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_ imagetoday
살면서 후회한 일이 거의 없는데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 걸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청문회 때였지요. 대통령을 진료했다는 의사가 “(대통령은) 그냥 면역기능이 좀 안 좋았다”고 대답했을 때였습니다. 그 자리에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없었던지 그냥 넘어가더군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의사가 그런 말을 한다는 건 그냥 두루뭉술 상황을 모면해보려는 속임수에 불과한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료에는 야바위가 많지요. 그런데 야바위꾼들이 언제부턴가 ‘건강에 좋다’는 말 대신 ‘면역을 강화시킨다’는 표현을 쓰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면역을 강화시킨다는 건강식품, 비타민제, 보약이 판을 칩니다. 발효식품이나 무슨 풀뿌리를 캐어 먹으면 면역이 강화된다고도 하고, 누구는 찬 물을 마셔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누구는 그건 무식한 소리고 더운 물을 마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일본에서 체온을 올리면 면역이 강화되어 암도 낫는다는 사이비가 등장하니까, 국내파 아류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체온을 내리면 면역이 약화되니 절대로 해열제를 써서는 안 된다는 건 안아키의 주장이었지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 양반들이 말하는 ‘면역’이란 게 과연 뭘까? 털끝만치라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면역을 한자로는 ‘免疫’이라고 씁니다. ‘돌림병을 면한다’, 즉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전염병이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병원성 미생물이 일으키는 병이지요? 세균도 우리와 똑같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고 자손을 많이 낳아 대대손손 번성하는 것이 지상목표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우리 몸에 침입해야 합니다. 침입하는 데 성공하면 한 곳에 집결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에(집락화) 자기들이 좋아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우리 몸의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진지를 구축합니다(병소 생성). 진지 구축에 성공하면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활발하게 증식합니다. 증식하여 세를 불리면 우리 신체 곳곳을 공격하지요.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끔찍한 얘기지만 세균이 전쟁에서 이겨 사람이 죽어버리면 세균도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출구전략도 세웁니다. 사람이 쓰러지기 전에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겨가 계속 세력을 확장시키는 겁니다(전염). 정리하면 세균은 침입, 집락화, 병소 생성, 증식, 전염의 과정을 거쳐 삶을 이어나갑니다. 세균이라고 삶이 만만하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온갖 어려움에 마주칩니다. 하지만 세균은 분열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금방 진화가 일어나 자신에게 필요한 특성들을 갖춥니다.
우리는 가만있나요? 그럴 리가 없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듯, 세균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벽을 칩니다. 피부와 점막, 안구 등 외부에 노출된 부위는 세균 입장에서 보면 모두 철옹성입니다. 그래도 세균들은 용감하게 기어오릅니다. 걔들도 먹고 살아야 하거든요. 영화에 보면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에게 화살도 쏘고, 돌도 던지고, 끓는 물도 붓지요? 우리도 똑같습니다. 점액이나 효소를 분비하거나, 산도(pH)를 조절하거나, 심지어 성 밖에 다른 세균을 키워 우리 대신 싸우게도 합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르는 거죠. 이렇게 온갖 방법을 써도 침입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우리 몸도 안보가 중요합니다. 싸드 같은 건 없지만, 경찰도 있고 군대도 있습니다. 바로 백혈구입니다.
세균이 몸 속에 침입하면 경찰 역할을 하는 백혈구가 즉각 발견하고 적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인지). 비실비실한 놈 한두 마리 정도는 그 자리에서 꿀꺽 삼킨 후 녹여버립니다(포식). 적의 숫자가 많고 힘이 세다면 호루라기를 불어 가까운 곳의 동료들을 부르고, 파발마를 보내 군대를 요청하고, 봉화를 올려 몸 전체에 적의 침입을 알립니다(동원). 신호를 받은 경찰과 군대가 우르르 몰려와 적을 에워싸고 한판 전투를 치릅니다. 수많은 세균과 백혈구들이 한 곳에 몰려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대포를 발사하고, 백병전을 벌이기 때문에 그 자리가 붓고, 열이 나고, 빨개지고, 아픕니다(염증).
정리하면 우리는 보호, 인지, 포식, 동원, 염증 등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를 지킵니다. 세균은 진화라는 특수 무기가 있다고 했지요? 우리는 기억이라는 특수 무기가 있습니다. 치열한 전쟁 끝에 승리하여 세균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우리 몸은 적의 특징과 약점을 기억하고, 그 놈들에게만 특별히 잘 듣는 특수무기를 개발합니다. 이 특수무기는 다른 세균에게는 듣지 않지만 그 세균에게는 기가 막히게 듣습니다. 대표적인 게 항체입니다. 아까 파발마를 보낸다고 했지요? 파발마를 탄 전령이 무작정 달려 숨을 헐떡이며 “적이다!”라고 보고하는 게 아닙니다. 스마트폰으로 적의 모습을 찍어서 갖고 갑니다. 연락을 받은 군대에서는 침입자의 사진을 보고 기억을 되살립니다. 예전에 한번 싸운 적이 있는 녀석이라면 창고에서 특수무기를 꺼내서 갖고 갑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어떻게 되지요? 백전백승입니다. 이 원리를 이용한 게 백신, 즉 예방접종입니다. 약화시킨 병원체나 그 일부를 몸속에 넣어주어 미리 특수무기를 만들어 놓는 거지요.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과정이 바로 면역입니다. 면역이 강화된다는 건 튼튼한 피부와 점막, 적절한 점액과 효소의 분비, 몸속 각 부위의 환경 유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로운 세균들, 포식세포, 전령세포, 림프구 등의 백혈구, 이들이 사용하는 보체, 항체, 사이토카인 등의 무기가 어느 하나 빠짐 없이 건강하고 조화롭게 움직여야 가능한 일입니다. 면역을 경찰과 군대에 비유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만(율라 비스의 『면역에 관하여』란 책을 읽어보세요), 사실 이보다 적절한 비유는 없습니다.
우리 몸속 세포들은 끊임없이 분열합니다. 노쇠한 세포는 죽고 새로운 세포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무척 복잡해서 항상 제대로 진행되는 건 아닙니다. 정상 세포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지만, 조금만 잘못되면 암세포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몸속 어딘가에서는 매일 암세포가 만들어집니다. 그래도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은 면역세포들이 구석구석을 순찰하면서 암세포를 발견하는 즉시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면역계는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에도 맞서 싸웁니다. 면역계는 훌륭한 전사(戰士)입니다. 냉정하고, 강인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이 셉니다.
돌림병도 막아주고, 암도 막아주는 용맹한 전사들이 아군일 때는 참 좋지요. 하지만 적군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엄청난 문제가 생깁니다. 이걸 자가면역질환이라고 합니다. 어찌된 셈인지 면역계가 자기 몸을 적으로 생각하고 칼을 겨누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갑상선을 공격하면 갑상선염, 췌장을 공격하면 당뇨병, 관절을 공격하면 관절염이 생깁니다. 전신의 모든 세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면 전신홍반루푸스(SLE)라는 무서운 병이 생기고요. 하나같이 치료하기 어렵고 위험한 병입니다. 자기 몸을 공격하지는 않더라도 침입자가 아닌 엉뚱한 물질에 흥분하여 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연히 집먼지 진드기나 고양이 털에 흥분해서 마구 총질을 해대는 거지요. 싸움은 몸속에서 벌어지니까 일단 시작하면 우리 몸은 쑥대밭이 됩니다. 이걸 알레르기라고 합니다. 피부에서 싸움을 벌이면 아토피, 코에서 난리를 치면 알레르기 비염, 기관지에서 때려부수면 천식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가면역질환과 알레르기는 면역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세서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면역을 강화시킨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저렇게 복잡한 면역계의 어디를 어떻게 강화시킨다는 걸까요? 쥐에서 백혈구 숫자가 늘어났다고요? 그건 쥐 사정이지 인간은 다를 수 있다는 건 일단 제쳐둡시다. 백혈구 숫자가 늘어나는 건 좋은 게 아니라 백혈구 증가증이라는 병적 상태입니다. 백혈구 숫자가 아주 많이 늘어나는 게 그 유명한 백혈병이고요. 백혈구 증가증이나 백혈병이 안 된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면역을 강화시켜준다는 것들은 약이든, 식품이든, 무슨 치료나 요법이든 다 저런 식으로 애매하고 근거 없는 주장을 늘어 놓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만… 또 하나, 만에 하나 면역을 강화시킨다고 하더라도 면역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세서 생기는 병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면역을 강화시킨다고 입증된 방법은 딱 두 가지뿐입니다. 첫째, 전반적으로 건강해지는 겁니다. 늘 하는 얘기지만 골고루 먹고, 많이 뛰어 놀고, 푹 자야 건강해집니다. 둘째, 예방접종입니다. 어찌된 셈인지 면역을 강화시켜준다는 사이비들은 진짜 면역을 강화해주는 예방접종에는 기를 쓰고 반대합니다. 자녀는 물론이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면역을 강화해준다는 사기에 휘둘리지 맙시다. 헛갈린다면 ‘면역을 강화해 준다’는 것들은, 의사가 말하든, 한의사나 약사가 말하든, 일부러 피해 다녀도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강병철(소아청소년과 전문의,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 대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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