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책] 끝까지 읽게 되는 이상한 사전들
대학 시절 은사께서 여러 권으로 계획하셨던 책의 첫 권만 쓰신 후에 돌아가셨다. 우선 슬펐고, 그 다음엔 억울해서 엉엉 울었다. 다음 권을 이제 영원히 읽을 수 없게 됐다는 생각에 아득했던 것이다. 저술가의 부고란 독자에겐 출간 취소 도서 목록과 같다. 움베르토 에코의 부고를 읽고 재작년 세상을 떠난 남경태를 떠올렸다. 한 주제에 대해서 여러 권을 모아 읽는 것은 성격 때문이라기보다는 직업병인 것 같다.
글ㆍ사진 이금주(서점 직원)
201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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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만 뽑으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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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 사전』

남경태 저 | 휴머니스트

 

고작 53세에 세상을 떠난 남경태는 30여 년 동안 106권의 책을 번역했고 39권의 책을 썼다. 예스24에는 개정판을 포함해서 200권의 도서가 등록돼있다. 그의 책은 50여 개 출판사에서 출간됐고, 역사와 인문, 서양철학, 예술은 물론 경제 경영, 어린이, 청소년, 자연과학, 종교, 국내외 문학 등 13개 분야에 걸쳐있다. 20년 더 책을 만들었다면 적어도 15권을 더 쓰고 50권을 옮겼을 것이다. 남경태의 부고는 60여 권의 교양, 즐거움이 출간 취소됐다는 소식이었던 셈이다.

 

워낙 다양한 책을 집필했기 때문에 하나를 뽑기가 힘들지만, 흔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종횡무진 시리즈’이다. 『종횡무진 한국사 1, 2권』, 『종횡무진 동양사』, 『종횡무진 서양사 1, 2권』, 다섯 권으로 이뤄진 시리즈이다. 역사와 철학 분야에서 특히 긴 도서 목록을 가지고 있는데, 『모든 길은 로마로』, 『전쟁이야기』,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 『공산당 선언』, 『페다고지』, 『비잔티움 연대기』, 『바이블 키워드』 등이다. (‘등’이라고 얼버무릴 수 없는 책이 많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줄인다. 검색해보시길….)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들도 쓰고 옮겼다. 『교양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과학사/세계역사』, 『켈트족이 꿈틀꿈틀』, 『고려가 고마워요』 같은 제목이 눈에 띈다. 『성공한 스포츠 스타들의 특별한 말 말 말』, 『이야기 서양 고사성어』 『고대 세계의 70가지 미스터리』, 『명화의 비밀』, 『셜록 홈즈의 실마리』처럼 제목부터 재미있는 독서를 염두에 둔 책들도 여러 권이다.

 

다른 사람이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을 펴냈다면, 과대망상 환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개념어 사전』에는 전공자들이 수 년 간 붙잡고 씨름하는 단어들로 가득하다. 가치, 국가, 기호, 노동, 모순, 물자체, 변증법, 불확정성 원리, 삼위일체, 소외, 실존, 오리엔탈리즘, 진화론, 텍스트/콘텍스트, 패러다임, 혁명, 형이상학….. 그의 대표작은 『개념어 사전』이라고 생각한다. 남경태만 쓸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저자 스스로는 사전을 이렇게 정의했다. “사전은 수많은 정의로 이루어진 책이다. 그런 만큼 사전에 나오는 정의는 매우 엄정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전은 무수한 의미를 정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수한 의미를 누락시킨다. 정의의 배후에는 배제가 있다.” 또,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 사전은 편향적이고 주관적’이라고 밝혔다. 애초에 여러 명의 인원이 ‘편찬’해야 하는 사전을 혼자서 정리한 것은 확실히 무모하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무릅써준 덕분에 독자는 수많은 사상과 사실이 가장 간결하게 정리돼있어 읽는 재미로 가득한 책을 한 권 얻었다.

 

가나다 순서의 사전 형태로 구성돼있기 때문에 읽는 방식은 독자에게 달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수도 있고, 목차를 찾아서 단락별로 살펴볼 수 있다. 내가 권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다. 그리고, 밑줄을 긋거나 메모할 수 있는 펜을 미리 찾아둘 것을 권한다. 실타래처럼 얽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개념’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간단히 정리한 구절 구절을 읽을 때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내가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던 곳들은 이런 대목이었다.

 

 

권력


지식이 권력을 낳는 경우는 특히 전문 지식의 영역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법원과 병원에서 흔히 보는 사례다. 판사는 법에 관련된 지식에만 전문가이고 의사는 신체와 관련해서만 전문가임에도 피의자나 환자를 상대할 때 모든 방면을 두루 아는 것처럼 처신하면서 도덕적으로 훈계하려 한다. 이런 아이러니를 풍자하는 퀴즈가 있다. 의사가 라틴어로 처방전을 써주고, 약사가 약을 굳이 갈아주는 이유는 뭘까? 답 : 환자의 증상이 실은 가벼운 감기라는 것을 환자가 알지 못하도록 하고, 약사가 준 약이 실은 아스피린이라는 것을 모르도록 하기 위해서.

 

도道


화두를 읽고 대번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여긴다면 필경 화두를 장식하는 역설적인 표현의 매력에 속아 넘어간 탓이다. 모든 역설은 정설이 있기에 존대한다. 도는 ‘일단’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이름은 ‘일단’ 부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써야 더 정확해진다. “말할 수 있는 도도 있지만 영원한 도는 굳이 말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부를 수 있는 이름도 물론 좋은 이름이지만 진짜 영원한 이름은 부를 수 있거나 없는 것과 무관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평이해서 재미가 없고 듣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어렵다. 결국 화두는 깨달음을 위장한 수사에 불과한 걸까?

 

사실주의

 

비슷한 시기 독일의 철학자 후설은 유럽 학문의 위기를 초래한 실증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객관성을 무기로 내세운 실증주의가 ‘사진’이라면 후설은 철학상의 ‘인상주의자’다. 사진이 가져온 미술의 위기를 인상주의로 극복했다면, 실증주의가 가져온 철학의 위기를 후설의 현상학이 극복했다. 그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부분일 뿐이다. 전체는 그 자체로 파악되는 게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속에서 종합되어 생겨난 현상이다.

 

텍스트/콘텍스트

 

니체는 진리를 묻지 말고 누가 진리를 말하느냐를 물으라고 말했다. 진리, 정의, 행복, 도덕 같은 개념들은 텍스트상으로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다만 그 개념들을 구사하는 측의 의도가 불순할 경우 ?니체식으로 말하면 ‘권력’에 의해 굴절된 경우- 텍스트에만 주목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다. 1980년대 초 신군부의 5공화국 정권은 ‘정의 사회 구현’을 구호로 내걸었다. 이것도 텍스트는 나무랄 데 없다. 다만 그 ‘정의 사회’라는 텍스트를 누가 정의(定義)하느냐, 즉 콘텍스트가 문제될 뿐이다. 그런데도 당시 대다수 언론들은 의도적이었는지 무지한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텍스트에만 주목하고 콘텍스트에는 눈을 감았다.

 


한 권만 뽑으라면….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A.J.제이콥스 저/표정훈,김명남 공역 | 김영사

제이콥스는 아마 논픽션 분야에서 '예능감'이 가장 좋은 작가일 것이다. 브라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에스콰이어> 편집자로 일하면서 '한다면 한다'류의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곤 한다. 그의 책은 모두 이 임무를 성실히 (정말 성실히) 수행한 기록들이다. 최근에 출간된 건강하기 위해 몸부림친 700일 프로젝트를 포함해서 '성경 말씀대로 살아보기 1년'이 모두 책으로 나왔다. 32권 3만 3천여 쪽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끝까지 읽는 것은 이런 예능 글쓰기의 시작점이면서 세상에 예능감을 소개한 계기가 됐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라고 읽기 시작해도 괜찮다. 덕분에 마지막 항목 지비에츠(Zywiec)까지 읽으면 무척 똑똑해진 느낌이 들 것이다. 훑어보든 넘겨보든 브리태니커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저 | 알마

1996년에 출간된 고종석의 사랑 어휘 사전이다. 사실 2009년에 『어루만지다』라는 제목으로 이 책의 후속작이 출간됐다. 『어루만지다』보다는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을 추천한다. 더 사랑스러운 단어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때의 풋글쓰기가 사랑엔 더 어울린다. 사랑 어휘 사전이 하는 일은 두 가지이다. 떠돌고 있는 사랑의 말을 발굴하는 일과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이나 감정을 독자가 공감하도록 하는 일이다. 두 가지 모두 계획 세우고 규격 맞춰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순간 지나가는 어렴풋한 것을 붙잡는다. 이렇게 말이다. "함치르르 고르게 윤이 있고 고운 모양. 함치르르한 검은 머리는 매초롬한 몸매와 함께 섹시함의 보수적 기준이다."

 

* 이 기사는 <월간 채널예스> 3월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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