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벌써 한 해가 또 사라진다. 내 책장의 책들도 한 살 더 먹겠다. 그동안 나는 어떤 책을 읽었나. 신간과 오래된 책이 뒤섞인 편백나무 책장을 잠깐 바라본다. 책들은 다 사연을 품고 있다.
1.
소설을 쓰다가, 내가 뭐 이따위로 소설을 쓰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책장에서 두 사람의 책을 빼왔다. 이혜경의 소설과 신용목의 시집이었다. 게으르고 모자란 글을 쓰고 있는 나를 학대하기에 두 사람의 책은 딱 좋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혜경의 장편소설 『저녁이 깊다』를 부러워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소설은 없을 거라 생각해 왔다. 그리고 온통 아름다운 은유로 가득한 신용목의 시들을 좋아했다. 지난여름 출간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는 제목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두 사람의 책을 덮고 나면 처음부터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2.
나는 권여선의 소설들이 늘 무서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 속을 다 들켜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뿐 아니라 권여선도 무섭게 느껴졌다. 어느 술자리에선가 권여선을 처음 만나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을 때 그래서 나는 쭈뼛쭈뼛 인사도 겨우 했다. 그날 나는 정신 나간 여자애처럼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친구들과의 자리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을 그 짧은 스커트가 작가들과의 술자리에서는 지나치게 튀었고, 나는 권여선이 나를 정신 나간 여자애로 볼까봐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저렇게 정신 나간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여자애는 정말 정신 나간 여자애일 거야, 그녀가 생각할 것 같았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나는 권여선을 만날 때마다 그 짧은 스커트가 생각나 여태도 가끔씩 움찔거리곤 한다. 그녀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속 단편 「봄밤」은, 읽을 때마다 눈물바람이다. 나는 그 소설이 슬퍼서 어느 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펑펑 운 적이 있다. 그 밤은 나에게 아주 오래 기억될 것이다.
3.
중구난방 쌓여있는 책들을 나는 보통 출판사별로 분류해 책장에 꽂는다. 오랜만에 노희준의 장편 『오렌지 리퍼블릭』을 찾아냈다. 몇 년 전 나는 장편소설 일일연재를 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단골카페에 가서 작업을 했는데, 낮 열두 시에 가서 그곳에서 밥을 먹은 후 여섯 시까지 글을 썼다. 여섯 시가 넘으면 친구들이 슬슬 카페로 몰려왔고 그러면 그들과 어울려 보드카를 마시거나 저녁을 먹었다. 그날은 노희준이 전화를 걸어왔다. “놀아줘, 심심해.” 여섯 시가 넘으면 카페로 오라고 말했지만 노희준은 더 일찍 나타났다. 노트북을 편 내 앞에 앉아 “빨리 써. 아, 빨리 좀 쓰라고.” 닦달을 했다. 나는 그날 원고를 마무리하느라 진땀을 뺐다.
노희준이 장편 『오렌지 리퍼블릭』을 막 출간했을 때였다. 후배 J 『오렌지 리퍼블릭』을 읽고 내게 말했다. “내가 소설 쓴다 그러면 선배들이 막 뭐라 했잖아. 너 같은 강남 출신이 소설은 무슨 개뿔 소설이냐고. 너는 상처가 없어, 상처가!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몰라. 아니, 시골서 모내기하고 추수해야만 소설을 써? 강남 출신은 소설도 못써? 근데 『오렌지 리퍼블릭』을 을 읽는데, 그거 진짜 내 얘기 같은 거야. 아, 이런 소설도 있구나. 강남 소설도 짠하구나. 나도 이런 거 쓰고 싶다, 그런 생각했어.” J는 정말 그 소설을 좋아했다. “언니, 나 노희준이랑 연애할까? 어때?”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던가.” 그래서 노희준이랑 술을 마실 때면 종종 J를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J는 노희준에게 작업을 걸지 않았고 노희준 역시 J에게 관심이 없었다.
4.
나는 고은규의 소설을 좋아했다. 『트렁커』도 『알바패밀리』도 『데스케어주식회사』도. 나와는 아주 다른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봄 나는 그녀의 소설집 『오빠 알레르기』를 읽었다. 특히나 그곳에 실린 단편 「차고 어두운 상자」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막 웃긴데, 막 슬프다. 나는 소설이 작가를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막 웃기고 막 슬픈 고은규가 그래서 궁금했다. 어떤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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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권여선 저 | 창비
미세한 균열로도 생은 완전히 부서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탁월한 감각을 발휘해온 권여선은 그럼에도 그 비극을 견뎌내는 자들의 숭고함을 가슴 먹먹하게 그려낸다.
김서령(소설가)
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북버드
2017.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