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노라, 보았노라, 그 다음은?
무엇보다도 경치라는 요소가 단독으로 우리의 여행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아름답고 근사한 경치라 해도 언제까지고 경치만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 있는 여행이란 없기 때문이다.
글ㆍ사진 김명철
201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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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우리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영원히 기억되는 아름다운 경치와 압도적인 경관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각국의 역사 유적이나 문화를 꽤 그럴듯하게 간접 체험하고 싶다면 각종 다큐멘터리 등의 영상을 시청하면 되고, 여행지의 음식을 미리 맛보고 싶다면 국내의 다양한 세계 음식점을 방문하면 된다.
 
그렇지만 압도적이고 시적인 경치, 우리의 마음과 시야와 삶을 대하는 생각을 크게 열어주는 광대무변한 풍경은 간접체험을 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 진짜 좋은 풍경의 그 좋은 느낌을 흠뻑 느끼기 위해서는 360도를 완전히 둘러싼 돔형 스크린에 삼차원 입체 영상을 투사하고 적절한 냄새와 소리 등을 첨가해주는 특별 상영관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즉 진짜 경치가 제공하는 원대하고 깊은 입체감과 우리 피부에 와 닿는 그곳의 바람, 나무 향기와 풀 냄새, 강과 폭포의 소리, 그리고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어울리며 자아내는 황홀함은 어떻게 달리 재현할 수가 없다. 결국 그곳에 직접 가볼 수밖에 없다.
 
 
풍경은 여행의 배경일 뿐
 
그런데 오로지 경치 자체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이에 따른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일단 세상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지만 별로인 곳도 많다. 일례로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의 고속도로 주변 풍경은 대체로 밋밋해서 차라리 체계적이고 안전한 그 나라 국내선 항공편으로 이동하는 편이 훨씬 낫다. 

 

또 어떤 곳은 멋진 경치로 유명하지만, 이 좋은 경치를 여행자들에게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으로는 날씨가 맑고 빗물이 차 있을 때면 세상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신비로운 경치를 감상하게 해주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을 들 수 있는데, 당연히 이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는 날은 많지 않다. 또한 산 정상에 오르거나 산 정상을 구경하려는 경우에는 구름과 안개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 때문에 백두산 천지에서 천지를 보지 못하거나 마추픽추에 갔다가 마추픽추를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피해자가 속출하는 것이다. 이런 곳은 일 년 중 깨끗한 시계를 자랑하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고, 해당 시기에도 그나마 꼭두새벽부터 서둘러야 좋은 경치를 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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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중부의 산간 마을 하푸탈레에는 영국 식민주의 시기의 사업가였던 립턴 경이 의자를 놓고 앉아서 눈 아래로 펼쳐진 자기 차밭의 장관을 감상했다는 ‘립턴의 자리’가 있는데(그렇다, 세계적인 차 브랜드 ‘립톤’의 고장이다), 나는 이곳에서 딱 립턴의 자리가 어디였는지만 확인하고 자욱한 안갯속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다. ⓒSrilankan Trails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치라는 요소가 단독으로 우리의 여행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아름답고 근사한 경치라 해도 언제까지고 경치만 멍하니 바라보고 앉아 있는 여행이란 없기 때문이다. 경치 보기는 여행의 모든 활동 가운데 가장 수동적이고 각성 수준이 낮은 활동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정도의 낮은 각성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지겨움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몽골에서 차를 타고 투어를 나가면 처음에는 드넓은 평원과 푸른 하늘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만, 반나절 정도 차 안에 계속 앉아 있다 보면 “와, 이것도 질리는구나” 이런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경치는 여행을 꿈꾸는 우리의 가슴을 기분 좋은 기대감으로 두근거리게 할 수 있는 요소이며, 또한 직접 가서 보는 것밖에는 이를 만끽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집을 떠나 여행에 나서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요소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일단 경치에 이끌려 어떤 여행지에 도착한 뒤에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어떤 행복한 활동을 할 수 있는지가 경치 자체보다 훨씬 중요해진다. 즉 경치는 다른 활동과 조합됨으로써 여행의 행복을 증폭시키는 ‘배경’이자, 문화와 음식 및 각종 액티비티 등 각 지역의 다양한 여행 요소들을 결합하여 여기에 통일성과 주제를 부여하는 ‘틀’이지 여행의 목적 자체는 아니다.
 
 
여행자별 최적의 경치 감상법
 
좋은 경치를 배경 삼아 즐겼을 때 최고의 만족감을 주는 활동은 많으며, 우리는 우리의 목적과 취향에 따라 이 다양한 활동을 선택해서 즐길 수 있다. 좋은 경치 속으로 능동적으로 뛰어들어 열심히 몸을 움직이면서 경치를 만끽하고 싶은 사람은 대부분 경치가 좋은 장소를 며칠씩 걸으며 만족감과 성취감을 맛본다. 더 짜릿하고 재미있는 레포츠를 원하는 외향적인 사람이나 색다른 경치 속에서 색다른 활동을 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래프팅이나 말타기 등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트레킹이나 각종 액티비티를 좋은 경치와 조합하면 액티비티와 경치에 대한 만족도가 모두 높아지고 여행에 대한 각별한 만족감까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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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작은 티베트 마을 랑무쓰. 마을 뒤편 언덕에 오르면 죽 이어진 언덕들 사이에 폭 파묻힌 마을 분지를 내려다볼 수 있다. 마을 곳곳 아름다운 은빛 사원들이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요정들의 계곡’이 있다. 나처럼 내향적인 여행자라면 하루는 이쪽 언덕, 하루는 저쪽 언덕 하는 식으로 가벼운 산책을 즐기며 랑무쓰를 눈에 담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좀 더 활동적인 액티비티를 원하는 사람은 말 트레킹으로 아름다운 벌판을 탐험할 수도 있다. 사교활동을 원한다면 똑똑하고 활달한 티베트인을 사귀며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Gill Penney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좋은 경치를 배경 삼은 치열한 사교활동 또한 아주 좋다. 라오스 왕위앙의 기암괴석이 빚어내는 절경 한복판에서 즐기는 파티나 술자리, 중국 호도협의 멋진 숙소 중도객잔의 전망 좋은 식당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사교활동 역사에 돋보이는 강렬한 기억을 선사할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여행할 경우에는 훌륭한 경치를 배경으로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내향적이거나 개방성이 낮은 사람은 경치 좋고 호젓한 마을에서 전망 좋고 마음에 쏙 드는 방을 잡아 느긋하게 머물러보자. 간단한 산책이나 마을 둘러보기를 곁들이며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다 보면 온갖 근심이 다 없어진다. 독서 또한 좋은 경치와 아주 잘 어울리는 활동이자 성격이 차분한 사람(또는 차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 즐기기에 매우 훌륭한 활동이다. 책을 잠시 내려놓았을 때 눈앞에 설산 계곡이 펼쳐져 있거나 광활한 호수가 반짝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럴 때는 아무리 어렵고 재미없는 책도 쓱쓱 읽을 수 있고 유독 재미있는 책은 평생 기억에 남는 책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좋은 경치 속에서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게임만 해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소중한 사람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런 호젓하고 경치 좋은 마을을 추천한다.
 
여행을 하고 싶다면 세계 각지의 다양한 경치를 두루 간접 체험해보자.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우리 안에서 생겨나 떠나고자 하는 용기와 꿈을 부풀려줄 것이다. 블로그, 인터넷 동영상, 영화, 드라마, 친구의 사진, 다큐멘터리, 여행 프로그램 등 무엇이든 괜찮다. 세상 어딘가에는 이것들의 원본이 있고, 이 원본의 감동은 각별하며, 원본이 안겨주는 감동과 함께 즐기는 온갖 활동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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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심리학 김명철 저 | 어크로스
심리학과 여행학을 결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여행 경험을 더한 이 독특하고도 기발한 여행안내서. 역마살의 정체에서부터 자신이 어떤 여행자 스타일인지, 여행에서 경험한 부정적인 정서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행복감을 오래 지속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자로서 여행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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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 #풍경 #감상법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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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철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심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타칭 ‘웃기는 심리학자’로 통하며, 도합 1년 5개월 12개국을 여행한 베테랑 여행가이기도 한 그는 스스로를 ‘경험추구 여행자’로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