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인상주의로 파리를 색칠하다
르누아르와 함께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모네의 그림에는 화려하고 밝은 자연이 담겨 있다. 그러나 모네의 성품은 그리 밝지 못했다. 우울증과 심한 눈병이 그를 괴롭혔다.
글ㆍ사진 마리나 볼만멘델스존
201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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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를 탄생시키다


이른 아침의 짙은 안개 사이로 돛대와 기중기 실루엣이 아련히 드러난다. 앞쪽에는 세 척의 노 젓는 배가 유령처럼 푸른 보라색 물 위에 떠 있고, 떠오르는 태양의 오렌지 빛이 바다를 비춘다. 클로드 모네는 노르망디 르아브르의 한 호텔 방 창가에 이젤을 세우고 항구의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을 르누아르, 폴 세잔, 에드가 드가의 그림들과 함께 공식적인 파리 미술 전람회 ‘보자르 살롱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심사위원단은 그 그림들을 전시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프랑스 사진작가 나다르는 화가들에게 1874년 4월 카퓌신 거리 35번지에 있는 자기 집에서 그 작품들을 전시하자고 제안했다. 카탈로그도 제작했다. 나다르는 모네에게 전시를 위해 항구 그림에 제목을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모네는 자신의 추상적인 회화 방식을 고려할 때 ‘항구의 풍경’이라는 제목을 붙일 경우 대중의 비판이 우려된다며 즉흥적인 결론을 내렸다. “인상이라고 이름 붙입시다.” <인상-일출>, 클로드 모네는 1872년에 그린 작품에 이런 제목을 붙였고, 그것이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낳았다.


인상주의 시대의 파리는 대형 공사 현장이었다. 급속한 산업화, 실업, 빈곤, 거기에 인구까지 폭증했다.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 같은 분위기였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파리를 대대적으로 개조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러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황제는 오스만 남작에게 중세의 모습 그대로인 파리를 최초의 현대적 대도시로 탈바꿈시키라고 지시했다. 1860년대에서 1900년까지는 파리가 새로운 도시로 재탄생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회화도 무럭무럭 자라난 시기였다. 모네를 필두로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신을 파리와 하나라고 느꼈다. 그래서 아틀리에의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가 파리의 다채로운 모습을 관찰했다.


클로드 모네는 당시의 화가라면 누구나 겪었을 고난과 고통을 피해가지 못했다. 지속되는 가난, 가족과의 불화, 몇 번의 러브 스토리, 그리고 그 끝은 모델 카미유와의 결혼이었다. 1870~1871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자 모네는 징집을 피해 런던으로 달아났다. 1871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후부터는 차츰 형편이 풀리기 시작했다. 르아브르에서 식민지 상품 무역업과 해운업을 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조금이나마 그에게 유산이 돌아왔다. 유산과 부인 카미유의 지참금으로 그는 제법 유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아르장퇴유에 정원 딸린 집을 얻었고 보트를 사서 아틀리에로 개조한 후 센 강에 띄웠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879년에는 부인 카미유가 유산 후유증으로 32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모네는 입관한 아내의 시신을 그림에 담았고, 그 그림은 <임종을 맞은 카미유>라는 제목으로 유명해졌다.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집은 아름다운 정원 때문에라도 한 번쯤 가볼 만한 장소이다..bmp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집은 아름다운 정원 때문에라도 한 번쯤 가볼 만한 장소이다.

 


생의 마지막, 그는 수련을 그리고 또 그렸다


카미유는 두 아들을 남겼다. 1892년, 모네는 재혼했는데 새 부인은 친구이자 미술 수집가인 에르네스트 오셰데의 미망인 알리스 오셰데였다. 그녀는 6명의 자식을 데리고 왔다. 이 시기 모네는 이미 파리의 지베르니에 집이 있었으므로 10명의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했다. 기술자에게 의뢰해 집을 따뜻한 느낌을 주는 노랑으로 칠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꽃과 색채의 향연을 즐겼다. 그의 집 유명한 수련 연못에는 등나무 꽃으로 뒤덮인 일본식 다리들이 놓여 있다. 마지막 창작 시기 동안 모네는 끊임없이 수련을 소재로 삼았다. 색색의 안개 속으로 흩어진 식물들은 빛과 색채의 조화로만 인식된다. 클로드 모네는 말했다. “소재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소재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것을 그리고 싶다.”


모네는 백내장이 심해 실명 위기에 처했지만 두 번의 수술 후 시력을 회복했다. 다시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심한 우울증이 그를 괴롭혔다. 모네는 미완성 작품들을 대부분 찢어 버렸다. 자신이 죽은 후 그 작품들이 거래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1926년 12월 5일, 클로드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숨을 거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 11월 11일, 모네가 정전을 기념하여 프랑스에 수련 그림 여덟 점을 기증한 것은 프랑스는 물론 세계 미술계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오랑주리 미술관에 걸려 있는 대형 수련 그림들은 노년의 클로드 모네가 미술관 지하실에 있는 두 개의 타원형 방을 생각해 특별히 맞춤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본문 속 장소 찾아가기


오랑주리 미술관
파리 1구, 콩코르드 광장
www.musee-orangerie.fr
▶지하철: 콩코르드


지베르니(모네의 정원과 집)
지베르니, 클로드 모네 거리 84번지
www.fondation-monet.fr/de

▶가는 길: 생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르농까지 가서 버스나 택시로 갈아탄다. 소요 시간 약 45분

 

 

연관도서

 

그들을 만나러 간다 런던 
마리나 볼만멘델스존 저/장혜경 역 | 터치아트

‘도시의 역사를 만든 인물들’ 《그들을 만나러 간다 런던》은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델, 윌리엄 터너, 윈스턴 처칠, 버지니아 울프, 애거서 크리스티, 엘리자베스 2세, 믹 재거, 알렉산더 맥퀸 등 런던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긴 런던의 인물들을 조명한다.

 

 

 

 

그들을 만나러 간다 뉴욕 
베티나 빈터펠트 저/장혜경 역 | 터치아트

‘도시의 역사를 만든 인물들’ 《그들을 만나러 간다 뉴욕》은 존 D. 록펠러, 조지 거슈윈, 루이 암스트롱, 리 스트라스버그, 앤디 워홀, 우디 앨런, 존 레넌, 루돌프 줄리아니, 폴 오스터 등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긴 뉴욕의 인물들을 조명한다.

 

 

 

 

그들을 만나러 간다 파리 
마리나 볼만멘델스존 저/장혜경 역 | 터치아트 

《그들을 만나러 간다 파리》는 중세 시대 신학자 아벨라르, 앙리4세,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레옹, 마리 퀴리, 천재 화가 피카소, 코코 샤넬,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이브 생 로랑 등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긴 파리의 인물들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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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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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j314

2016.06.13

지베르니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지요. 파리에서 그리 멀지 않아 다녀오기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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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나 볼만멘델스존

함부르크와 런던, 파리에서 문학사를 공부했고 파리 주간지 <슈피겔> 편집부에서 일했다. 여성 화가 파울라 모더존베커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의 전기를 집필했다. 도시의 역사를 만든 인물들(메리안 포트레이트) 시리즈의 《파리》 편과 여행 안내서 메리안 라이브 시리즈의 《파리》, 《함부르크》 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