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지가 너무 까마득해서 제목도, 배우의 이름도 무엇 하나 떠오르지 않지만 어떤 대목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날 때가 있다. 그 장면이 강한 인상을 남길 정도로 희한했거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리라. 사실 드라마인지 영화인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일단 한번 들어보시라. 배경은 조선 시대쯤, 주인공은 미천한 신분이지만 그림만큼은 무척 잘 그리는 남자다. 얼마나 잘 그리느냐면 꽃이든 나비든 거의 카메라를 갖다 대서 찍은 수준이다. 꽃은 향기가 날 듯하고 나비는 당장에라도 팔랑팔랑 날아갈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남자의 그림을 감상한 이들의 평이었다.
한데 양반 중에서 ‘진품명품적 심미안’을 가졌다는 이가 남자의 그림을 보며 묘한 얘기를 한다. “쯧쯧, 재주가 아깝구나. 잘 그리긴 했지만 그림 속에 땡땡이 없어.” 그 땡땡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본심’이라고 했든가 ‘영혼’이라고 했든가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면 ‘아우라(Aura)’였을 텐데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그림 속에 “아우라”가 없다고 표현했을 리 만무하니까 일단 땡땡이라고 해두자. 남자가 양반에게 묻는다. “대감, 땡땡이 뭡니까.” 여기서 땡땡에 대한 대감의 장광설이 이어지는데 ‘내공이 없이는 땡땡이 생기지 않으며 땡땡이 없으면 제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 한들 가치가 없다’는 게 골자였다.
남자는 땡땡을 획득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하지만 식음을 전폐한 채 날마다 그리고 또 그려도 대감은 남자의 그림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땡땡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중국에 출장 갔다가 ‘황제가 조선의 왕에게 전달해 달라며 하사한 명화’를 들고 대동강을 건너던 사신이 그만 실수로 그걸 홀랑 물에 빠뜨리고 만다.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닌 거다. 고심 끝에 사신은 은밀하게 남자를 불러 애걸한다. “돈이든 뭐든 해달라는 건 다 해줄 테니 내가 잃어버린 그림과 똑같이만 그려 주게.” 이에 남자는 사신이 이러쿵저러쿵 설명해준 딱 그대로 문제의 명화를 복원한다. 두 사람이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약조한 건 물론이다.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다. 저간의 사정을 알 턱이 없는 왕이 자랑이랍시고 황제의 하사품을 떡하니 내놓자 신하들이 앞다투어 그림을 상찬하기 시작하는 거다. 그중에는 ‘진품명품적 심미안’을 가졌다는 양반도 있었는데 “땡땡이 가득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전하” 이러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비로소 사신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날 밤 은밀하게 돈다발을 한 움큼 남자에게 안기며 그 기막힌 광경을 전해준다. “나리, 그분이 분명 땡땡이라고 하셨습니까요?”, “그리 말하더군, 땡땡이 가득 느껴진다고.” 한참을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남자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웃음을 터트리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 심정이 어떨지 조금쯤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브르 박물관, 인파가 많아 멀리서 바라본 모나리자
최근 보도된 미술품 위작 논란 뉴스를 보며 위 드라마의 제목이 뭐였는지, 대관절 ‘땡땡’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발견했다. 판 메이헤른이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마구잡이로 한 낙서조차 그럴듯해 보였을 정도다.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그는 미술전문학교인 델프트 국립공과대학에 진학한다. 메이헤른이 그린 초상화는 실물과 똑같았다. 누가 보더라도 혀를 내두를 만한 솜씨였다. 졸업 작품으로 내놓은 정물화로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회에 나온 메이헤른은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무엇을 그려도 인정받지 못한다.
급기야 어느 평론가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기도 한다. “메이헤른이 그린 그림은 무미건조한 데다 지루하며 때때로 정말로 형편없다.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활기나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다.” 몬드리안을 필두로 한 추상화가 유럽을 석권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이 변한 데다 재능을 과신한 나머지 공부를 게을리 한 탓이었지만 메이헤른은 화를 냈다. 어째서 사람들이 저토록 바보 같은 그림에 열광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특히 자신의 그림을 인정해주지 않는 평론가들이야말로 속물이자 아첨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짝퉁 미술사』를 쓴 토마스 호빙의 견해는 다른 듯하지만 장 프랑수아 세뇨는 『명작 스캔들』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당시의 예술계가 무지하고 부패해서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곧바로 유명한 비평가들의 무능력과 판단력 부재, 상인들의 비양심을 만천하에 드러낼 속임수를 계획했다.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다!” 이때 메이헤른은 베르메르를 떠올렸다.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 네덜란드의 화가다. 메이헤른이 베르메르를 떠올린 까닭은 일상생활을 묘사한 풍속화 서른여섯 점을 남겼다는 것 외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참고할 만한 기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에는 전혀 빛을 보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 한참이 지나서야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점도 메이헤른 입장에서는 매력적으로 느껴졌으리라. 메이헤른은 베르메르의 그림을 위조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골동품점을 뒤져 베르메르가 당시 사용했을 법한 낡은 캔버스를 구하고 오랜 세월 방치된 듯한 효과를 내기 위해 유화 물감을 사용한 그림을 화덕에 넣고 구우면 어떻게 되는지 세심하게 연구했다.
무엇보다 그는 ‘베르메르가 실제로 그렸던 작품’을 위조한 게 아니라 ‘베르메르가 아마도 그렸을 법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세상에 공개된 베르메르의 작품은 서른여섯 점뿐이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그의 무명시절 작품이 스무 점 가까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영리하게 파고든 것이다. 메이헤른의 첫 번째 위작은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도 인정할 만큼 그럴듯했다. 또 다른 위작은 네덜란드의 유명 미술관에서 거액을 주고 사들이기까지 했다. 덕분에 베르메르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토마스 호빙이 지적한 대로 어쩌면 돈벌이야말로 메이헤른의 목표였을지 모른다. 복수가 목적이었다면 그 시점에서 위작임을 밝혔을 테니까.
하지만 운명은 얄궂다. 메이헤른의 위작을 진품으로 알고 구입한 이들 가운데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괴링의 아내가 있었고 종전 후 예술품 강탈에 대한 조사가 철저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메이헤른의 행각이 드러난 것이다. 메이헤른의 위작을 베르메르의 진품으로 감정했던 전문가들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끝까지 그것이 위작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덕분에 메이헤른에 대한 처벌도 흐지부지되었다고 하니 묘하다. 오늘날, 그 이름보다는 ‘진주 귀고리 소녀(일명, 네덜란드의 모나리자)’의 작가로 더 잘 알려진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다가 문득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모나리자 앞에 서 있던 수많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땡땡이 가득 느껴지는 그림이라며 진심으로 감탄했을까. 모나리자를 구경하는 사람이 줄어들지를 않아서 가까이 갈 수 없었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미남이고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다. 가끔 이런저런 매체에 잡문을 기고하거나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거나 출판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