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0일, 신촌에서는 ‘나는 ___에 있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여성 폭력 중단을 위한 시민 필리버스터가 열렸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만의 일이다. 50여 명의 발화자가 여성혐오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과 생각을 말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고 그중 절반은 우연히 그 길을 지나치던 사람들이었다. 『거리에 선 페미니즘』은 그들의 이야기를 한데 엮은 것이다.
1월 20일 벙커1에서 열린 북토크도 여러 시민의 이야기를 엮은 책의 구성처럼 인터넷과 현장을 통해 얻은 페미니즘에 대한 질문들과 그에 대한 권김현영 선생님의 답변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짧은 강연 이후에는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의 또 다른 필리버스터가 이어졌다.
우리 모두는 여성 혐오에서 자유롭지 않다
페미니즘 강의라 여성 참가자들만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남성이 절반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사회를 맡은 한지훈 북파인더 편집장 또한 기혼 남성이었다. 그는 아내와의 연애 시절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전화기 너머의 다급한 아내의 말에 마음속 깊은 곳으로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다고 자신의 여성혐오 경험을 고백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이에 권김현영 작가는 남성중심사회의 핵심적 정서는 여성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인이 그런 일을 당하면 보통 억울한 마음에 화가 나죠. 그럴 때 우리는 보통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연인에게 화살을 돌립니다. ‘그러게 네가 일찍 좀 다니지 그랬어.’ 같은 반응이죠. 두 번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굉장히 잘 하신 겁니다.
사회자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깊이 반성하고 비난 받겠다고 대답했고 이에 권김현영 작가는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인 자신조차도 여성혐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여성혐오는 사회 깊은 곳에 뿌리 깊이 박혀있기 때문에 여성학을 오래 공부한 자신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혐오를 저지를 수 있다고. 이를 시작으로 여러 사람의 ‘여성혐오’에 대한 경험담이 여기 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현명하고 세련된 대처법은 없다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난 후로 사람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습니다. ‘너 왜 이렇게 예민해?’, ‘그 문제에 대해 그만 관심 가질 수 없어?’ 같은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먼저 그 질문은 질문의 형태를 띈 ‘공격’ 입니다. “너 왜 이렇게 예민해?” “오늘 생리해?” 등의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죠. 질문자님이 여성혐오에 대처하기 위해 자기방어 캠프에 참가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고 하셨는데 사실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격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자기방어 능력이거든요. 그럴 땐 역으로 한 번 더 물어보세요. “지금 저한테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생리중이냐고 물어보신 거에요?” 라고요. 다시 한 번 질문을 되짚어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자신의 발언이 얼마나 비논리적이고 무례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객관화가 되기 때문이죠.
‘로리타’ 요소가 들어간 문화 콘텐츠를 아무 비판 없이 수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답답합니다.
사실 모든 어린 것은 예뻐요. 그것이 어린 생명체의 생존 전략일 수도 있고요. 예쁜 것들에게 예쁘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린 것들이 욕망의 주체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도의적인 책임이 있는 거죠. 사실 저도 도깨비 같은 드라마 보면 재밌어요. 이미 있는 문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게 중요하죠.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알면 알아갈수록 답답한 상황이 많이 생길 거에요. 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여성혐오 문제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들을 바보 취급하는 것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성혐오에 적절한 대응을 하고 싶은데 많이 공부해도 막상 일이 닥치면 굳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 또는 혐오의 피해 당사자가 됐을 때, 앞에 서면 굳어버리고 한 마디도 못해서 ‘다음엔 이렇게 대답해야지.’ 다짐하고 집에서 연습합니다. 100번, 200번 연습을 해도 또 다시 그 상황을 마주하면 또 말을 못해요. 하지만 그런 연습을 통해 우리는 ‘말을 할까 말까’에 대한 점점 줄여나갈 수 있죠. 외국어를 공부할 때에도 여러 번 말을 해보고 연습해야 입이 트이는 것처럼 여성혐오에 대처하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유로운 발언이 오갔던 오늘의 북토크처럼 페미니즘은 권위 있는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주제이다. 오늘의 강연은 개인이 배우고 느낀 페미니즘에 권김현영 작가가 약간의 길잡이를 더해준 형식이었다. 그만큼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많은 주체들이 스스로 생각해 나가며 평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주제이다.
페미니즘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 여자들이 많이 조심 했으니 남자들도 함께 조심해라, 이게 어렵나요?
여성들의 말하기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이야기의 장소가 많아지기를 우리 모두는 바라야 한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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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선 페미니즘고등어 등저/권김현영 해제/한국여성민우회 편 | 궁리출판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후, 추모를 넘어선 담론의 장이 서울 신촌 거리 한복판에서 열렸다. 이 책 『거리에 선 페미니즘』은 절절했던 그 8시간의 기록이다.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페미니즘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하는 책이다.
박서정(예스24 대학생 리포터)
willhelm
2017.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