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는 캐주얼도 입는다
틈을 노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보자. “부장님, 월요일 지시하신 업무를 이러하게 진행하다 저러한 어려움이 발생했는데 A와 B중 A로 일단 진행하려 합니다.” 진행상황을 업데이트하는 중간보고다.
글ㆍ사진 김남인(<회사의언어> 저자)
2016.10.19
작게
크게

1.jpg

사진_ imagetoday

 

 

보고서 진도가 영 안 나가던 정 대리의 손이 빨라진 건 점심을 먹고 들어온 후였다. 딜러와의 약속 장소인 광화문까지, 자꾸 배가 나오는 부장에게 청계천을 따라 걷자고 제안한 건 정 대리였다. 택시로 5분 거리가 20분으로 늘었다. 날씨가 춥다며 몇 마디 주고받다 보고서 얘기가 나왔다.

 

“부장님, 지난주에 지시하신 위기대응 매뉴얼 보고서 말입니다. 공장 별 매뉴얼이 있는데 또 뭔가를 만들어 톱다운(Top-down)으로 내려 보내면 저항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공장 상황을 우리가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세세하게 매뉴얼을 정하기보다는 위기 시 보고 체계와 외부 대응 창구를 정하는 정도로 만드는 게 더 현실적일 것 같습니다.”

 

“음... 그래! 일단 그렇게 해봐.”

 

우선순위가 정해지니 보고서에 각이 잡히고 작성에도 속도가 붙었다. 초반에는 부장이나 정 대리도 보고서에 A부터 Z까지 죄다 쓸어 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파고들어 보니 정 대리에게 관점이라는 게 생겼고 초기 보고 방향도 수정이 필요했다. ‘당신이 처음 지시한 대로는 보고서가 안 되겠다’는 어찌됐든 실패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 대리는 상사와 둘만의 시간을 노렸고 사무실을 나가 나란히 걸으니 부장과의 거리가 바짝 좁혀졌다. 하기 힘들었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많은 직장인들은 파워포인트라는 정장을 입혀 공식 무대에 올려야 보고라 생각한다. 여러 밤을 야근으로 채우고도 “내가 언제 그걸 보고하랬어?”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거부당하는 이유다. 한 편의 보고서를 무대 위에 올리기 위해서는 무대 뒤에서는 촘촘한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무대 뒤란 차 한 잔의 순간, 회식 자리, 함께 외근 가는 택시 안 등 소소하고 캐주얼한 시간을 뜻한다. 상사가 담배를 피우면 부하 직원들도 담배에 손을 대는 이유도 비슷하다. 마주 보고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순간, 도파민이 폭발하고 긴장이 풀어지면서 이야기들이 나온다. 불편한 소식도 전하고 도발적인 질문도 던질 수 있다. 이런 비공식적이며 캐주얼한 보고의 효과는 크게 세가지다.

 

1. 상사를 업데이트 시킨다

 

친절히 전후 맥락 가르치며 일 시키는 상사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지식의 저주’라는 것에 걸려 있어서 누구나 자기 말을 자기 수준으로 알아들을 거라 생각한다. 갸우뚱하고 있는 당신에게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냐’고 타박하는 이유다. 물론, 상사에게 처음부터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 그가 원하는 바를 완벽히 이해하고 업무를 시작하는 방법도 있지만 쉽지는 않다. 빈틈을 노려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보자. “부장님, 월요일 지시하신 업무를 이러하게 진행하다 저러한 어려움이 발생했는데 A와 B중 A로 일단 진행하려 합니다.” 진행상황을 업데이트하는 중간보고다. 상사와 내가 같은 페이지에 있는지 점검하고 중요한 순간 상사를 나와 같은 배에 태워 일을 진행시킬 수 있다.

 

미국 와튼 경영대학원의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 교수는 『오리지널스(Originals)』에서 ‘어떤 정보를 자주 접할수록 좋아하게 된다‘는 단순 노출 효과를 소개하면서 대체로 사람들은 특정 아이디어에 대해 10~20회 정도 노출될 때 호감도가 늘어난다고 했다. 보고가 내 아이디어를 어필하는 수단이라면 한 방을 노리기보다 여러 번의 잽을 날려야 한다.

 

2. 상사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과녁을 맞추기 위해서는 조준할 시간이 필요하듯 상사가 불편하다고 해 피해 다닐 수만은 없다. 같이 밥도 먹고 걸어도 봐야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 청하지 않아도 그의 입에서는 술술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내가 사원이었을 때는 스캔 한 장도 칼 같이 각을 맞췄다”는 무용담부터 “보고서는 말이야~ 일단 데이터가 뒷받침되어야 하거든!” 가이드까지. 상사가 애정하는 폰트 크기와 그의 관대함이 빛을 발하는 요일과 시간대까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배운 것을 업무에 활용한다면 상사는 그것을 당신의 열정이라 해독한다.

 

3. 상사가 당신을 찾는다


상사가 쥐고 있는 정보가 단연 더 고급하고 내밀하다. 그렇지만 그가 모든 퍼즐 조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리~과장들이 갖고 있는 현장의 정보, 신선한 시각, 사내 분위기 등은 상사가 갖고 있는 정보와 결합될 때 화학적 스파크를 일으켜 종종 예상치 못한 통찰과 문제해결의 길을 제시한다. 상사가 어떤 정보를 필요로 하는지 나는 그에게 어떤 관점을 줄 수 있는지 파악하자. 귀한 정보원으로 인식된다면 상사가 먼저 당신에게 ‘잠깐 바람이나 쐬자’며 산책을 청할 것이다. 하버드경영대 린다 힐 교수가 스의 탄생』에서 제시한 몇 가지 팁은 당신의 캐주얼한 보고에 신뢰를 더할 것이다. 둘만의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상사가 감수할 위험을 최대한으로 줄인다. 상사의 시간과 자원을 슬기롭게 이용한다.(상사는 친구가 아니므로!)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보고 #상사 #캐주얼 #정보 #회사의언어
0의 댓글
Writer Avatar

김남인(<회사의언어> 저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사회부에서 각종 사건사고를 취재하는 경찰기자, 교육 이슈를 다루는 교육기자로 일했으며 문화부에서는 서평을 쓰며 많은 책과 함께했다. 다른 의미 있는 일을 찾아 2013년 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HR Communication을 담당하다 현재 SK 주식회사에서 브랜드 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과장을 시작으로 차장, 부장을 압축적으로 경험했고 그 사이 한 번의 이직까지 겪으며 다양한 장르와 층위의 ‘내부자의 시선’을 장착할 수 있었다. 기자였다면 들을 수 없었던, 급여를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우리’가 일하고 관계 맺고 좌절하고 성취하는 진짜 이야기들을 책『회사의 언어』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