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선아
손님이 준 편지를 자랑처럼 남편에게 내밀었다. 편지를 다 읽은 남편은 불쑥 네가 정말 부럽다고 말했다. "일하면서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실감하는 거 쉽지 않잖아. 이럴 때 보면 너 정말 부러워."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어떤 쓸모는 돈으로 증명되지만, 어떤 쓸모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데, 나는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 서점에 1961년생 손님이 다녀갔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와 동년배인 남자 손님이었다. 출근하면서 나이 많은 남자 손님과의 상담을 걱정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손님은 정중하고 재미있고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다. 사적인서점을 어떻게 알고 오셨냐고 묻자, 몸담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특별한 서점이 있으니 대표로 체험해보라며 1만 원씩 각출해서 비용을 내주었다고 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손님이 운영 중인 사업에 대한 고충으로 화제가 이어졌다. 손님은 좋아하는 시 한 편을 낭송해도 괜찮은지 물었고,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이란 시였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 한 권이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뒷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답답하고 속상할 때마다 만병통치약처럼 곱씹다 보니 어느새 시 한 편을 뚝딱 외워버렸다는 손님. 당시 나는 책 팔아서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다며 매일같이 꽁알거리고 있었다. 서점을 연 뒤로 나의 화폐 단위는 ‘책’이었다. 정가 1만5천 원짜리 책 한 권을 팔아서 내가 버는 돈은 3천7백 원 남짓. 커피 한 잔을 마시려다가 ‘이 돈이면 책 두 권을 팔아야 돼’ 생각하면 사 먹을 수가 없었다. 옷을 사려다가도 이걸 사려면 책을 몇 권 팔아야 하나 계산기를 두드리다 슬그머니 마음을 접었다. 책을 팔아 버는 돈이 너무 박하다 싶었고,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었고, 박리다 싶었다. 그런데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다니. 머리로는 좋은 시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점을 연 뒤로 내 일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씁쓸했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시간과 품을 들여 소개하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책 한 권을 팔기 위해 쏟아붓는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는 너무 궁색했다. 책을 팔아 먹고살아야 한다는 압박이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책처방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책처방 프로그램의 1회 비용은 5만 원이다. 여기엔 손님과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한 시간, 신선한 찻잎 가게 사루비아다방에서 만든 차 한 잔, 한 사람을 위해 고른 책 한 권과 편지, 포장비와 배송비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이 5만 원은 저렴한 걸까, 비싼 걸까?
서점을 준비할 때 책처방 프로그램 가격을 두고 오래 고민했다. 처음엔 ‘사람들이 이 가격이면 책처방 프로그램을 이용할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이용했으면 하는 마음에 문턱을 낮추려고 삼만 원으로 책정했다. 책값과 배송비 등을 빼면 나에게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고 책을 고르고 편지를 쓰고 포장하는 데는 적어도 다섯 시간이 드는데 말이다. 물론 3만 원도 비싸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었고, 터무니없이 싸다고 가격 좀 올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을 운영하며 깨달았다. 가격 책정 기준은 ‘이 프로그램에 이 가격이 정당할까?’여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가격은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이 가격을 합당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그래야 지치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고민 끝에 2017년 2월부터 책처방 프로그램의 가격을 5만 원으로 인상했다. 삼만 원에서 오만 원으로 가격이 올랐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겐 비싸고 누군가에겐 싼 가격이다.
매일의 덧셈 뺄셈 속에서 나는 늘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오픈 데이를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들이는 노력만큼 매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책이 잘 팔렸다면 오픈데이는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월을 끝으로 오픈데이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서점은 한 달 내내 북적였다. 시간 내어 찾아준 이들이 고마운 한편 진작 이렇게 와주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 한 손님이 남기고 간 편지를 꺼내 읽었다.
사람은 때로 튼실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다.
- 『용의자 X의 헌신』 중에서
"이런 서점원도 있구나. 이런 방식으로도 일할 수 있구나. 매일 성실히 책을 읽고 올려주시는 글을 보며 많은 날들을 위로받았어요. 맨 위에 적은 문장처럼 튼실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지혜님과 지혜님이 운영하시는 사적인서점은 존재 자체로 제 삶을 일정 부분 '구원'했다고 생각해요. 저뿐 아니라 사적인서점을 사랑하는 다른 손님분들에게도 그런 존재리라 믿어요. 책을 통해 소개해주신 글과 사람과 세상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흥미로워서 저는 '역시 세상엔 재미있는 것들이 참 많고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고맙습니다. 사실 이 다섯 글자를 전하려고 편지를 시작했어요."
손님은 내가 땡스북스에서 일하던 때부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책을 소개하는 모습을 쭉 지켜봐왔다고 했다.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 쓴 손편지는 잇속을 따지느라 내가 잊고 지내던 것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내 일의 가치를 돈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여겼다. 내 일의 쓸모를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존재를, 사적인서점의 존재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이제야 이 시구가 마음으로 이해되었다. 서점을 열고 가장 큰 이윤을 남긴 날이었다.
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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