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원고는 『세미나 7』 강독입니다.”
올 것은 어김없이 온다. 라깡 이론을 전공한 저자 분은 몇 권의 책을 진행하면서 매번 미팅 때마다 언젠가 두꺼운 책을 한 권 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두꺼운 책’은 무엇일까? 그냥 두껍지만은 않겠지? ‘생각하지 않을 거야, 생각하지 않을 거야.’
원고지 2천 매에 육박하는 원고. 가제가 ‘생각의 아르키텍투라’라고 적혀 있다. 생각의 구조? 일단 통독을 한다. 세미나를 강독했다고 하지만 강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어. 렵. 다. ‘어쩌자고, 라깡은 세미나를 진행했고, 또 어쩌자고 선생님은 세미나를 강독했단 말인가. 게다가 왜 스물네 번씩이나 세미나를 했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왜 이 책의 편집자인가.’
전체 구조를 파악하고 초교에 들어간다. 초교를 보는 건지, 내용을 따라 읽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교정을 보다 보니 어느새 밑줄만 늘어간다. 하지만 점점 원고에 빨려 들어간다. 빨려든다, 빨려든다. ‘음, 그렇군.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은 대립되는 원칙이 아니구나.’ 발견의 기쁨과 교정의 고통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그렇게 며칠을 뭔가 열심히 돌고 있는데, 어느 날인가 여섯 살 난 아들이 책상으로 다가왔다.
“아빠… 미안한데 『비둘기야, 핫도그 맛있니?』 읽어주면 안 돼?”
재택근무를 하느라 거실이 작업실이자 아이의 놀이방이기 때문에 이런 느닷없는 부탁은 비일비재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8시가 훌쩍 넘었다. 오늘따라 아이가 뭔가 조심스럽다. 평소 같으면 자기랑 놀고 있을 아빠가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니 아빠에게 부탁을 하는 게 미안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책이 꼭 읽고 싶었을 것이다. 아이가 느꼈을 짧은 순간의 갈등. 아이는 왜 그렇게 미안했을까?
『라깡의 인간학: 세미나 7』은 묻는(다고 내 나름대로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윤리를 따라야 하는가? 우리는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 자체로 윤리적이다. 우리는 무의식이 억눌린 성욕 혹은 욕망의 덩어리로 생각하면서 무의식을 뭔가 야릇한 충동의 원형으로 생각하는데, 실상 무의식은 윤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막무가내로 뭔가를 바라고, 저지르고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인간은 이미 선한 자건 악한 자건, 어린이건 어른이건 가혹한 도덕규범에 짓눌려 있는 주체이다. 그리고 그런 윤리적 구조가 우리의 삶을 고정시킨다. 나와 당신의 삶이 대동소이한 것도, 늘 시작을 꿈꾸지만 같은 자리인 것도, 그렇게 타자로부터 주어진 윤리를 자신도 모르게 따르기 때문이다. 라깡은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사로잡힌 도덕규범과 초자아의 환상을 넘어서야 한다고. 그때서야 진정한 윤리가 시작된다고.
“그래, 읽어보자.”
병아리는 결국 핫도그를 먹고, 아들은 흡족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고. 그리고 늦은 밤, 발견, 고통, 발견, 고통, 고통, 고통. 이후로 몇 권의 그림책과 돌고 도는 재교, 삼교, 최종교의 순환 끝에 원고는 책으로 완성되었다. 누군가는 이 책에 호의적인 서평을 쓰고, 장정이 너무 훌륭하다는 말을 부러 전해주었다. 하지만 벌써 두렵다. 그 ‘언젠가’가.
“이번 원고는 『세미나 11』 강독입니다.”
이재현(위고 대표)
각자 마음속의 지치지 않는 소년을 응원합니다.
동글
2017.07.13
jijiopop
2017.07.12
lyj314
2017.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