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자화상>. 17세기 이탈리아의 바로크 시기 화가로 여성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아 회원이 된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강간을 당했으나 당시로는 드물게 고소를 했다.
1996년 12월 말,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나는 강릉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겨울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내 옆 창가 자리에는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2시간 정도 지나 영동고속도로의 휴게소에 버스가 정차했다.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내 자리에 앉아 있는데 옆자리 사관생도가 양손에 음료수를 들고 돌아와 내게 하나를 건넸다. “이거.... 좀 드세요. 몸에 좋은 대추차에요.” 고속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가끔 이렇게 음료수를 건네며 말을 붙이는 남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절도 못하고 우물거리며 음료수를 받아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그냥 들고 있었다. 잠시 후 사관생도는 다시 내게 조심스레 권했다. "드세요. 대추차가 몸에 좋대요”
대추차, 지금은 온장고 음료가 환경호르몬이 의심된다고 하니 건강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분위기 깨는’ 음료가 된다. 그러나 당시는 94년에 식혜가 캔 음료로 출시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후 각종 전통 음료가 많이 생산되던 시기였다. 게다가 음료수도 호빵처럼 따뜻하게 데워서 판매할 수 있는 온장고가 보편화되면서 겨울 음료의 다양성이 증폭되었다. 캔에 들어있는 따뜻한 대추차란 나름 신제품이었다.
재차 사관생도의 권유를 받고 나는 들고 있던 대추차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딸깍, 캔을 따는 순간은 마치 내가 잠긴 현관문을 열고 나와 그를 환영한다는 신호처럼 작동했다. 내가 마신 한 모금의 음료수가 목을 넘어갈 때 그는 얌전하게 내게 말을 붙였다. 학생이세요? 전공은요? 와, 그림 잘 그리시나 봐요. 집이 강릉이에요? 그는 청주에서 공군사관학교를 다니는 4학년 학생이며, 집이 삼척이라 강릉에서 다시 삼척행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고 했으며, 나와의 접점을 찾기 위해 사관생도들도 교양으로 예술 관련 과목을 조금씩 배운다는 말도 열심히 했다. 이렇게 기본적인 자기소개를 거치고 나서 대관령 정상 즈음 다다랐을 때 버스가 예고 없이 멈췄다.
당시 영동고속도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2001년 확장되기 전에는 지금처럼 수많은 터널이 아니라 대관령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야 했다. 말 그대로 아흔아홉 고개를 넘는다. 경사진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를 거대한 구렁이를 타고 가듯 구불구불 넘어간다.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대관령 정상에서 차량이 고립되는 일이 늘 있었다.
버스 기사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까부터 내리던 눈발이 더 강해졌고, 앞서가던 차들이 줄줄이 멈춰서 정체 상태이며, 대관령 정상부터는 차량 점검을 거친 후 체인을 감아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잠시 정차한다고 했다. 뉴스에서 보던 ‘대관령에 차량 고립’이 나의 현실이 되었다. 몇 시간이고 갇혀있을 수 있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15분이면 내려간다.
사관생도가 준 따뜻한 대추차가 다행히 손을 덥혀주었다. 그가 창밖의 눈을 한참 보더니 내게 물었다. “영화 <가위손> 보셨어요?” 아니요. “저는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가위손>이 생각나요. 위노나 라이더랑 조니 뎁이 함께 눈을 맞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아름답거든요.” 폭설이 내리는 대관령 정상에 고립된 버스 안, 처음 만난 여자와 남자가 영화 <가위손> 이야기를 하며 창밖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그 남자는 하얀 제복을 입고 앉아서 조용히 말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낭만적이다.
음료수 캔을 탁 따는 순간으로 다시 휘리릭 필름을 감아 되돌아가자. 내 머릿속은, 분열적으로 이리저리 생각을 옮겨 다니기 바빴다. 사실 나는 사관생도가 음료수를 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 영어 선생님이 들려준 일화가 떠올랐다. 버스 안에서 옆자리 남자가 주는 요구르트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 종점이었고, 지갑과 소지품이 모두 털린 뒤였다고 한다. 나는 대추차 캔을 따면서 ‘안 딴 캔이잖아. 뭘 넣기는 어렵겠지? 어디 뭐 구멍이라도 있나. 따뜻하잖아. 방금 휴게소에서 산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눈알을 바쁘게 굴렸고, 음료수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혹시라도 내가 정신이 괜찮은지 확인하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그가 말한 ‘몸에 좋은 대추차’가 나를 잠들게 하는 약물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버스가 멈췄을 때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 대관령 꼭대기에서 함께 고립되었으므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다행히, 대추차는 그저 대추차였다. 그는 예의 바르고 깔끔했다. 영화 <그날의 분위기>처럼 “오늘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 따위의 흉한 수작도 없었다. 수많은 의심과 실제의 위기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 어찌어찌 잘 살아남았다. ‘잠재적 가해자’로 본다며 남자들은 억울해하지만 실은 온 사회가 여자들의 일생에 걸쳐 남자들이 잠재적 가해자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대부분 이미 공범이다. 여자에게 향하는 ‘조심해’라는 말이 이를 잘 알려준다. 곧, 공포를 통해 한 성이 다른 한 성을 지배한다. 반면 남성들은 남의 몸을 침범한 경험을 공유하며 남성연대를 맺는다. 이게 바로 강간문화다. 우리는 강간문화의 산증인 홍준표라는 사람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보고 있다. 성폭력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희석된다.
반면 여자의 ‘조심하지 않은 죄’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각종 폭력보다 더 가혹하게 처벌받는다.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의 경험을 말하고 쓰는 일은 상대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공포를 자양분 삼아 만들어진 로맨스가 넘쳐난다. 돼지흥분제를 여자에게 몰래 먹여 정신을 잃으면 ‘내 여자’로 만들겠다는 성범죄에 동참한 경험을 책에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12년. 작품이 만들어진 1612년은 바로 젠틸레스키가 강간을 당한 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복수’를 이어갔다.
영화 <엘르>에서 미셸(이자벨 위페르)은 섹스파트너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지만 상대 남자는 집요하게 요구한다. 미셸은 그와 마지막으로 성관계를 맺을 때 시체처럼 가만히 있는다. 나는 뒤이어 나오는 남자의 대사를 듣고 놀랐다. “오늘 정말 좋았어. 어떻게 시체놀이를 생각했어?”
여자와 관계 맺을 줄 모르기 때문에 여자가 자발적으로 가만히 있지 않으면 강제적으로 ‘가만히’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각종 약물을 개발한다. 데이트 강간 약물date rape drug은 미국에서도 캠퍼스 강간의 주요한 한 축이다. 45년 전 홍준표 후보와 하숙집 친구들의 행태는 정확히 이 경우에 해당한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Acquaintance Rape,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책 제목에 다 담겨있다. 대마초도 합법화되지 않은 나라에서 생명에 지장을 줄 수도 있는 약물을 여자에게 먹이는 ‘놀이’에는 어쩜 이리도 무감각할까.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의 주된 원인은, 가해자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용인될만한 것으로 만드는 폭력에 대한 무지함이다”(273쪽). 자신을 한 일을 모르는 사람, ‘홍준표’가 용인되는 사회가 몸서리 처진다.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4차산업혁명의 시대가 온다고 호도한다. 그 어떤 산업혁명이 와도 여성은 여전히 강간당한다. 여성에게 먹이는 강간 약물은 돼지흥분제에서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발전했고 창호지를 뚫어 훔쳐보던 침범의 눈들은 최첨단 몰카로 바뀌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일상의 폭력이 정치적 사안이 되지 못한다면, 여성은 시민권이 없다는 뜻이다. 의식 없는 여성에 대한 신체 접촉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키스하는 동화 속의 왕자면 족하다.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끝내기
2017.05.11
봄봄봄
2017.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