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와디 사이드(Edward Wadie Said) - 널리 알려진 대로 영미권 이름과 아랍권 성(姓)의 결합이다. -는 1935년 당시 영국령 예루살렘에서 부유한 팔레스타인인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빚어진 1차 중동전쟁을 피해 이집트로 건너갔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뒤 하버드 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젊은 나이에 명문대 교수로 자리 잡아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미국 지식인으로 살 것 같던 사이드는 1967년 3차 중동 전쟁을 계기로 인생행로를 크게 바꾼다. 이 전쟁을 통해 그는 미국 사회가 팔레스타인과 아랍인에 대해 극히 적대적인 사회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각성을 통해 사이드는 촉망받지만 평범한 아카데믹한 제도 영문학 연구자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활동가이자 향후 탈식민주의 연구라는 방대한 분야로 발전해나갈 새로운 학문 영역의 개척자로 변신한다. 1978년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스스로도 출판이 가능할까 의심했던 이 책은 20세기에 나온 책들 중 단일저작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의 하나가 되었다.
동양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
1970년대 말은 전통적인 민족주의나 민족주의화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민족해방투쟁으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한 많은 나라에서 독재와 정치적 혼란이 나타나 실망감을 불러일으킨 시기였다. 이런 시점에 『오리엔탈리즘』의 등장은 제국주의와 식민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먼저 유럽의 역사 속에서 “동양적 전제, 동양적 관능, 동양적 신비” 등 동양 일반에 대한 고정관념을 형성시켜 온 오리엔탈리즘적인 사유방식이 어떻게 형성돼 왔는지를 검토하고, 그것이 19세기 유럽의 학자와 작가들을 통해 재구성되어 식민지 경영에 기여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이 이슬람에 중세적 이미지를 덮어씌우며 악마화 하는 현대 제국 미국의 외교 정책 속에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 드러낸다.
이 책에서 다루는 “동양(오리엔트)”이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유럽의 타자로 등장한 현재의 중동지역을 가리키는데, 사이드는 “동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럽인들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동양”이라고 불리는 것 내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이질성과 차이들을 무시하고 하나의 범주로 일반화 하는 태도는 (마치 여성 일반을 “성녀”와 “창녀”로 단순화 시켜 바라보는 이분법처럼) “동양”과 “동양인”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동시에 찬양하는 이중적인 태도로 귀결된다. 본래 예술에서 나타난 동양풍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됐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은 19세기를 거치며 “동양”에 대한 연구 일반을 아우르는 말로 확장되었는데, 사이드에 따르면 이러한 학문적 탐구는 오히려 유럽인들이 가진 전통적인 고정관념을 더욱 강화시켜 서구 열강의 식민지 경영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이드는 푸코의 권력-지식 이론에 기대어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지배하려는 권력의지와 결합하여 생산된 유럽의 총체적인 담론체계로 재규정한다.
『오리엔탈리즘』은 출간되자마자 영미학계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른바 “동양”에 관련한 서구의 학문제도 전반을 비판한 사이드의 이론은 기존 관련 학계로부터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 책에 고무 받은 후속 연구들이 쏟아지며 미국 학계에 탈식민주의 연구라는 새로운 전통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짧은 시간 내에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오리엔탈리즘』은 그 단어의 의미를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가치중립적이거나 동양친화적인 뜻으로 받아들여지던 오리엔탈리즘은 이 책을 통해 서구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획일적이고 신비한 동양이라는 개념을 창출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나아가 “오리엔탈리즘은 더 이상 동양 관련 연구에만 쓰이는 말이 아닌 타자의 문화들이 취급되고 재현되는 방식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미 1977년부터 팔레스타인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성공 이후 미국에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대변자 역할을 하며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이 때문에 과격한 유대인들로부터 테러 협박을 받았고, 그 자신이 테러 교수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1991년 백혈병 선고를 받은 사이드는 병마에도 불구하고 93년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의식을 중동을 넘어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한 또 하나의 대작 『문화와 제국주의』를 발표했으며 99년에는 자서전(『Out of Place』)을 발간했다.
사이드는 일찍부터 전통적인 민족주의와 테러리즘을 비판하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허구적인 민족 대립을 넘어 평화적으로 상호공존을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1993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자 진정한 화해라고 볼 수 없는 굴욕적인 협정이라고 비판하여 오히려 팔레스타인에서 그의 책들이 금서가 되었다. 2000년 7월 레바논 국경지역에서 이스라엘 병사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이 포착되며 또 다시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던 사이드는 2003년 죽기 직전까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의 부당성을 설파하는 순회강연에 나서는 등 변함없는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보이다 운명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포스트주의
탈식민주의의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근원적 비판은 포스트구조주의 같은 서구 근대성에 대한 급진적 비판 이론과 조우한다. 예컨대 대표적인 탈식민주의 이론가로 꼽히는 호미 바바나 가야트리 스피박은 포스트구조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반면 사이드의 경우 푸코의 담론 개념을 쓰긴 하지만 일정정도 거리를 취한다. 그는 종종 실제의 세계를 텍스트로 환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과 달리 텍스트 역시 물질적 세계의 한 구성부분일 뿐이라고 명확히 선을 긋는데, 이러한 생각은 다른 탈식민주의 학자들과 달리 적극적인 참여 행위로 나서게 하는 바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텍스트 중심 담론들에 비해 유물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드 역시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리엔탈리즘』이나 『문화와 제국주의』는 주로 텍스트, 그것도 문학적 텍스트에 대한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물론 사이드의 전공이 비교문학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면이 있겠지만,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실제 역사에 대한 분석이 취약하거나 오류가 있다는 지적은 자주 제기된 비판이다. 『오리엔탈리즘』에서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스트로 격렬히 비판받은 영미권의 가장 권위 있는 중동 역사가 버나드 루이스는 사이드가 중동의 역사 뿐 아니라 유럽의 역사에도 무지한데 놀랐다고 비판한 바 있으며, 이런 약점은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를 쓴 존 맥켄지처럼 사이드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역사학자들도 지적한 바 있다.
과도하게 텍스트 중심적이라든가 추상적이라는 비판은 탈식민주의 계열 학자들에도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비판이다. 문화주의로 경도되어 있는 탈식민주의 이론이 실제 정치적 태도와 실천에서는 매우 모호하다는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 이 역시 어느 정도는 사이드에게 기원하는 면이 있는데,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주로 개인의 윤리에 호소하며 특정한 정파나 정치 이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사이드가 스스로를 권력의 손길에서 벗어난 진리를 추구하는 망명 학자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권력과 진리의 복잡한 연계관계를 연구한 푸코의 개념을 연구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한 태도가 아닌가 한다.
탈식민주의 연구들이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학문 제도 내에 안주하며 현실의 전지구적 자본주의 착취체계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는 지적 역시 귀담아 들을 만한 비판이다. 실제로 『오리엔탈리즘』 이후의 탈식민주의 연구들은 8, 90년대 마르크스주의적 식민지 이론 및 실천의 공백기에 번성했고, 프란츠 파농과 같이 그에 영향 받은 이전의 반식민 담론들과 단절한 것처럼 자신들의 이론을 구성하는 면이 있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넘어
사이드가 “동양”의 개념을 해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에 기대어 내부의 차이와 위계를 무시하고 다는 여성주의자들의 비판도 있다. 사이드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오리엔탈리즘』의 1995년판 서문에서 부분적으로 긍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책이다. 인도 학자 파사 차터지는 “오리엔탈리즘은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명료하게 표현할 언어를 발견하지 못한 것에 관해 말한 책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식민의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일본 제국주의가 보인 오리엔탈리즘적인 모습은 상당히 익숙하다. 또 한국 같이 어느 정도 근대화가 성공했다는 나라에서는 특히 그것이 스스로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해온 과정이 아니었는가라는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최근처럼 스스로 지배적인 민족의 위치로 자국사를 재구성하려고 하는 유사 역사학적 경향이나 더 가난한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멸시가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정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사회활동 틈틈이 추리소설, 교양서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한 번 글을 썼다 하면 정해진 원고 분량를 훌쩍 넘기며, 수많은 고유명사를 흩날리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말투가 경직되는 그는 진정한 90년대 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