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9.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후기의 첫 단락이었다.
“이 책에 담긴 일련의 원고를 언제쯤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확실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오륙 년 전이었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이렇게 소설가로서 소설을 써나가는 상황에 대해, 한자리에 정리해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예전부터 있어서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 그런 글을 조금씩 단편적으로 테마별로 써서 모아두었다. 즉 이건 출판사에서 의뢰를 받아 쓴 글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말하자면 나 자신을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다.(329쪽)”
고작 작가 생활을 시작한 지 6년째에 불과한데, 어느새 자발적으로 글을 쓰지 않는 내 모습에 37년 차 작가는 경종을 울렸다. 성실함이 최고의 재능이라는 것에는 이견을 제기할 수 없으며, 열정이 최고의 스승이라는 것에도 이견을 제기할 수 없다.
나의 열정은 어디에서 되찾을 수 있을까.
이미 예전에 식어버린 게 아닐까.
아내가 연재중인 내 소설에 ‘다음회가 기대되네요’라는 같은 메시지를 3주째 기계적으로 달고 있다.
때론 댓글이 식어버린 열정을 냉동시켜버리기도 한다.
4. 30.
아내가 열정이 식어버린 나를 격려하기 위해 내가 수상한 문학상 트로피 두 개를 TV 선반대에 올려 놓았다.
“이런 걸 전면적으로 드러내면 낯뜨겁단 말이야. 누가 집에 오기라도 하면 어떡해.”
항변에 아내는 답했다.
“힘을 내라는 의미로 꺼내 놓았어요.”
나는 좀 더 솔직하게 내심을 드러냈다.
“이런 물건보다, 독자들의 성원과 판매에 힘을 얻는다고!”
실제로 요즘은 판매가 너무 부진하고, 연재물에 댓글이 전혀 없어 풀이 잔뜩 꺾인 상태다. (지난회 ‘절도일기’에도 댓글이 없었다. 2주간 전혀 없다.)
그러자 아내가 “그러니까”라고 운을 띠운 뒤, 연재중인 내 소설의 대사를 인용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격려는 냉동된 열정마저 산산히 분해시킨다.
5. 3.
언제부터 소설을 쓰는 게 지루한 일이 돼버렸을까. 이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조금 말해보고자 한다. 사실, 나에게 소설을 쓰는 건 너무 빤한 일을 하는 것이다. 작가는 언제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작가는 복선이 어떻게 수습될 것인지 알고 있으니까, 작가는 헤어졌던 인물들이 어디서 어찌 재회할 것인지 알고 있으니까, 때론 소설을 쓰는 게 너무나 지루하다.
그러나 소설을 처음 쓰는 사람에게는 흥미로울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문장이라는 새로운 도구로 하나씩 풀어내는 건 지적흥분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를 몇 년 째 매일 하는 사람에게는 속이 터지는 일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소설(과 영화 역시) 첫 장(章, Chapter)이나 몇 페이지(심할 경우에는 책 뒤편의 소개글)만 보아도 대략의 스토리를 짐작할 수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혹은 보면 볼수록) 내가 예상한 스토리 대로 전개된다는 것을 확인만 할 뿐이다.
이 경우 작가인 독자(겸 관객)이 즐거움을 얻는 대목은 바로 ‘자신이 예상한 스토리와 실제 스토리의 오차가 과연 얼마인가(5%인가 10%인가 하는 차이. 15%이상이 되면 걸작이다!)’ 하는 것과, ‘비록 예상된 스토리이지만, 그것이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는가(실은 방식까지 예상을 하게 되는데, 이 방식이 작가 겸 독자의 예상과 다를수록 독서는 흥미로워진다)’ 하는 점과, 마지막으로는 이 스토리와 전개방식이 빤한 서사를 ‘어떠한 문장과 어떠한 장면으로 구축했느냐’는 것이다. 즉, 문장과 그 문장안에 담긴 단어, 대사, 장면 안에 쓰인 색감, 미장센, 따위에 ‘그나마 흥미’를 느끼며 보게 되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작가에게 재미있는 소설은 지구상의 모든 책을 통틀어 찾아도 고작 17평 아파트의 서재를 채울 수 없다. 하여, 글을 쓸수록, 서재의 책이 주는 기현상이 일어난다(책을 계속 버리게 된다). 터프하게 말해, 이러한 속사정 탓에 초기의 열정을 차츰 잃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열정의 회복을 위해선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이런 마음을 이미 통감한 바 있는 37년차 소설가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을 쓴다는 건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작업인 것 같습니다. (중략, 이하 …) 너무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置換해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 이건 상당히 멀리 에둘러 가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 소설이라는 형태로 전환하자면 반년씩이나 걸리는 메시지나 개념도 그걸 그대로 직접 표현하면 단 사흘 만에 언어화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마이크를 향해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린다면 단 10분이면 끝날지도 모릅니다.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은 물론 그런 것도 가능합니다. 듣는 사람도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그런 게 바로 머리가 좋다는 것이니까. (20~21쪽)”
더 이상의 자세한 인용은 생략한다.
함께 침이 섞인 밥그릇을 쓰고, 같은 변기에 엉덩이 살을 대고 살아가는 사람이 건네는 과학적인 격려가 아니라, 일본에서 지진의 공포에 떨며 살아가는 70대 노인의 자학에서 위로를 받을 줄이야. 그러니까, 나의 열정이 식은 것은 내가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번 회에는 마침내 댓글이 달릴 것 같다. 비난의 댓글이.
5.10.
매주 연재하는 소설의 새 에피소드가 방금 업데이트 됐다.
아내가 댓글을 달기도 귀찮다며, 읽지도 않고 별 점 10점을 눌렀다.
때로 비현실적인 고평점은 분해된 열정마저 원자화(原子化)시켜버린다.
[추천 기사]
- 오직 영국을 위해 열정을 쏟은 처녀 여왕
- 우리의 노년이 안녕하기를
- 직장이 아닌 직업을 만들기 위해
- 오쿠다 히데오, 포스트 하루키 세대를 이끄는 소설가
- 미남에다 센스 있는 대표의 잡지 추천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myhalcyon
2016.07.27
작가님!! 예스24 컬럼 담당자에게 큰소리치셔도 될 듯. 이 댓글 하나 달기 위해 휴면계정까지 풀었습니다. 아이디, 비번까지 모두 잊어서 찾느라 고생 격하게 했네요. 마지막 구입이 음.. 2007년이더군요. 지니램프로 옮겨간 지 어언 십년이 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ㅋ
우연히 이런 저런 글에 낚이고 낚여 작가님 컬럼까지 찾아 읽게 됐어요.
며칠째 누군가의 응답을 저 또한 목이 꺾여라 기다리는 중이라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휴면계정 풀고! 로긴하고! 댓글까지 답니다! 훗.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따라 읽고 있을 거예요.
아마도 저처럼 휴면계정 풀고 다시 로그인하는 것이
이 무더운 여름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라 즐겁게 읽고 넘기는 것이겠죠. ㅋㅋ
건필하세요~! 위트& 재기 넘치는 글들 즐독하고 갑니다. ^^
achim55
2016.06.18
제기동 모모 한의원 채 아무개 입니다..
ㅎㅎㅎ
이 글을 읽고 나도 댓글 한번 달아 보는데..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여튼 조용한 독자도 많다는 것을 기억 하시고..
지나는 길이라도 한번 오셔용.. ㅎㅎ
(이런 댓글 달아도 되나 모르겟어요... ??? )
silversea7
2016.05.13
전 작가님 글 정말 좋아해서, "청춘,방황, 그리고 눈물과 좌절 대서사시" 그 에세이 여태까지 제 지인 5명한테 각각 사서 선물했어요 ^^ (진짜입니다 -저까지 총 6권 구매)
블로그 글도 너무 잘 읽었구요 (특히 전복이야기, 리바이스 청바지 이야기는 정말 포복절도 그러다가 대선후 달리기 이야기에서는 눈물 글썽....) 제 아내가 작가님 같은 남자 옆에 있으면 좋아했을것 같다는 얘기도 했었던 걸요 (참고로 제 아내 눈 높습니다 ^^)
늘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기운 내세요!! (참고로 시와 바람의 "오빠 믿어"도 잘들었어요~)
써놓고 보니 넘 도배느낌이지만 전 작가님과 아무런 이해관계/연고가 없는 사람입니다.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