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서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다. 1984년도의 일이니 벌써 30여년이나 됐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생이었으므로, 혼자서 극장에 출입하는 건 쉽사리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봤느냐면, 당시 갱스터 무비의 광이었던 아버지가 이 영화를 보러 가면서 나를 그냥 데리고 간 것이다. 아마 티켓 값도 내지 않았던 것 같다. 매표소에서 성인 표를 한 장 끊고, 출입구의 검표 직원에게 ‘어이, 여긴 내 아들이라구’ 하며 슬쩍 들어갔던 것이다. 지금은 초등학생들에게까지 일일이 입장료를 받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내가 살던 고향에서는 어른이 영화를 보러 갈 때 종종 애들을 쓱 데리고 가곤 했다. 공짜로 말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그러고 몇 달 뒤에 알파치노의 <스카페이스>도 이런 식으로 쓱 따라가서 봤다.)
여하튼,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영화를 처음 보았는데, 어찌나 비슷하게 생긴 인물들이 떼로 등장해 무수한 대사를 쏟아내던지, 핼리혜성처럼 명멸하는 자막들을 따라잡다보니 어느새 100분이 흘러가버렸다. 물론, 그렇다해서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건 아니다. 초등학생 2학년의 시선으로는 상당히 많은 주요(!)장면들이 편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야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초등학생 2학년의 기억이 얼마나 온전한지에 대해 지난 30년 간 끊임없이 회의와 합리적 의심을 품고 지내왔는데, 이번 재개봉을 통해 보니 다른 씬들만은 어찌할 수 없어도 야한 장면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보는 순간 ‘아! 저건 84년 버전에는 없던 것인데!’하며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내게 영화에 관한 첫인상이었으니, 나는 ‘영화라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같아야지’ 하는 근거 없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다음에 본 영화 <스카페이스>는 그럭저럭 영화의 기준에 부합했다.
갱스터 무비로 영화를 접했으니, 이후에 본 <우뢰매>나 <어른들은 몰라요> 같은 방화는 체제순응적인 소년의 입에서도 ‘어째서 이런 게 영화란 말이야!’라며 탄성을 내지르게 만들었다. <원스 어 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본 초등학생 2학년은 탄성을 지르면서도, 이후 꾸준하게 영화를 봐왔다. 소년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심형래가 출연하는 공상과학(물을 표방한) 히어로물을 보았고, 성룡과 홍금보, 원표가 출연했던 ‘복성 OO’시리즈들을 손꼽아 기다렸고, 당연한 말이지만 86년부터는 ‘영웅본색’의 영향 아래 주윤발의 영화들을 모조리 봐왔다.
여학생들 앞에서 괜히 성냥개비를 잘근 잘근 씹으며 고민이 잔뜩 담긴 표정도 지었지만, 그 누구도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아니! 영화랑 왜 다르지’ 하며 혼란에 빠지기도 했으며, 유덕화처럼 무스를 잔뜩 발라 앞머리를 넘기고 청재킷의 깃을 세워 입고서 또 여학생 앞에서 껌을 씹어도 역시 말을 걸지 않아 ‘아! 홍콩 영화는 왜 현실성이 없는가’ 하며 자탄하기도 했다. 그런 청소년기의 방황을 길게 보낸 후, 고등학교로 진학해 몇 번의 미팅을 했고, 대학에 진학해 역시 몇 번의 미팅을 하고,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몇 번의 연애를 하고, 몇 번의 이별을 하고, 몇 번의 구직 실패와 몇 번의 취업 성공과 몇 번의 업무 스트레스와 가족 중 몇 명의 사망과 군 입대와 군 제대와 유학과 가족의 사업 실패 등을 겪은 후,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해 이렇게 영화 칼럼을 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원스 어 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처음 보고 난 뒤, 재개봉으로 다시 본 시간 사이에는 내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를 함께 본 사람은 아버지였는데, 이 영화를 보고 온 날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그의 목소리에선 어느새 ‘이봐! 우리 아들이라구’할 때의 뻔뻔한 자신감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는 내게 ‘상의 할 게 있으니, 꼭 만나자’고 했다. 칠순을 앞 둔 노인은 나를 만나러 경로우대 카드로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합정역까지 한 시간이나 걸려 왔다. 우린 지하철 역 앞에서 만나서 쭈꾸미 집으로 갔다. 소주를 연거푸 마시던 그는 지난 30년간의 인생이 버거웠는지, 내게 ‘그래도 삶을 살아가겠다’고 했다. 잔뜩 취한 채로, 많은 말을 생략한 채로, 내게 ‘아들아, 우리 그래도 포기하진 말자’라고 했다.
개인사라 자세히 쓰진 못함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생을 포기 하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아름다운 말인 것 같다. 그 날, 그러니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처음 본 1984년의 어느 날 이후, 바로 그 때부터 내 생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전의 나는 영화도 모르고, 이야기도 모르고, 자막도 제 때 못 읽어내는 풋내기에 불과했으니까.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도에서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옛날 옛적에 미국에서’라는 뜻인지도 몰랐으니까. 그 후부터, 그러니까 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부터 나는 그 스크린 속의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말하자면, 그 속에 담긴 정치와 음모와 배신과 우정과 사업과 연애에 대해 하나씩 알아야 했다. 그건 달리 말해,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알았다. 나는 나대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마이 라이프’라는 이야기를 써오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생은 누군가와 세상의 신세를 지며 시작해, 그 신세를 갚으며 완성된다는 것’을. 영화를 처음 보여주었던 아버지와 헤어지며 택시비를 먼저 건넸다. 그는 잔뜩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제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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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수지큐
2015.06.24
저에게 늘 힘을 주고 웃음까지 덤으로 주는 글 평생 보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서유당
2015.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