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는 날것, 살아있는 것, 매번 새롭게 읽히는 것”
보통 시인들이 시집 한 권을 완성하는 데 짧게는 삼 년에서 보통 오 년, 길게는 십 년도 걸리거든요. 그걸 단숨에 집어 삼키려고 하면 안 돼요. 시인이 그것을 내놓기까지 창작과정에서 겪은 것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따라가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ㆍ사진 신연선
2017.09.19
작게
크게

 

_15A1324.jpg

 

좋은 시는 지옥에서 올라온 물건, 놀랍고 의외의 것, 예기치 않은 사건이다. 시는 직관으로 직관을, 무의식으로 무의식을 드러낸다. 이 창의성의 총체, 의외의 발상, 관성적 익숙함의 전복! 시가 종이에 쓰이고 종이에 인쇄되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 누가 시가 전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가?(189-190쪽)

 

“정체성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시인”이라는 장석주에게 그러므로 시란 가장 가깝고, 가장 즐겁고, 가장 새로운 것이리라. 『은유의 힘』에는 시인 장석주의 뜨거운 시적 정의가 가득 담겨있다. 비밀은 ‘은유’다. 이 비밀의 정체를 하나씩 해체하며 40년 동안 받아온 시에 대한 물음들, 시가 무엇인지에 대한 시인만의 대답을 기록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울어주는 존재 시인. 그들이 대신 말해주는 삶의 이면들을 따라가는 일은 어쩌면 단순한 삶을 조각 내는 일, 더 나아가 삶을 새로운 모양으로 조각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시의 무용함이 주는 가장 위대한 효용이다.

 

놀라움이 있는, 시


공저를 제외하고도 올해 지금까지 출간한 책만 일곱 권이에요. 출간 일정이 유동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도 많은 숫자인데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규칙적으로 글을 쓰신다고요.

 

결과적으로 다작이죠. 하지만 매일 그렇게 쓰니까요. 일 년에 육천 매 안팎으로 쓰기를 십 년 이상 하고 있거든요. 지금도 출판사에 넘어가 있는 원고가 다섯 개 정도 있고요. 쓰고 있는 원고가 약 열세 권 분량의 작업이에요. 오래된 것은 5-6년 째 쓰고 있고요. 내년이면 총 저서가 약 백 권 넘게 될 것 같네요.


매일 새벽 세 시나 네 시에 눈을 떠요. 그때부터 대여섯 시간 쓰고요. 밥 먹고, 산책하고, 오후에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서너 시간 또 작업을 해요. 그리고는 들어가서 조금 쉬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아요. 사람도 거의 안 만나고요. 지금이 제 인생에서 아마 가장 생산성이 높은(웃음) 시대예요. 갑자기 많이 쓴 건 아니고 꾸준히 써왔어요.

 

책의 면면도 다양해요. 『조르바의 인생수업』, 『사랑에 대하여』부터 이번 『은유의 힘』까지 다방면의 글쓰기가 눈에 띕니다.


다 장르가 다른 책들이죠. 가까운 시일 안에 나올 책은 ‘고양이와 재즈, 하루키 탐구서’예요. 하루키에 관한 글들만 구백 매 가까이 해서 출판사에 원고가 넘어가 있어요. 지금 쓰고 있는 책은 ‘베이비부머를 위한 변명’이고요. 베이비부머의 삶을 탐구한 내용이에요. 여러 방면으로 계속 작업 중이에요.

 

이 정도 되면 주요 관심사를 특별히 묻는 것도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정말 다양하네요.


역시 제일 큰 관심은 인간이죠. 인간 탐구. 이에 관해서는 또 출판을 기다리는 원고가 있는데요. 제 관심은 문학, 작가, 인간 등에 대한 것들이 많아요. 사물도 관심이 있고요. 현재 <조선일보>에 ‘장석주의 사물극장’이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거든요. 작가와 사물에 관한 글을 백 개정도 쓰려고 하고 있어요. 작가나 유명인들과 그들이 애착을 가졌던 사물을 통해서 인간을 보는 거예요. 결국 그것도 인간으로 돌아오는 거죠. 이제 마무리해야 할 원고가 죽음에 관한 것이고요.

 

시에 대해 쓴 『은유의 힘』도 생각해보면 인간과 문학에 대한 관심사의 연장선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히 문학인데요. 글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적 정의가 인상적이에요.


40년 째 시를 써왔고요. 제 정체성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시인이죠. 그동안 끊임없이 ‘시가 뭐예요’, ‘시를 어떻게 써요’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는데요. 이 책은 40년 동안 받아온 그 물음들에 대한 제 대답이에요. 저에게도 시가 뭔데 평생 이렇게 붙잡고 있는가 하는 의문 같은 것들이 있었고요. 따라서 제게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주었던 시들, 보들레르나 랭보, 네루다, 릴케, 휘트먼, 서정주, 이육사 그리고 최근에 등단한 시인들의 시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썼어요. 이 글들은 쓰면서 굉장히 몰입했던 글들이에요.

 

‘좋은 시는 예기치 않은 사건’, ‘시는 그림자들의 노래’ 라고 했어요.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될, 선생님의 정의를 이 자리에서 들려주신다면 어떨까요?


좋은 시는 반드시 사물과 경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품고 있어야 해요. 독창적이어야 하죠. 독자들에게 놀라움 같은 것들을 줘야 해요. 새로운 인지에 닿게 하는 힘, 놀라움 같은 것들이 있어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겠죠. 진부한 감상을 늘어놓는 것은 좋은 시가 될 수 없어요. 그것은 개인의 한탄이나 넋두리,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아요. 오히려 좋은 시들은 감성을 억제해요.

 

그러면서 유진목 시인의 시를 꼽으셨죠. 「식물의 방」이라는 시를 읽으면서였는데요.


유진목 시인의 시를 읽을 때 좋았어요. 그러면서 왜 이 시가 좋은지 생각해보는 거죠. 유진목 시인의 시를 읽기 전에는 시인의 이름조차 몰랐거든요. 시집을 통해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됐고, ‘좋은데? 다른 시인과 다른 부분이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이성복 시인이 그랬고, 김행숙 시인을 처음 봤을 때 그랬고, 최근에 황인찬 시인, 유진목 시인을 봤을 때 그랬어요. 나를 놀라게 하는 부분을 갖고 있는 거죠. 늘 보지만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탁 잡아채서 독자들에게 줘요.

 

그런 시가 시간을 견디는 거라고도 하셨죠.


그렇죠, 시간은 굉장히 파괴적인 거거든요. 따라서 좋은 시들은 시간이 흘러도 진부해지지 않는 거죠. 시간을 견디는 새로운 힘 같은 것들이 내장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 시들이 좋은 시들이에요.

 

_15A1187.jpg

 

눈 밝은 비평가가 더 나와야


이른바 ‘예언자 없는 시대의 시’가 나아가야 할 곳을 물어야 할 것 같아요. 시가 많은 곳에서 살해당하고 매장 당했다는 문제의식도 내보였는데요.


한국만 해도 시인이 오만 명이라고 해요. 한 해에도 수많은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수많은 시들이 발표되고, 그 시들이 SNS를 통해 유통되죠.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아주 다양한 시들이 새겨져있고요. 그런데 저는 많은 시들이 옥석이 가려지지 않은 채 함부로 뿌려지고, 오용되고,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들이 뒤섞여 있는데요. 좋지 않은 시들이 마치 좋은 시인 양 제시되면 독자들이 혼란을 겪을 수 있겠죠. 그런 면에서 고급 감식안을 가진 비평가들이 독자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많은 비평가들이 시를 정확하게 잘 읽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시를 읽는 데 있어 독자들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지 않은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필요한 비평가의 역할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김현 선생 같은 분은 시인을 행복하게 했던 비평가예요. 김현 선생의 눈에 띈 시인과 시들은 풍부한 의미로 재해석되고 그렇게 독자들에게 주어졌거든요. 마치 성찬을 받는 느낌이죠. 시인도 행복하고 독자도 행복해요. 그런 비평가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황현산, 신형철 비평가처럼 눈 밝은 비평가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비평가들이 지금은 너무 드물다고 봅니다.

 

지적하신 오용되는 시, 좋은 비평의 부재 등으로 인해 독자가 시에 가닿지 못하게 되는 일도 많아요.


비평가들의 소임이 굉장히 중요해요. 저는 우리 시대의 비평가들이 그런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늘 해요. 좋은 시인이란 좋은 비평가에 의해서 읽혀진 시일 거예요. 정말 좋은 시인도 좋은 비평가를 만나지 못하면 그 가치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을 수가 있거든요. 물론 어느 땐가는 드러나겠죠. 하지만 되짚어보면 우리가 좋은 시라고 생각했던 시인들은 좋은 비평가가 먼저 알아보고 독자들에게 시인을 소개했다는 거예요. 

 

시가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는 한편 시대 가치도 변화해요. 변화하는 가치에 따라 다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는 부분도 있고요. 가령 김수영 시인의 「죄와 벌」 같은 시의 폭력성에 대해 회자된 적이 있는데요. 이에 대해 글을 쓰시기도 하셨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시를 지금 페미니즘 시각으로 읽으면 김수영은 나쁜(웃음) 마초죠. 그렇지만 그 시만 단편적으로 읽어선 안 되고 김수영의 생애사라는 큰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해요. 김수영은 결코 자기가 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완벽한 존재도 아니고요. 늘 자신이 비굴하고, 한 인간 존재로서 남루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는데요. 그런 것들을 감추지 않고 폭로했다는 것이 다른 시인들과 다른 점이에요. 실수, 실책, 비루함, 나약함, 속물성, 자기 존재 안에 깃든 폭력성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마주서려고 했던 거죠. 그 시도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하죠. 그 시의 다른 뜻은 ‘내가 이렇게 비루한, 마초적 인간이야’라고 자기폭로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자기 폭로의 정점은 아내를 때린 것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우산을 두고 왔지, 혹시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어쩌나, 이런 걱정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폭로예요. 이것은 철저하게 자기 성찰적 행위인 거예요.
 
앞서 말씀하신 비평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어요. 텍스트와 함께 콘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을 한 명의 독자가 해내기는 어려운 일이잖아요.


시인 전체 생애의 맥락, 혹은 그 시인이 살았던 시대 전체의 맥락 속에서 시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훈련된 비평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 면에서 시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에 비평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런데 요즘의 많은 비평가들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어요.

 

그렇다면 보통의 독자들은 시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시를 자주 읽고, 외우는 경험도 해보면 좋겠어요. 시가 갖는 리듬과 사유들의 흐름, 맥락이 자양분처럼 스며들어 오도록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시는 날것, 살아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것을 마치 죽은 것, 고정불변의 의미체, 닫힌 텍스트로 접근하는 것이 학교에서 배운 시죠. 시는 어떤 맥락 속에서 읽어내느냐가 중요하고요. 내 경험과 감정의 맥락이 달라질 때 그 시도 다르게 다가와요. 하나의 시는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에 따라 매번 새롭게 읽힌다고 생각하죠.

 

시의 남용을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SNS 덕분에 시가 더 넓은 곳으로 가닿기도 한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시가 의미의 집약이라는 점에서 SNS와 잘 맞다 싶어요. SNS로 전달하기가 좋죠. 그렇지만 그게 시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일인 거죠. 시는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장강(長江)이고 산맥일 수도 있는 거예요. 그것을 작은 것, 단순한 것, 풀잎이나 물방울 같은 것으로만 오해할 수도 있다는 거고요. SNS를 통해 시를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 시인의 대표적 시집을 통째로 읽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_15A1214.jpg

 

불행을 대신 살아주는 존재


한국사회가 들떠있다는 진단도 하셨는데요. 그 지점에서도 시 읽기는 좋은 처방이 될 것 같아요.

 
한국사회는 들떠있고, 과장되고, 피상성으로 넘쳐나는 곳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를 돌아보는 고독의 시간을 많은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것 같아요. 때때로 일어나는 반응과 자극으로 이루어진 즉물적 삶을 사는 데 우리가 너무 몰두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죠. 멈추고, 고요 속에서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그런 시간이 더 필요할 거예요. 자기 관조의 시간이죠. 한국사회가 지나치게 성장 일변도의 시대를 거쳐 왔잖아요. 실적을 내야하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섬겼죠. 그러다보니 멈춰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의 가치를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한 편의 시를 깊이 읽을 때 우리가 그런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시는 또 상당히 중요하죠.

 

생산성과 효율성에 대한 반문이 중요하겠네요. 책에서도 ‘쓸모가 있는 것, 유용한 것만이 가치가 있는가’ 라고 하셨죠.


사실 시의 여러 쓸모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시는 우리 삶의 다양성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예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왕성한 호기심, 열정 같은 것들이 뜻밖에도 문명 발전의 촉매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동물은 절대로 생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쓸데없는 짓은 안 하잖아요. 먹이활동과 생식활동뿐이죠.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 말고도 이상한 짓들을 한다는 거죠. 잔디밭에 작은 공을 굴려서 집어넣는다든지 검은 돌과 흰 돌을 나눠 쥐고 한 점 씩 놓는다든지 노래를 부른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시를 쓴다든지. 이런 것들이 모두 쓸데없는 짓이죠. 결국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열정은 근본적으로 쓸모없는 것에 대한 열정이거든요. 이런 것들을 통해 인류 문명이 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인간이 먹는 문제, 후손 만드는 문제에만 집착했다면 오늘날 같은 다채로운 문명 세계도 열리지 않았겠죠.

 

그렇게 보면 시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군요.


시인은 늘 빈둥대고, 백수 같고, 멍청해 보여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사회가 획일화, 표준화하려는 압력 속에서 견뎌내고 ‘NO’ 할 수 있는 존재인 거죠. 우리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존재, 우리 불행을 대신 살아주는 존재일지도 몰라요. 조선시대 때 ‘곡비’라는 직업이 있었거든요. 대신 울어주는 직업이 있었어요. 시인들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싶어요. 우리들의 슬픔과 불행을 우리를 대신해 아파하고 울어주는 존재가 바로 시인들이죠. 그런 존재들을 우리가 허용하고, 포용하고, 함께 가야 하겠죠.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의 기생충으로 보는 것은 전형적인 유물론적 세계예요. 실제로 소련에서 요세프 브로드스키(Joseph Brodsky)가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추방됐잖아요. 그 재판을 보면 그게 얼마나 웃기는 사건인지, 얼마나 인간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에 그친 사건인지 알 수 있어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동시대의 시인들을 호명해주는 작업도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특별히 주목하는 젊은 시인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이장욱, 유희경, 박준 같은 시인들이죠. 그밖에도 보석 같은, 새로운 시가 끊임없이 나오거든요. 지금도 나오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각자의 감성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날 수 있고요. 수고스럽지만 자기 힘으로 그런 시인을 발견해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에요. 그런 즐거움을 저한테 다 빼앗으라고 얘기해서는 안 되겠죠.

 

故마광수 작가 추모글을 <중앙일보>에 쓰셨어요. 작가를 ‘우리 사회 전체가 공모해서 죽인 것’이라고 하면서 『소돔 120일』을 쓴 사드에 비견했는데요.


마광수 교수나 사드나 바타유가 다를 바가 없어요. 같은 길을 간 사람들인데 사드나 바타유는 대단한 사람이고 마광수는 아니라고 말할 순 없는 거죠. 사드의 『규방철학』이나 바타유의 『눈 이야기』 보면 마광수 교수와 똑같아요. 역겹고, 더럽고, 인간 욕망의 밑바닥을 다 드러내죠. 그러나 그것은 허구, 상상 속 이야기거든요. 누구나 그런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에요. 1980년대에 그런 이야기를 쓴 건 마광수 교수 하나였어요. 저는 그런 우리의 지식 생태계 혹은 문학예술 생태계 속에서 다양성의 존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제 취향은 아니에요. 하지만 마광수 교수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거죠. 정말 좋은 작가, 시인은 한 사회가 금기시하는 것마저 뚫고 나가야 하고요. 그러면서 시대화의 불화가 생기는 것이거든요. 문학사를 보면 위대한 작가와 시인들은 언제나 그 시대와 불화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벌써 평가가 바뀌고 있고요. 앞으로 더 바뀔 거라 생각해요.

 

『즐거운 사라』 출간으로 당시 출판사 대표였던 시인도 함께 수감된 일까지 있었잖아요.


마광수 교수가 쓴 것이 외설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런 좀 이상하고 기이한 짓을 하는 존재도 필요하다고 용납해야 한다는 거죠. 그 사람을 마치 1급 전염병 보균자처럼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감옥을 보내고, 모욕을 주고, 불이익을 당하게 했던 건 굉장히 야만적인 거예요. 검찰 권력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따지고 독자가 읽어도 되는지를 판단하려고 하는 자체가 대단히 잘못되었던 거죠. 그것은 문단 내 비평가들의 일이에요.


당시 적용된 것이 ‘음란문서 제조 및 반포’에 관한 법률 위반이었거든요. 거의 사문화된 법을 가지고 강의 중인 대학 교수를 감옥에 넣었다? 그 정도 중대 사안이 아니잖아요. 출판사 대표를 새벽에 붙잡아다 감옥에 넣고요.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죠. 저희가 도망을 가지도 않고요. 책이 나와 있으니 증거인멸 우려도 없는데 말이에요. 일종의 망신주기, 모욕주기였던 거죠. 응징이었던 거예요.

 

권력의 전형적인 길들이기였군요.


1991년에 검찰이 『즐거운 사라』를 처음 출판한 서울문화사 측에 자진수거를 명령했어요. 그래서 자진수거를 했죠. 그때 마 교수가 억울하다, 꼭 책을 다시 냈으면 좋겠다 했어요. 원래 제가 내려고 했던 책은 『자궁 속으로』라는 작품이었거든요. 마 교수가 억울해 하기에 『즐거운 사라』를 읽어봤더니 사드의 『규방철학』과 표현 수위에서 크게 차이가 없었어요. 출간을 했더니 감히 검찰 권력의 역린을 건드렸다 해서 화를 낸 거였죠. 결국 두 달 만에 풀려났어요. 엄청난 사회적 소동에 비하면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그것이 마 교수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됐어요. 제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그 이듬해에 출판사를 접었고, 사업이나 가정에서 엄청난 내상을 입었어요. 결과적으로 풍비박산이 났어요. 이혼을 당했고요. 빈털터리가 됐어요. 이후 십 년 동안 엄청나게 고생을 했죠. 이런 것들은 그동안 얘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고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요.

 

이제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이런 내용을 앞서 얘기한 ‘베이비부머를 위한 변명’에 다 쓰고 있어요. 그것을 빨리 출간하고 싶어요. 요즘 굉장히 열심히 쓰고 있는 글이에요. 글의 일부를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는데요. 반응이 엄청나더라고요.

 

_15A1498.jpg

 

천 개의 대답을 보여주는 시


이 책을 독자들이 어떻게 읽어줬으면 하세요?


시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시의 비밀을 좀 알려주고 싶었던 거예요. 시의 비밀을 은유라고 봤고요. 그 은유를 보면 시라는 수수께끼를 다 풀 수 있다고 힌트를 준 거죠. 사실 시는 은유의 덩어리거든요. 왜 은유를 쓰는지, 은유를 왜 쓰는지, 어떤 은유가 좋은 은유인지, 이런 것들을 정말 자유롭게 펼쳐놓았으니까요. 시를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시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주면 좋겠어요.

 

그 면에서 확실히 성공하신 것 같아요. 이 책을 읽으면 시가 읽고 싶어지거든요.


책에서 또 한 가지, 시를 읽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어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던 것과 다른 방식의 시 읽기죠. 시를 시 자체로 즐기고 향유하는 방식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시 해석도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시가 다채롭게 해석될 수 있는지 봤어요. 시는 항상 하나의 대답이 아니에요. 천 개의 독자가 읽으면 천 개의 대답을 보여주는 것이 시거든요. 그래야만 좋은 시고요. 시는 모든 부분이 명확하지 않아요. 시의 30% 정도는 해석되지 않는 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연구자들에게 그것을 해석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해요. 100% 다 이해되는 시는 생명이 짧다고 생각하죠.

 

계속해서 다시 읽히는 시, 고전이 된 시들이 좋은 시겠죠.


이를 테면 1934년에 이상의 「오감도」가 <조선중앙일보>를 통해 매일 15일 동안 연재가 되었는데요. 원래는 30일 연재 예정이었다가 독자의 항의 때문에 중단한 거였죠. 당대의 독자들은 전혀 그 시를 이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던 거예요. 뭔가 모욕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거죠. 그 「오감도」 연작은 지금도 새로운 해석이 나와요. 수천 편의 연구자 논문과 비평이 쏟아졌지만 아직도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죠. 「오감도」1호에서 ‘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 열세 명의 아해는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무슨 뜻인가, 해석이 안 됐어요. 다양한 해석이 나왔지만 시대를 달리해서 새로운 해석들이 나올 수 있는 시죠. 그런 시, 그런 문학 작품, 결국 시간을 견디는 작품이 고전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 ‘틈’이 시의 핵심이군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독자들에게 그 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동안 부족했다는 거죠. 보통 시인들이 시집 한 권을 완성하는 데 짧게는 삼 년에서 보통 오 년, 길게는 십 년도 걸리거든요. 그걸 단숨에 집어 삼키려고 하면 안 돼요. 시인이 그것을 내놓기까지 창작과정에서 겪은 것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따라가면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시집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어쨌든 시를 읽는 것은 우리 감정생활을 굉장히 윤택하게 해주고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요. 사물을 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죠. 낯설게 보게 하고요. 익숙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인지를 제시해요. 삶이 익숙하고 되풀이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 너무나 많은 변화, 흥미로움이 뒤섞여 있거든요. 그러니까 시를 열심히 읽고 향유하는 사람들은 삶이 지루하거나 권태롭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은유의 힘 장석주 저 | 다산책방
저자는 시가 생성되는 비밀의 핵심을 은유라고 보고, 그에 관한 사유와 영감으로 가득한 문장들을 풀어놓는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은유의 힘 #시 #장석주 #시인
1의 댓글
User Avatar

두드림

2017.10.15

좋은 인터뷰 기사 감사합니다.! 하루키를 주제로 한 장석주 시인의 책, 빨리 읽고 싶어요^^!
답글
0
0
Writer Avatar

신연선

읽고 씁니다.

Writer Avatar

장석주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 시인, 에세이스트, 인문학 저술가. 그밖에 출판 편집자, 대학 강사, 방송 진행자, 강연 활동으로 밥벌이를 했다. 현재 아내와 반려묘 두 마리와 함께 파주에서 살고 있다. 1955년 1월 8일(음력),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스무 살이던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하고, 스물 넷이 되던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문학평론이 입상하면서 등단 절차를 마친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직접 경영하는 동안 15년간을 출판 편집발행인으로 일한다.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학교, 명지전문대에서 강의를 하고, 국악방송에서 3년여 동안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진행자로도 활동한다. 2000년 여름에 서른여섯 해 동안의 서울생활을 접고 경기도 안성의 한적한 시골에 집을 짓고 전업작가의 삶을 꾸리고 있다. 한 잡지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소장한 책만 2만 3,000여 권에 달하는 독서광 장석주는 대한민국 독서광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쓴다고 해서 안으로만 침잠하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니다.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한 후 15년을 출판기획자로 살았지만 더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자 업을 접고 문학비평가와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왔다. 급변하는 세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보다 잘 소통하고 교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성에 있는 호숫가 옆 ‘수졸재’에 2만 권의 책을 모셔두고 닷새는 서울에 기거하며 방송 진행과 원고 집필에 몰두하고, 주말이면 안식을 취하는 그는 다양성의 시대에 만개하기 시작한 ‘마이너리티’들의 롤모델이다.” 저서로는 『몽해항로』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일요일과 나쁜 날씨』, 『행복은 누추하고 불행은 찬란하다』,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이상과 모던뽀이들』,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일요일의 인문학』,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고독의 권유』, 『철학자의 사물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시간의 호젓한 만에서』,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공저) 등이 있다. 애지문학상, 질마재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