사는 방송작가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여행 후 내내 자꾸 떠나고 싶은 불치병을 앓고 있으며, 떠날 궁리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여행자다. 여행을 하고 난 후에는 글을 쓰며 여행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 시간이 좋은 작가. 아직은 갈 곳이 너무 많아 다행이고 떠날 수 있는 배짱이 있어 든든하다. 다음에는 또 어디로 갈까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날마다 고민하는 여자. 딸을 제대로 된 여행 파트너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열혈 엄마이기도 하다. blog.naver.com/hkseo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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