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국어 선생님 병가 동안 한 달 정도 계셨던 임시 선생님은 흥미로운 과제를 종종 내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피천득 시인의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고 그와 같은 주제로 수필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글쓰기를 어려워 해서 처음에는 진도가 나가지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차근차근 찾으며 나름 만족스럽게 완성했고, 너 같은 딸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칭찬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늙은이에 약간의 허세가 있었던(심지어 중2!) 당시 나는 보라색과 겨울이 시작될 무렵 찬 공기 냄새와 캄캄한 시골집 창으로 비치는 달빛 등을 좋아한다고 썼던 것 같다. 마르쿠스 피스터의 『행복』을 보고 그때가 떠올랐다.
원제 『Weisst du, was Gluck ist?』는 “너 행복이 뭔지 알아?” 라는 뜻이다. 단짝인 조와 레오는 각자가 아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조에게 행복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겨울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송이를 먹어 보는 게 바로 행복이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약돌을 찾는 것, 보드라운 깃털을 지켜보는 것도 조에게는 행복이다. 행복이 뭔지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레오는 조의 말을 듣고 나니 조금 알 것 같다. 주머니 깊숙이 숨어 있던 치즈 조각을 발견하는 것, 커다란 웅덩이에 뛰어드는 것도 행복이라고. 두 친구는 단짝과 함께 연을 날리는 지금 이 순간도 행복임을 깨닫고 기뻐한다.
베스트셀러 『무지개 물고기』로 많은 사랑을 받은 그림책 작가 마르쿠스 피스터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어린이들에게 행복에 관한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조와 레오가 헤아리는 순간들을 통해 행복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며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아이들은 조와 레오가 그랬듯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어른들은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아 더 행복할 것 같다. 과제 때문이긴 했지만 꼬마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던 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내게 행복을 주는 사소한 것을 찾아본다. 회사에서 집이 너무 멀어 수도 없이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맘때면 동네 가득 퍼지는 달달한 아까시나무 꽃향기에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 한약 때문에 가릴 음식이 많지만 커피와 우유 만큼은 마음대로 마셔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여느 때처럼 마감 전날 허겁지겁 서두르는 대신 며칠 일찍 이 글을 쓰고 있는 덕분에 이번 주말은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지금 나에게는 작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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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마르쿠스 피스터 글그림/안온 역 | 파랑새어린이
《무지개 물고기》로 전 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아 온 대표적인 그림책 작가 마르쿠스 피스터의 신작이 파랑새에서 출간되었다. 그동안 아이들의 우정과 용기, 함께하는 삶 등의 주제를 섬세한 이야기 속에 녹여 내며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전해 주었던 마르쿠스 피스터가 이번에는 ‘행복’을 이야기한다. 두 친구의 순수한 마음이 보여 주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통해, 우리 삶의 영원한 테마인 행복에 관한 물음에 화답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빛나는 통찰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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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