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정운영의 선집 『시선』을 향한 언론의 관심이 뜨겁다. 마르크스 경제학자, 경제평론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좌우를 막론한 최고의 논객이자 당대의 문장가로 호명되었던 정운영. 『시선』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꺼내진 선집이다. 지난 9월 2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시선』 출간 기념회가 열렸다. 정운영을 그리워하는 선,후배, 동료 1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고(故) 정운영의 10주기 추모식과 겸해 진행됐다. 고인의 생전 영상 상영을 시작으로 소리꾼 장사익의 「봄날은 간다」가 선창됐고, 참석자들은 정운영의 문장과 생을 추억했다.
경제학자 정운영(왼쪽)과 『시선』 을 펴낸 김병준 생각의힘 대표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운영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고 『시선』에 실린 글들은 그 이전의 칼럼에서 모은 것입니다. 꽤 긴 세월이 지난 글들인데 오늘의 독자들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난 9월 23일 『시선』 출간기념회가 있었습니다. 차가 너무 막혀 멀리서 내려 걸어가면서 보니 “노동개혁(개악) 저지를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는 10년이 되었고, <시선>의 글들은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쓰여졌지만, 선생님의 시선이 착목했던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 같습니다. ‘87년 체제’가 드러낸 문제들은 물론 최근의 과도한 보수 회귀 흐름 속에 정치ㆍ사회적 의제들이 역진하는 모습은 오히려 선생님의 문제의식과 비판을 여전히 유효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나아가 선생님의 글이 이렇게 긴 여운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의 글이 인간적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원 선풍에 가슴 졸이는 가장의 처지를 위로한다던지(‘망년의 자격’), 3,000년 전의 오디세우스보다 한층 더 기구하고 처절한 실화가 우리 주변에 허다하다며 이산가족의 한을 풀어주라고 주문하는(‘오디세이 2000’)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려집니다. 『시선』에 싣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은 한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신 바 있습니다.
“사회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가 한 치의 회의 없이 복무를 요청하는 이론과 강철 같은 실천의 대의에 공감하면서도, 자꾸 축축한 가슴을 지닌 이웃들과 사람의 냄새를 맡으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목마름처럼 간절하게 피어 오르는 내밀한 사정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대표님이 정운영 선생님의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스승으로서의 정운영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선생님의 강의를 몇 과목 수강한 것뿐인데, ‘제자’라고 하기에는 좀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에 예나 지금이나 몇 명 되는 않는 마르크스 경제학자 중 한 분이셨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벨기에 루뱅대학교로 유학을 가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 논문을 읽지도 않았고 평가할 주제도 안됩니다만, 많은 전공자들이 쓰여진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훌륭한 논문이라고 평가하던 것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강의 시간에는 정말이지 화려한 지식을 줄줄 쏟아 놓으셨습니다. 당시 그간 금서로 묶여 있던 마르크스주의 서적이 엄청나게 많이 출판되고 있었는데, 그런 책들에서도 쉽게 접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격의 없이 대해주셨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엄격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나서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하더라도 진보적 선생님이시니 학점 잘 주시겠지 하는 은근한 기대를 하곤 했는데요. 그러다가 선생님께 F 학점을 받고 낭패를 본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언뜻 회한을 드러내시는 경우를 목격하기도 했는데요. 선생님은 한신대에 부임하셨다가 학내 민주화에 연루되어 해직되신 후에는 학교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갖지 못하셨습니다. 여러 학교에서 강사로 강의는 오래 하셨습니다만, 아무래도 연구에 전념하실 환경이 갖춰지지 않다 보니 그에 대한 아픔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다독가이자 애서가로도 유명합니다. 당시에 선생님 댁에 갔다온 친구들에 따르면 화장실 같은 곳을 제외한 온 벽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서가의 책들은 크기가 다르다 보니 울퉁불퉁 튀어나온 책들도 있기 마련인데 책들이 줄을 맞춰 나란히 꽂혀 있었으며, 책들 위에는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달력을 오려 덮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아끼시던 장서가 2만 권 정도 됩니다. 생전에는 가장 아끼시던 후배인 윤소영 교수에게 주시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돌아가신 후에는 서울대 도서관에 기증하셨습니다.
정운영 선생님의 강의실엔 늘 뜨거운 열정과 토론이 가득했다고 하는데요. 강의실 풍경이나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88년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넘쳐나던 때였습니다. 대학원에서 전공하려는 사람들도 많았고, 학부생들도 대부분 한두 과목 정도는 기본적으로 수강하던 분위기였습니다. 심지어 타 대학 친구들도 청강하러 오기도 했었어요. 이렇게 수요는 많았는데, 강의를 해줄 수 있는 분들은 김수행 선생님과 정운영 선생님을 비롯해 몇 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형 강의실에서 수업을 해도 자리가 없어 복도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학생도 많았죠.
정운영 선생님의 수업에서는 인상적인 일들이 많았습니다. 수업 시간 중에 학생들이 선생님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요. 논쟁하는 학생들 중에는 토론이라기보다 자기주장을 반복하기만 해서 선생님이 화가 나신 나머지 분필을 그 학생에게 던지시면서 강의실 밖으로 내쫓으신 적도 있었습니다. 또 주로 토론이 이루어지거나 할 때 담배를 피우시는 경우도 있었는데, 학생들에게도 같이 담배를 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선생 앞에서 학생이 맞담배를 핀다는 의미에서, 지금으로서는 건물 내 흡연이 금지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예나 지금이나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시선』은 선집인데요. 어떤 방식으로 글을 선정하였는지요?
사실 글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우선 글이 쓰인 당시의 상황에 너무 부각되는 글들을 제외했습니다. 가령 경제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때 당시의 통계 수치 등이 너무 많이 나와 있는 글들은 독자들의 흥미를 반감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뺐습니다.
주제도 다양하게 포괄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글들을 추려 ‘시간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1부에 배치하고, “경제학의 소명은 하늘의 일이 아니라 땅 위의 일을 걱정하는 것”이라던 선생님의 ‘저 낮은 경제학’을 2부로 했습니다. 3부에서는 ‘세상의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산문들을 엮었고, 4부 ‘사람 읽기’에는 정치가, 경제학자를 비롯해 ‘저항의 봄’을 잃어버린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담았으며, 5부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다독가였던 저자의 서평과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복거일과의 자유주의 논쟁의 일부를 담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저자는 한 사람이지만 글들은 1985년부터 2005년까지 20년에 걸쳐 쓰였다는 문제였습니다. 20년의 세월 동안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요. 정운영 선생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1990년에 쓰인 글과 2005년에 쓰인 글은 문체도 틀리고 느낌도 다릅니다. 선집에 어떤 글이 수록되느냐에 따라 후대에 기억되는 ‘정운영’이 달라질 우려가 있는 것이지요. 결국 선생님을 가장 잘 아시는 지인 몇 분의 자문을 받으며 선생님의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글들을 뽑되, 특정 시기에 편중되지 않도록 조율을 했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선별을 하다 보니 멋진 문장들이 번뜩이는 많은 글들을 부득이 제외해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독자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제호와 추천사를 신영복 선생님이 써주셨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과 저자 사이에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하는데 소개 부탁 드립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서울대 경제학과 59학번이시고, 정운영 선생님은 같은 과 64학번으로 선후배 관계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4.19와 5.16을 겪으면서 경제학과의 진보적 서클이었던 경우회, 상과대학(경제학과가 소속된 단과대학) 신문 등의 활동을 하셨고, 경우회에서는 후배들에게 세미나 지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1993년에 나온 계간지 <이론>에는 두 분 간의 대담이 실려 있는데, 정운영 선생님이 신영복 선생님께 “선생님이 중심이 되었던 당시의 그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제법 출세를 했을 텐데요”라며 농담조로 투정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셨으면 하는지요?
사실 제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시선』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과거에 선생님의 책과 칼럼을 대부분 읽었던 분들도 『시선』을 다시 구입하여 읽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의 글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정운영 선생님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이 책을 많이 보셨으면 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추천사처럼 “그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가장 고통 받고 계시는 분들, 특히 젊은이들, 학생들이 선생님의 글과 사상을 새로이 접하면서 작은 희망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저세상에 계신 선생님께서도 흡족해 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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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정운영 저 | 생각의힘
마르크스 경제학자, 경제평론가,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좌우를 막론한 최고의 논객이자 당대의 문장가로 호명되었던 정운영을 오늘 다시 만난다!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에 펴내는 선집으로, 첫 번째 칼럼집 『광대의 경제학』(1989)에서부터 마지막 칼럼집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2006)까지 모두 아홉 권의 칼럼집에서 저자의 사상을 잘 반영하면서도 여전히 시의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글들을 가려 뽑은 것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포괄하는 르네상스적 비판정신과 곡조 있는 글쓰기의 정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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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koko111
201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