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어떻게 해도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대책 없는 ‘검은 머리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한 대학교 동아리 ‘선배’는 사랑 고백 타이밍을 찾으며 헤맨다. ‘최눈알(최대한 눈앞에서 알짱대기)’ 작전으로, 우연을 가장한 잦은 마주침을 시도해 아가씨가 만남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마음. 마주칠 때마다 “타마타마たまたま”를 연발하며 우연인 척 오버하지만, 아가씨는 그런 사랑의 마음일랑 관심이 없다.
아가씨의 소망은 어른의 세계로 어서 진입하고 싶은 것. 선배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식대로 술 마시겠다고 다짐하며 마치 증기기관차처럼 바퀴 소리를 내면서 교토의 밤거리로 출발한다.
봄밤의 폰토초 유흥가, 아가씨는 보석을 고르는 심정으로 칵테일을 골라 마신다. 모든 칵테일이 200엔인 싼 술집에서, 술 한 잔에 황홀감을 맛보며, 변태 아저씨 ‘도도’에게 걸려들 뻔도 하고, 요괴 ‘히구치’도 만난다. 요괴라고? 맞다. 이 애니메이션은 유명한 원작 판타지 소설을 바탕으로 요괴나 ‘헌책의 신’이 자연스럽게 사람과 말을 섞고 어울린다.
아가씨는 감히 이백과 술 겨루기를 제안한다. 삼층 전차를 타고 다니며 세상의 모든 헌책과 골동품을 수집하는 천하의 술꾼 ‘이백’에게. 전설의 술 ‘모조 전기 브랜드’를 한 잔 들이켤 때마다 아가씨는 세상의 인연과 풍요로움과 기쁨으로 꽃 피듯 취해가고, 이백은 인생의 고독과 덧없음과 그저 빼앗기고 뺏는 세상의 관계를 원망하며 괴롭게 취해간다. 긍정의 힘이 이렇게 세다. 아가씨는 가뿐히 이백을 이긴다.
교토를 가르는 가모가와 물 위에 떠다니는 여름의 헌책 시장 알림 광고지를 보고 아가씨는 금세 어린 시절 감동적으로 읽었던 그림책 <라타타탐>을 그리워한다. 갇혀 있던 저택을 떠나 모험하는 작은 흰색 기관차 이야기다.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동화 <라타타탐>을 찾아 헌책 시장에 가는 아가씨와 뒤쫓는 짝사랑 선배.
가을의 대학 축제에서 우연히 무대에 오르게 된 아가씨와 선배는 사랑의 기회가 생긴 듯도 하다. 그러나 이 애니메이션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하룻밤 겪어내는 아가씨의 모험담이라는 걸 떠올리면 가을 사랑은 이른 법 아닌가. 겨울이 멀지 않았는데.
모든 사람이 심한 감기로 드러눕게 된 겨울, 아가씨는 일일이 병문안을 다니며 감기가 옮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이어진 인연을 다시 깨우친다. 그리고 마침내 선배 병문안을 하러 갔다가 헌책 시장에서 아가씨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배가 구한, 자신이 어린 시절 읽었던 바로 그 책 <라타타탐>을 발견한다. 이게 바로 판타지!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장면
사계절을 신비한 하룻밤으로 보낸 아가씨는 다음 날 아침 6시에 눈뜨며 새로운 기분을 맛본다. 선배와 서점 데이트를 하기 위해 아침 찻집에 들어서는 맑은 얼굴. 밤은 열정이고 욕망이라면 아침은 평온이고 설렘이다.
출판인인 내게, 그들의 사랑이 책으로 이루어졌다는 게 기분 좋아서, ‘어서 펼쳐 책을, 아가씨야 인생은 짧아’를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각각 ‘나홀로’ 영화관을 찾았던 한 청춘과 나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 대해 우연히 대화를 나눴다. 청춘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름다운 아니메가 그립네요. 유아사 마사아키는 유쾌하고 엉뚱하지만 엉망진창이에요.” 곧장 나는 “유아사 마사아키는 천재야. 어떻게 이런 색감과 일러스트로 빠른 비트를 만들어낼 수 있나. 일본 아니메의 새로운 경지일세”라고 답했다.
이 대화는 언뜻 바뀐 듯도 하다. 보통 옛 것의 향수에 젖는 것은 기성세대고 새로운 비트에 익숙한 것은 젊은 세대라고 할 수도 있으니. 그러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새로움에 방점을 찍을 수 없는 ‘헌책’과 ‘인연’에 대한 묘한 에피그램이 존재한다. 93분 동안 빠른 비트에 몸을 실었다가 삶의 변함없는 가치에 위무받게 되는 취향 타는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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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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