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이슈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팟캐스트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에서 개그맨 장동민이 내뱉은 여성 비하 발언이 대중의 비난을 받았는가 하면,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참가한 그룹 위너의 송민호가 한 랩 가사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방송뿐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일명 ‘메갤’)에서는 ‘김치녀’, ‘보슬아치’ 등 ‘여성’을 덧씌우던 혐오 프레임을 그대로 남성에게 씌우는 이른바 ‘미러링’으로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지금, 여기’에서 여성은 어떻게 대상화 되고 있나. S라인, 하얗고 깨끗한 피부, 유행하는 화장법은 물론이고 조신함, 잘 웃는 성격, 분위기를 맞추는 능력 등 ‘여성적’이라고 하는 시선들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게, 뿌리 깊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차별’이니 ‘여자가 부럽다’느니 하는 말들은 또 얼마나 빈번하게 문제를 은폐하고 있는지.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에서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은 ‘메타 젠더주의자’ 정희진은 이에 대해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낡은 새로움이라고 본다”(98쪽)고 말하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는, 성별 이슈에는 ‘과거가 없다’는 인식이다. 누군가 성별 이슈를 꺼낸다면 페미니즘과 관련한 책도 충분히 보지 않고 여성의 역사도 모른 채 자신이 처음 제기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처음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페미니스트’든 모두, 자기 혼자 ‘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선구자 의식과 동시에 피해 의식과 울분을 갖기 쉽다. 여성의 경험은 공유되지 않고 여성의 역사는 전수되지 않기 때문이다.(97쪽)
정희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인식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를 의심해야 합니다.”라고 지적한다.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언어는 없다”(93쪽)는 것이다. 이것을 인지하는 것, 이 무지 상태를 벗는 것이 다음 단계로의 이동을 가능하게 할 사다리가 될 터다. 언어가 권력자의 도구로 사용되어 왔음을 명징하게 인식할 때 비로소 새로운 실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성 개인들의 성장과 행복, 건강을 바”란다는 정희진. 그의 글이 주는 성찰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면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역사”는 전수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가능하고, 우리의 지향점은 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최고의 성장이고, 치유이고, 저항”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여성학과 여성주의는 다르다
얼마 전 <씨네21> 칼럼에서 ‘계급문제’를 ‘성별문제’로 보지 말라고 하셨어요. 대중의 인식 오류, ‘무지’로 인해 선생님께서 겪는 피로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책에서도 물론 그렇고요. (“우리는 언제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같은’ 억압에 반복해서 대응해야 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 나는 이 고통을 거부한다.”(98쪽)) 새로운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시작점에 서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뭘까요? 언제까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무지’는 개인과 공동체의 적극적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계급과 성별과의 관계는 서로 교직(交織)되어 있어, 사실 간단히 말할 수는 없는 이슈죠.
여성의 경험, 역사, 지식이 축적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별 제도가 사회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여성주의 지식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남녀 모두 심지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이들조차 여성주의는 공부하지 않아도 저절로 안다는 인식이 깊습니다. 실은 가장 복잡한 사유가 필요한 영역인데 말이죠. 지식 자체에 위계가 있잖아요. 여성 관련 지식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주변화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사회학에서 가족사회학과 노동사회학의 위상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스스로를 ‘메타 젠더주의자’라고 하십니다. “페미니즘의 사고방식은 모든 인식론의 기본”(94쪽)이라고 하셨고요.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한다는 것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책의 가장 마지막 문장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 같아요. (“‘을’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약한 자가 되어 성실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같은 삶이기를 바란다.”(116쪽))
일단, 여성학(gender studies, feminist studies, woman`s studies)도 매우 여러 가지이고, 여성학과 여성주의는 좀 다르지요. 여성주의는 국문학, 영문학처럼 하나의 분과 학문이 아닙니다. 여성주의는 마르크스주의나 자유주의처럼 하나의 관점, 세계관, 인식론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주의자는 모든 분야에 자기 관점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성별, 계급, 인종 등의 시각에서 중립적인 지식은 없습니다. 여성주의자는 자기 입장을 밝힐 뿐입니다. 여성주의 수학, 여성주의 의학, 여성주의 정신분석, 여성주의 핵물리학도 있습니다. 여성학은 다(多)학제, 간(間)학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국문학 하시는 분들은 일본어, 영어를 다 하시죠. 사회와 무관한 학문은 없기 때문입니다.
대개 여성주의를 ‘여성 문제’, ‘남녀 문제’로 한정합니다. 물론 젠더는 성차별과 성별 이슈를 포함하며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젠더를 사회 구성 원리, 대안적 세계관(‘다른 목소리’)이라고 생각합니다. 젠더를 딛고 젠더를 넘어서(meta) 모든 분야에 여성주의‘적’ 사유 원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성주의는 성별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평화학도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습니다. 기존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서부터 ‘힐링’ 담론까지 모두 평화학이죠. 저는 여성주의 관점의 평화학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제게는 여성학 연구자나 평화학 연구자는 같은 말입니다. 특정 지식 분야를 정체성으로 사고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입니다. 물론 정치적 맥락에 따라 ‘선언’으로서의 의미가 충분히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정체성의 정치는 여성주의의 출발이지 목적이 아니며 극복해야 할 사유입니다.
따로 그리고 같이
어떤 공간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을 보면 서로 아예 다른 기준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이야기 진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여성혐오’라는 주제에 관해서 더욱 그렇죠. 개념 안에 포함된 다양한 결을 따져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에요.
사실, 저는 그런 방식의 ‘논쟁’에는 관심도 없고,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웃음) 논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 논쟁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사회에서는 논쟁을 할 수 있는 기본 전제가 굳건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논쟁’이나 ‘논객’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논쟁, 대화, 토론에 대해 우리 사회는 심각한 오해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처럼 ‘여성혐오’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이 컸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성혐오가 어쨌다구?』와 같은 책도 많이 읽히고 있고요. SNS를 통한 담론의 장이 적극적으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변화의 시작이라고 보시나요?
일단, 성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상황 인식이 변화한 데 비해, 남성들은 어리둥절함과 무지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기득권층(남성)의 (언어)폭력으로 전화될 확률이 크죠. 여성에 대한 혐오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하일 때, 이에 항의하는 움직임(‘남성에 대한 혐오’)은 저항과 분노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체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미디어가 메시지입니다. 오프라인에서라면 불가능한 일들이 많죠. 제2의 자아가 가능한 공간이니까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저는, 이 문제와 별개로 SNS라는 매체 자체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울어진 땅’(107쪽)을 인식하는 감수성은 개인만 노력해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사회 전체가 이른바 ‘민주주의’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지만 우리의 ‘지금, 여기’(97쪽)는 결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비롯된 사람들의 냉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근대성… 이런 개념에서 젠더는 제외되어 있습니다. 구조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구조를 작동시키는 것은 사람입니다. 저는 ‘구조적’ 노력보다 여성 개인들의 성장과 행복, 건강을 바랍니다. 그것이 구조와 개인, 미시와 거시, 일상과 정치의 구분을 깨는 첫걸음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선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로 그리고 같이. 이 두 가지를 전략적으로 구사해야죠. 자신에게 적대적인 상대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상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성역할 규범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여성이 아니라면, 남성의 존재가 크게 인생에 도움이 되는 여성은 많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중년 여성들이 가장 많이 하시죠. 50대 남성이 필요한 세 가지는 아내, 와이프, 마누라. 50대 여성이 필요한 세 가지는 딸, 돈, 개라고 하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를 의심해야
‘표현이 자유’라는 오해에 대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권력자의 도구’(104쪽)라고까지 말씀하셨어요. ‘표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자신의 언어가 있는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것이 언제까지나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가 모든 권력관계의 핵심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운동은 그 언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지요. 이 역시, 제 말이 아니라 파농의 말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인식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를 의심해야 합니다. 흔히 이런 것을 인문학이라고 하지요. 사회적 약속으로 언어는 언제나 과도적이고 임의적이며 매복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지식인’은 그것을 좀 더 예민하게 인식하는 사람 아닐까요? 따라서 지식인의 조건은 ‘지식(정보)’이 아니라 윤리와 감수성이죠.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다시’, 꾸준히 발언하게 되는 데에는 책임감도 있으시겠죠? 혹은 최소한 ‘어떤 역할을 했으면 한다’는 선생님 자신의 의도가 있으신지 들려주세요.
저는 그저 자기 삶에 충실하고 싶은, 성실하고 싶은 개인일 뿐입니다. 저는 ‘건강 약자’입니다. 제 문제로 우리 사회와 저항하기에도 힘겨운 사람입니다. 제가 해야만 하는 어떤 역할이 있다는 그런 생각, 전혀 없습니다. 애초부터 저는 그런 자아를 아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명감? 이건 더욱 당황스럽습니다. 시민의 상식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사명’이나 ‘책임감’, ‘나는 누구이므로 이래야 한다’라는 것은 굉장히 숙고해야 할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자면, 여성들은 역할을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데, 기왕이면 (편하게 역할을) 안 하고 욕먹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제 막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그 역사성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공부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공부’하세요, 인생에서 남는 것은 공부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최고의 성장이고, 치유이고,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
윤보라,임옥희,정희진,시우,루인,나라 공저 |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이 책은 최근 인터넷과 방송을 매개로 촉발된 혐오 전쟁부터, 대학 캠퍼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차별 논쟁,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 들 안에 잠재된 혐오, 사회 지배적인 혐오를 내재한 자기혐오 등 다양한 혐오의 얼굴들을 드러낸다. 그러는 동안 혐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혐오의 대상은 누구인지, 혐오라는 강렬한 감정의 기능과 효과는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혐오로부터 나아갈 수 있는지를 묻고 답한다. ‘여성 혐오’를 입구 삼아 우리가 진정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혐오 사회’의 민낯이다.
[추천 기사]
- 조훈현 “문제는 재주가 아니라 인품”
- 성신제 “피자헛에서 지지스 컵케이크까지, 왜 도전했나”
- 김중혁 “픽션이 너와 함께하기를”
- 스타강사 유수연 “지금의 20대는 사슴 같아요”
- 만화가 허영만 “나에게 커피란, 사랑할 수 없는 여인”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