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열과 대중 사이의 오해
실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전작들보다 더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실마리를 던져두었다는 점에서 쉬운 감상을 보장한다.
글ㆍ사진 이즘
2017.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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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나 피쳐링으로서의 활동이 아닌 정규 앨범을 발표하는 이승열과 대중의 사이에는 일종의 오해가 있다. 오해의 시작은 대략 이후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라디라」 등 다소 진입장벽이 낮고 출중한 멜로디를 가진 곡들과 이승열의 저음 보컬이 대중에게 각인되었던 순간이 저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은연중에 이승열에게 소위 ‘모던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부드러운 사운드(어쩌면 러브홀릭스의 「Butterfly」처럼)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는 예상 밖의 앨범이었으나, 단보우 연주를 비롯한 생경한 월드 뮤직 스타일과 난해한 실험이 결을 이루면서 ‘잘 모르지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에 들어서도 난해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차례 광풍이 몰아치자 신보 <요새드림요새>는 사람들에게 기대는 하지만 그리 신나지는 않은 기다림이 되었다.

 

하지만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면 이전에도 이승열은 그다지 친절한 아티스트가 아니었다. 예술성과 대중성이 가장 극적인 성취를 이루었던 에서도 황폐한 절규를 외치는 「Lola (Our Lady Of Sorrows)」나 「D. 머신」이 듣기 편했던 노래는 아니었다. 1집과 2집도 수록곡들이 전형적인 대중음악의 길이와 형태를 띄었다 뿐이지 「Mo better blues」 같은 곡들에선 이승열식 팝의 마이너함을 강조한 모습을 보여줬고, 유앤미블루 시절로 돌아가면 이런 의심은 한 층 깊어진다. 더군다나 이승열의 공연을 가본 팬이라면 알 수 있듯이 그의 공연은 관객들이 알고 있는 레퍼토리를 라이브로 환기시키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발표하지도 않은 다음 앨범의 수록곡들로 공연의 반을 채운다던가 그나마 알고 있는 노래도 과한 편곡을 통해 따라 부르기 어렵게 만들며 공연은 이승열 자신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하나의 실험으로 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승열에게 걸고 있던 기대라는 것은 사실 대중적 캐치에도 능한 이승열이라는 음악가의 일면만을 보고 우리가 스스로를 결박한 결과에 가깝다.

 

여전히 이승열은 불친절하다. 이 사실은 ‘전작보다는 쉽다’는 전제를 깔아도 변치 않는다. 첫 곡 「지나간다」부터 쉽게 의미가 집어지지 않는 가사의 잔치이며 곡 사이사이를 활강하는 이승열의 애드립은 보컬로서의 진가를 드러낸다거나 음악의 흥을 고조시키는 역할과는 거리가 멀어서 주정 혹은 신음소리처럼 들려 감상을 방해하곤 한다. 그러다 「Smmfot」의 말장난 혹은 언어유희를 맞닥뜨리면 그 난해함에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다수의 곡들이 뚜렷한 후렴의 형태조차 갖추고 있지 않으며 후렴을 굳이 나눌 수 있는 곡조차도 귀에 잡히는 멜로디가 없어서 가사의 반복을 통해 곡 구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아마 이 노래들 역시 이승열의 공연에서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들은 아닐 것이다.

 

4집 의 첫 곡 「Minotaur」에서 이승열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구절을 인용한다. 이 인용답게 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규정지은 이승열 자신을 주제로 낯선 사운드의 벽을 쌓아나간다. 가창과 연주라는 형태로 양질의 이차가공이 이루어진다면 음악에서 기존 작품을 인용한다는 것은 작자의 사상을 나타내는 우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 점에서 김수영의 시 <현대식 교량>을 차용한 「지나간다」는 의미심장하다. 식민지 시대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와 충돌하는 과정을 묘사한 김수영처럼 이승열은 나이듦과 젊음의 충돌과 화해를 ‘사랑의 터득’으로 승화시킨다. 이승열은 가수이기 이전에 자연인으로서의 현실을 노래로 모방해내며 그만의 리얼리즘을 구축하는 것이다. 첫 곡부터 이러한 해석의 단초를 던지면서 <요새드림요새>는 작자와 수용자의 게임처럼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두고 수렴과 발상을 반복한다. 「검은잎 (Blackleaf)」에서 기형도를 찾아내는 것, 「Dream」에서 앨범 제목 <요새드림요새>의 의미를 유추하는 것 등 자유로운 감상의 실마리를 얻는다면 「Cup blues」가 묘사하는 인생의 고난도, 「Smmfot」의 말장난도 나름대로 곱씹고 즐기는 순간에 이른다. 중요한 것은 이 수북한 말과 소리의 뭉치들을 정확히 이해하느냐가 아니라 이해하려 노력하는 감상 그 자체에 있다.

 

도무지 매혹을 생산하지 못하는 듯한 사운드 역시 이승열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음악가로서의 고집이 담긴 산물이다. 수록곡 하나하나가 얼마나 캐치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는가에 집중하기보다 곡을 진행시켜가면서 어떻게 긴장감을 조성하고 절정을 쌓아 가는지 귀를 기울인다면 곡이 달리 들린다. 일례로 「Smmfot」처럼 록킹한 기타 위주로 빈 공간을 강조한 도입부가 알렐루야를 외쳐대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을 붙여 가는지 집중해서 듣다 보면 노래의 꽉 짜인 리듬 파트 등에 귀가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승열은 이번 앨범에서도 다수의 악기를 홀로 연주한다. 타인의 영향을 배제하고 레코딩 과정을 온전히 개인의 통제 하에 두기위해 이승열이 전작들부터 해오던 작업 방식인데 완성된 곡을 밴드가 다 같이 연주하는 식이 아니라 한 명의 연주자가 얇은 천 조각을 하나씩 쌓아올려 두텁게 만들듯 지난한 반복을 통해 주조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의 치밀함과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악기들이 광포하게 내지르는 후렴구의 「Vulture」를 듣다보면 소수의 연주자가 홈 레코딩 방식으로 악기들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녹음한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처럼 <요새드림요새>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면서 전작들보다는 쉬운 길을 가되 이승열 본인의 작가주의적 자세를 잃지 않는다.

 

서두에서 언급한 이승열과 대중 사이의 오해를 다시금 끄집어 내본다. 이 오해는 결국 다음과 같은 해묵은 질문을 다시 묻게 한다.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대중음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질문의 답을 더 이상 시와 고전조차 읽지 않는 퇴보한 대중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요새드림요새>는 그런 선민의식과는 다른 곳에 위치한다. 올더스 헉슬리는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정작 정보를 발굴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놓치고 마는 대중에 우려를 표한다. 이 앨범은 이처럼 그저 쉽게 얻어지는 표면의 정보가 아닌 이승열이 던져둔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가며 얻어내는 해석 자체에 의의를 둔다. 우리가 이 노래들이 너무 어려웠고 그래서 다시 이 음반을 듣지 않게 된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조금이나마 ‘내가 듣고 있는 이 소리는 무슨 의미일까’ ‘이 가사는 대체 무슨 뜻인가’ 고민해 보았다면 이미 기존의 많은 대중음악과는 상이한 감상법을 경험한 것이다. 더군다나 <요새드림요새>는 실험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전작들보다 더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실마리를 던져두었다는 점에서 쉬운 감상을 보장한다. 이승열의 의미는 여태껏 쉽사리 찾아볼 수 없던 작가주의의 발현에 있다.


이기선(tomatoapp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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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