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내버려 두면 참 예쁘게 살 사람인데
일상의 작은 폭력, 한 두 개만 줄여도 우리는 예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글ㆍ사진 엄지혜
201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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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성악설이지만 마음은 늘 성선설이다. “다 그런 거지, 기대하지마, 사람 마음이 네 맘 같지 않다니까, 제발 좀 기대를 좀 버려.” 이런 말을 끊임없이 들어도 난 여전히 성선설을 믿는다.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사람을 볼 때도 그렇다. 줄곧 단점만 보이다가 얼핏 장점이 비쳐지면, 그 장점에 목맨다. ‘그래, 이 사람도 이런 장점이 있으니까 좀 봐주자. 뭐 나름대로 상황이 있겠지. 입장이 있겠지. 100점 만점에 60점이면 괜찮아. 나는 뭐 항상 평균치인가? 커트라인이나 잘 넘어보자’고 생각한다.

 

현충일이 하루 지난 6월 7일, 김려령의 신간 소설집 『샹들리에』가 출간됐다. 내가 ‘어떤 내용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읽는 거의 유일무이한 작가다. 책에는 ‘첫 소설집’이라는 띠지가 달려있었다. 그의 첫 단편소설집에는 7개 작품이 수록됐는데 그 중 3개 작품(「그녀」, 「만두」, 「파란 아이」)은 각각 2008년, 2011년, 2013년에 이미 발표한 소설이다. 호흡이 짧은 단편 소설은 출퇴근길에 읽기 제격이다. 이상하게도 김려령 작가의 책들은 모두 지하철에서 읽었다. 추리소설도 아닌데, 손을 놓기 어려워 환승을 하면서도 책을 든 채였다. 작가의 전작 『너를 봤어』, 『트렁크』가 특히 그랬다. 이번 작품도 다르지 않았다. 읽으면서 찌릿했다. 절절하지 않고 찌릿했다.

 

김려령은 항상 폭력에 집중하면서 사랑을 말한다. 배경은 매우 일상적이다. 인물은 대개 평범하다. 공통점이 있다면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참 예쁘게 살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샹들리에』를 읽으면서 나는 작가가 과거에 한 말이 또 한 번 떠올랐다. 

 

“가만히 보면 참 예쁘게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이나 어떤 행위들로 힘들어지고 망가지는 모습을 볼 때 안쓰러웠어요. 한 사람만 놓고 봤을 때, 건드리지 않으면 자기 할 일 하면서 잘 살 사람인데 옆에서 건드려서 망쳐버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너를 봤어』 출간 후 기자간담회에서

 

항상 그런 게 있어요. 동화를 쓸 때도 성인소설을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가만히 뒀으면 현재보다 더 예쁘게 살아갔을 사람인데, 왜 그럴까’ 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훈수사회? 어떤 경우에서도 한 마디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대의가 확실해서 반박할 수는 없는데, 그 소리를 듣는 당사자는 속으로 무너지는 거예요. 현학적인 말들을 끊임없이 해대니까. 장기를 둘 때 꼭 옆에서 한 마디를 하면서 끼어들면 되게 밉잖아요. ‘아, 저런 말 하고 싶을 때, 한 번만 참으면 되는데’ 그런 생각들이 저한테는 항상 있었어요.”

『트렁크』 출간 후 인터뷰에서

 

『샹들리에』에도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참 예쁘게 살’ 사람이 등장한다. 4번째 수록작 「아는 사람」의 주인공 ‘나’는 그룹과외를 함께 받던 남학생에게 고백을 받은 후 성폭행을 당한다. 주인공은 상대의 호감에 “너 내 스타일 아냐”라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지만, 그녀를 찾아온 건 수면 유도제였다. 주인공과 함께 과외를 받았던 여학생들은 이미 범죄의 대상이 된 후 과외를 나오지 않고 있었다. 주인공만 몰랐을 뿐이다. (“내가 너에 대해 뭘 안다고 자꾸 너도 알다시피, 라고 하지? 아는 사람이 이토록 무서울 줄 몰랐다.” 101쪽) 사건 현장에서 벗어난 주인공은 곧장 경찰서에 가해자를 신고하고 혼잣말을 한다. “너는 끝났지? 나는 시작이다.”

 

 

「만두」의 주인공 ‘미주’는 장터 만둣국집 딸이다. 어릴 적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미주는 만둣국을 파는 엄마 때문에 ‘만두’로 불린다. 미주의 아빠는 휠체어를 끄는 박 씨를 구하다 세상을 떠났고, 이후 박 씨는 미주네 장사를 돕는다. 소설은 미주가 엄마랑 한바탕 싸우면서 시작된다. 한 손님이 미주 엄마에게 “두 분 참 잘 어울려요. 힘내세요”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미주는 이 말 속에 숨긴 말을 읽어내고 애꿎은 엄마에게 화를 낸다. (“장터 만둣국집 여자와 장애인 남자. 그래, 당신 눈에는 이래야 어울려 보이지? 끼리끼리. 씨발, 그걸 덕담이라고. 도대체 뭘 힘내라는 건데? -131쪽)

 

가만히 내버려 두면 참 예쁘게 살 소녀들에게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소설을 읽고 있는데 지금 내 눈앞의 현실이 보여 마음이 무거웠다. 다행스러운 건, 작가의 시선이었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했던 말을 작가는 여전히 속삭이고 있었다. “너 아주 귀한 애야, 알고 있니?”

 

『샹들리에』를 다 읽을 무렵, 나는 또 하나의 책을 들었다. 6월 7일, 같은 날 출간된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누구는 ‘여성혐오 살인 사건’이라고 부르고 누구는 ‘묻지마 살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2016년 5월 17일 새벽 1시, 서울 서초동의 상가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된 사건을 애도하는 1004개 포스트잇을 채록한 책이다.

 

두 책을 연이어 읽으면서 나는 『샹들리에』 속 인물들을 또 한 번 만났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참 예쁘게 살 사람, 절대 타인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사람, 일상의 폭력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그래도 희망을 보는 사람. 「아는 사람」에서 주인공은 말했다. “그래도 살아 나왔으니 다행이라 여기며 오늘이 망각될 날을 기다리며 그렇게 살아야 할까. 나만 당한 것이 아니라는 억지 위로를 품고 모르는 척 숨죽여 살아야 할까. 엄마는, 아빠는 내게 어떤 조언을 해 줄까. 가만히 있으라고 할까.” 지금의 우리가 보였다. 소설보다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현실. 두 책을 같이 보게 되어 다행스러웠고 고마웠다. 폭력은 먼 곳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애도하기 전에 싸워야 한다.

 

“내 친구였을지도, 동생이나 언니였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은 별거 아닌 듯 얘기하는 걸까요.”

“무고한 사람이 조심할 필요 없는 사회를 바랍니다.”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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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들리에 김려령 저 | 창비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 같고 우리 자신과도 닮아 있다. 작가는 ‘지금 여기’ 가장 평범한 삶의 모습을 정직하게 묘파해 내며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일상, 보잘것없는 순간 속에서도 웃고 울고 다시 사랑하게 하는 힘, 오직 작가 김려령만이 전할 수 있는 에너지가 가득한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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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획 | 나무연필
사건 다음 날부터 그녀가 살해된 곳 인근의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포스트잇 추모’가 시작되었다. 출구의 외벽은 이 사건과 관련한 글이 담긴 포스트잇으로 뒤덮였고, 화환도 줄을 이었다. 서울 한복판의 강남역 10번 출구는 그렇게 피해자를 추모하면서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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