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불타 갈 곳을 잃었다. 그녀와 헤어진 내 심정이 그러했다.살아 숨 쉬던 사랑을 산 채로 태워 없애야 했다. 그을음과 진물로 녹아내리는 사랑의 냄새는 지독했다. 사랑을 소멸시킬 방법이 내겐 없었고, 저절로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그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연인의 숫자만큼 이별했으나, 이런 아픔은 처음이었다.
크리스틴과의 이별은, 이별이라는 평범한 말로 정리할 수 없었다.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또한 산 채로 태워 없애야 했던내 사랑의 무덤이니 특별해야만 했다. 두 가지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파리 여행이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에서 차우(양조위)는 수리첸(장만옥)과 은밀히 나눴던 사랑의속내를 털어놓으러 홀로 앙코르와트 사원으로 간다. 몇 천 겹의 시간이 쌓인 벽에 작은 구멍을 내고 입술을 바싹 붙이고 그는 낮게 속삭인다. 고백이 끝나고, 차우는 마른 풀로 구멍을막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애끓는 비밀을 그 구멍은 후세에 전할 것이다. 나는 파리의 하늘에 비밀을 고백했고, 파랑으로 봉인했다.
파리에서 풍경을 흘러가는 시간으로 마주했다. 시간의 공백이 생기면 그녀의 얼굴과 기억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 없이도 삶은 계속되었지만, 나의 매일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부재로써 가득히 존재하는 그녀는 내게 신과 같았다. 신을 잃은 나는 울지않기 위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검은 펜으로 흰 종이를 울게 만들고, 카메라로 풍경을 한 토막씩 도려냈다. 내 이별에 개의치 않는 세상을 어떻게든 아프게 만들고 싶었다. 거친 끼적거림으로 감정을 토로했던 글들로 한 권의 노트가 채워지면 센 강으로 던져버리려 했다. 끝내 그러지 못했다. 아직은 내 빈손에 무언가를 들려주어야 했다.
그 아이와 마지막으로 마셨던 커피 잔을 카페에서 가지고 나왔었다. 유리잔에 묻은 립스틱 자국은 검게 변해 지금은 그 흔적만 겨우 남아 있다. 그 잔에 치자를 심었다. 치자 꽃은 어느달밤에 하얗게 피었다 졌다. 추억은 다시는 반복할 수 없어 쓸쓸했고 끝내 가 닿을 수 없기에 달콤하다. 밤에 쓴 글은 아침이면 감정의 과잉으로 담백하지 못했고, 아침에 쓴 글은 베개에 눌린 자국으로 반듯하지 못했다. 밤의 글을 아침에 고치고, 아침의 글을 밤에 고쳤다. 밤과 낮이 이어지고 쓴 글과 고친 글이 겹쳐져 이 책을 쓰는 동안 내게 이별은 과거이자 현재였다. 시간들이 충돌하는 밤이면 기억은 고통이었다. 내 글은 이별의 추억을 자세히 원했고, 내 몸은 두려워 피했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날일수록 심하게 배가 고팠다. 허기와 이별통을 나란히 두기 민망했으나, 하루에 몇 번씩 찾아오는 허기에 기대어 나는 오늘을 어제로 보내고 내일로 건너갔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어 글이 쌓였다. 추억과 글은 하나로 포개져 이 책 안에 담겼다.
내 글과 내 사진을 함께 두는 일은 어려웠다. 사진은 이미 살았던 시간을 기록한 과거였고, 글은 써나가야 할 미래였다. 그러므로 사진은 글을 이미지로 설명하거나 글의 빈틈을 보충하는수단이 아니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의 풍경들을 글은 문자로,사진은 이미지로 스스로 제 길을 열어 갔다. 이것을 원칙 삼아글과 사진을 배치했다. 부족한 글 솜씨를 사진으로 채우고 싶은 욕구가 일기도 했으나, 그 둘의 목적지와 리듬이 달라서 이룰 수 없었다. 다만, 글에 지쳤을 때 사진은 위로가 되었다. 내게 파리는 청춘의 10여 년을 보낸 집이었으나, 우리에게 파리는 완성하지 못한 문장이었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행복이 낭만romance이다. 그녀와의 이별을 끝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
2015년 봄
이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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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로망스 :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이동섭 저 | 앨리스
이것은 이별에 관한 이야기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났고, 사랑했고, 헤어졌다. 헤어짐 후에도 사랑의 감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와의 사랑을 곱씹고 되짚어보며 이별의 이유를 찾으려 발버둥 친다. 지은이는 책의 첫머리에서 이별은 하나이나, 이별의 이야기는 둘이고, 이것은 ‘나의’ 이야기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이별 후의 감정을 남성의 시선에서 써내려간 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숨기고 싶은 자기 내면의 치부를 여실히 보여주며 이토록 솔직하고 감정에 충실한 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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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섭
『파리 로망스』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