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8년에 걸쳐 사단칠정 논변을 펼친 고봉 기대승이 선계(仙界)에서 세월호 사고를 놓고 나누는 대화로 시작되는 소설 『라이언』은 첫 장부터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극중 퇴계는 아이들을 ‘가만히 앉아 있게 만든’ 장유유서의 권위주의적 질서 형성에 일조한 장본인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들을 일으켜 세워 새 시대의 주역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아름다운 선비’라는 이름을 가진 고교생 라이언에게 빙의된다.
소설 속에는 고교생 라이언과 대립하는 ‘자수성가형 60대 건설재벌 성찬수 회장’이 등장한다. 그 성 회장과 여야 정치인들 간의 검은 커넥션이 스토리의 결정적 모멘텀이다. 마치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미리 내다본 듯하다.
『라이언』의 저자 이창훈은 “세월호가 빨아들인 우리 사회의 거대한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승화시키고 절망과 반목을 딛고 미래세대가 희망을 찾아 가도록 터닝 포인트를 제시했다”고 밝혔다. 연금개혁과 청년실업 문제를 둘러싸고 갈수록 골이 깊어지는 세대갈등의 발전적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또한 새로운 한류 ‘K-스피릿’의 희망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매일경제신문> 오피니언부 부장으로 『잡스처럼 꿈꾸고 게이츠처럼 이뤄라』, 『초월하는 애플 추월하는 삼성』 등을 집필했다.
세월호가 새로운 희망의 대양을 향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왜 퇴계 이황이었나요? 선계에서 지켜보던 퇴계가 고등학생에게 빙의된다는 설정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웹소설과 웹툰의 시대입니다. 책으로 간행된 소설은 갈수록 외면 받고 있죠.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작가가 쓴 장편소설은 재미없다'라는 인식이 더 굳어진 것 같습니다. 누구나 몰입할 수 있는 재밌는 소설, 정확히는 소설책으로 그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습니다. 퇴계 선생을 떠올린 계기는 작년 4월 세월호 사고였습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앉아있게 만든 권위주의적 사회 질서엔 완고한 유교적 관념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요. 퇴계 선생이 세월호 사고를 내려다 보시는 장면을 떠올려 봤습니다. 아마 "내가 죽기 전 훌륭한 임금을 만드는 교육서인 <성학십도>를 지어 바친 선조임금과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이 공교롭게도 같은 17세로구나. 선조는 그 나이에 임금이 됐는데 그 아이들은 그토록 어이없이 희생됐으니 이를 어쩔꼬. 내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세라."라고 한탄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펴봤습니다. 안타까워 하시던 퇴계선생이 앉아있던 아이들을 일으켜 미래의 주역이 되게 하겠노라 결심하십니다. 급기야 미래의 임금들을 위해 <신성학십도>를 새로 써서 전달하기 위해 그 또래 아이에 빙의돼 10대들의 세계로 찾아오시는 거죠. 비록 소설 속에서 나마 세월호가 새로운 희망의 대양을 향하는 전환점이 되게 하고 싶었습니다.
『잡스처럼 꿈꾸고 게이츠처럼 이뤄라』, 『초월하는 애플 추월하는 삼성』 등을 쓰셨지만 소설은 처음이신데요. 집필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우리 삶이란 마지막엔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 것 아닐까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가 상상력의 한계로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 봤습니다. 모든 상상은 결국 이미지로 치환된다는 데 착안했습니다. 이야기의 주요 장면들을 먼저 이미지로 그려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걸 나름대로 ‘이미지 연결 작법’이라고 불렀지요. 이야기가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고자 했습니다. 주인공 라이언이 자전거를 타다가 여주인공 채민들레와 조우하는 장면, 친구 청운이의 자살, 웜홀로 들어가는 동굴, 선비들의 시회, 여종 학덕의 비파 연주, 신성선비들의 공동 수련, 피렌체파크의 비밀공간 등. 말이 되도록 연결시키는 고민은 접어두고 일단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짧은 단어들로 중요한 장면 장면을 스케치했습니다. 작년 5월부터 7월까지 이야기의 뼈대가 될 슬라이드 88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8월부터 본격적인 쓰기에 들어갔습니다. 쓰는 동안 창작의 고뇌보다는 몰입의 희열이 훨씬 컸습니다. 그 자체가 보상이었지요. 어려움이라면 신문기자, 그것도 일요일마다 회사에 나와야 하는 데스크이다 보니 토요일 하루 밖에는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표지 일러스트가 독특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빙의란 하나의 육체에 두 개의 영혼이 번갈아 드나드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소설 속에서 퇴계 선생의 영혼에 빙의된 라이언이 잠들기 전 시간여행, 한자공부, 연애상담 등 궁금한 내용에 대한 질문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녹화해 놓고 잠들면 퇴계가 라이언의 몸에 들어와 동영상 녹화로 답변을 남겨 놓습니다. 표지 일러스트는 일진인 라이언, 그리고 퇴계의 영혼이 빙의된 라이언이 휴대폰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일러스트는 양은봉 작가, 라이언이라는 제호는 우리나라 캘리그래피스트 1세대인 이규복 작가의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고교 일진 라이언, 톡톡 튀는 여고생 라일락, 태산고 재단 상임이사 성하버드 등 다양하고 재밌는 인물들이 소설에 등장하는데요. 특히 정경유착의 대명사로 나오는 `태산그룹 성찬수 회장'은 `리스트'를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인가요?
이 이야기의 여러 가지 설정과 등장인물은 작년 여름 무렵 만들어졌습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자수성가형 건설재벌'로 설정한 소설 속 태산그룹 성찬수회장과 얼마 전 리스트를 남기고 간 성회장은 이력이 판박이처럼 흡사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였지 의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라이언과 대립하는 성찬수 회장의 아들 성하버드가 원래 `성병균'이었던 자기 이름을 혐오한 나머지 개명하는 모티브 때문에 성회장의 성(姓)을 성(成)씨로 설정했는데 결과적으로 성회장의 이력뿐 아니라 성까지도 일치해버리게 된거죠. 책이 막 인쇄에 들어간 후에 터진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보고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소설에서는 선비 수련을 받고 온 라이언이 공부신공을 전수하기 위해 `선비 수련 모임'을 주도해서 전국적으로 일파만파 퍼지던데요. 정말로 현실에서 `신성(新盛)선비클럽'이 조직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문학적인 이상향일 뿐일까요?
심오한 질문이군요.(웃음) 소설을 그냥 허구가 아니라 `개연성 있는 허구'라고 하지 않습니까. 개연성이란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일 가능성, 앞으로 현실이 될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저는 물질만능주의와 극단적 분파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태 속에서 우리의 참 모습을 돌아보게 할 거울이 전통적 가치들 속에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비치는 선비들의 삶은 바로 그런 가치들을 추구하고 있었고요. 소설 속에서는 선비와 선비사상을 요즘의 젊은 세대들의 감각에 맞도록 참신하게 재해석할 수 있다고 전제했고 그것을 신성선비사상이라고 이름 붙여봤지요. 소설은 신성선비사상이 폭발적인 호응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정신문화 운동으로 확산되는 이상향을 그렸습니다. 그 이상향이 단순히 개연성을 넘어 현실화될 수 있길 작가이전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염원합니다.
소설에 시가 여러 편 나오던데요. 라이언이 민들레 선생님에게 읽어준 〈라면별곡〉, 선비들의 시회에 나오는 시조들은 다 직접 쓰신 건가요?
라면별곡은 재작년 여름 페이스북에 올렸던 자작시입니다. 라면별곡과 함께 소개되는 다양한 라면 레시피도 제가 실제로 시도해본 것들입니다. 줄거리를 기획하면서 지인들 사이에서 나름 호응을 얻었던 라면별곡을 삽입하기로 하고, 여러 번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사실 소설쓰기보다도 더 오랜 시간 정성을 기울인 시입니다. 이미지연결작법에 따라 선비들의 시회를 주요 장면으로 먼저 설정해둔 뒤 어떻게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하나 많이 고심했습니다. 면(麵)을 주제로 한 7개의 단시조를 써야하는데 그게 마지막까지 해결이 안 되더군요. 끙끙 앓다가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10번쯤 반복해서 보고 나서 써낼 수 있었습니다.
소설 『라이언』을 누가 읽으면 좋을까요?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이야기 속에 우리시대의 여러 고민을 담으려고 했습니다. 라면을 어떻게 끓이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가난한 사람, 못 배운 사람들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없을까, 공부가 즐거움이 될 수 없을까, 인공지능이 지배하게 될 미래에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중 하나가 지금의 기성세대가 연금과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문제입니다. 저는 소설 속에서 그 기성세대의 책무를 `세니오르 오블리주(senior oblige)'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소설 상의 용어를 작년 10월 매일경제신문에 칼럼으로 썼고,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작가 김난도 교수님께서 지난 3월 서울대 입학식 축사에서 세니오르 오블리주를 인용해 소개해주셨습니다. 김 교수님과는 그렇게 인연이 됐고, 제 소설 라이언에 “기성세대와 미래세대 모두에게 권한다”는 추천사를 써주셨습니다. 김 교수님 말씀대로 미래의 주역이 돼야 할 10대들,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성세대들이 모두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심각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하이틴 로맨스이고 빙의와 시간여행이라는 판타지적 요소와 추리적 요소도 가미됐습니다. 책을 읽어 본 독자들의 한결같은 평가도 책장이 술술 넘어가고 영화나 드라마 보듯 쉽게 읽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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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 퇴계가 된 일진이창훈 저 | 나남
말썽꾸러기 고교 일진의 ‘하이틴 로맨스’를 밑바닥에 깔아 반전이 풍부하면서도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재미를 제공한다. 고교 폭력서클의 일진인 독고라이언은 연상의 교생 선생님 채민들레에게 빠져 상사병을 앓던 어느 날, 자신에게 빙의된 퇴계 선생과 하나의 육신을 시간대별로 번갈아 써야 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둘은 라이언이 잠들기 전 휴대폰 동영상으로 질문을 녹화해 두면 자는 사이 퇴계가 동영상으로 답변을 녹화해 두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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