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바야흐로 5월. 봄이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에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피로 물든 민주주의의 역사가 있다.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빛나는 5월을 폭압적 권력에 대한 공포도 억압도 없이 구가하고 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1980년 5월 광주에 크게 빚지고 있다.
1979년 지난했던 유신독재정권이 자멸한 이후, 오랫동안 바라왔던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열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1980년의 봄은 잔인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포악한 군홧발은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을 짓밟고 입을 틀어막았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공포로 제압하기 위해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를 고립시키고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과를 숨기기 위해 언론을 통제했고 광주 사람들을 폭도 혹은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억지 누명을 씌웠다. 대한민국의 누구도 광주 시민들의 억울한 사정을 제대로 알 수 없었고, 알았다 해도 알릴 수 없는 공포의 시간을 보냈을 그때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 1937~2016)가 광주에 있었다. 그리고 광주에서 벌어지던 잔혹한 진실을 세계에 알렸다.
영화 <택시운전사>(2017년 작, 감독 장훈)는 1980년 광주의 비극 속으로 들어간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와 그의 취재를 도운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1980년 ‘서울의 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서울의 봄’이 끝나면서 시작되었다. 1968년에 있었던 체코의 민주화운동인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표현인 ‘서울의 봄’은, 독재자였던 대통령 박정희가 측근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국민들을 공포로 제압하기 전까지 과도기적인 6개월을 이른다. 이 시기는 유신정권의 독재로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국민들이 올바른 민주주의를 꿈꾸고 이를 요구한 시기였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몇몇 장교들로 이루어진 신군부 세력이 12.12사태라는 군사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지만 국민들은 또 다시 군부독재를 원치 않았다.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당시 국민들의 열망과 힘은 신군부 세력이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강했다.
신군부 세력은 5월 17일에 사회 혼란을 막는다는 미명하에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 신군부는 민주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대학의 문은 폐쇄되고 캠퍼스는 군인들이 점거하였다. 민주시위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신군부의 무자비한 억압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이전의 유신독재정권 시기에 학습된 공포로 위축되었다. 이렇게 서울의 봄이 무참히 끝나고 만다.
단 한 곳 광주는 달랐다. 광주 시민들은 5월 17일에 내려진 계엄령에 굴하지 않고 5월 18일에도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것은 마치 꺼져가는 민주주의를 밝히는 마지막 횃불 같은 시위였다. 그러자 신군부는 공수부대*로 구성된 계엄군을 광주로 보냈다. 그리고 전시 상황에 적에게도 하지 않을 무자비한 진압을 국민을 상대로 시작했다.
눈앞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하던 동료가, 자녀가, 형이, 누나가, 동생이 공수부대원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모습을 본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광주 시민들은 국민들에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군부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확대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광주 시민들에게 1980년 5월 21일 신군부는 시민에 대한 발포로 대응했다. 전시 상황이 아닌데도 자국민을 지키라고 있는 군대의 총에 맞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후 공수부대는 광주시를 돌아다니며 시위대뿐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이고 구타하고 강간하고 죽였다. 더 이상 평화시위를 이어갈 수 없었다. 군대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와 예비군의 무기고를 열었다. 그리고 시민군을 조직해 계엄군에 저항했다.
시민군은 강력한 저항으로 계엄군을 시 바깥으로 몰아내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계엄군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더 강하고 잔인한 진압이었다. 병력을 보강한 계엄군은 다시금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광주 시내로 들어왔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 시민들은 도청에서 마지막으로 계엄군에 맞섰다. 그러나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한 계엄군에 맞서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시민들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짓밟고 국민을 유린한 신군부를 끝내 인정하지 않겠다는 광주 시민들의 마지막 항변이었다.
도청에서 일어난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결은 결국 많은 시민이 총탄에 희생되면서 끝이 났다. 비록 광주는 계엄군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9일 남짓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사수한 광주 시민들의 정신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1980년 5월의 정신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가하는 민주주의 근간이 되었다.
시민들이 무력 진압으로 숨진 희생자를 손수레에 싣고 계엄군에 항의하고 있다. (출처: 5.18 기념재단)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린 힌츠페터
광주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신군부는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광주를 고립시키고 언론의 입을 틀어막았다.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에 쓰러져갈 때 공중파 방송은 국민들을 상대로 광주에서 폭도들이 일어나 반란을 일으켰다는 거짓보도를 해댔다. 사회의 불순분자, 공산주의자가 일으킨 폭동이라고도 했다. 광주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올바른 보도를 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체포되어 입에 재갈이 물렸다. 당시 신군부에 장악당한 한국 언론은 무기력했다. 아무도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당시 독일 제1공영방송의 일본 특파원으로 나와 있던 위르겐 힌츠페터는 다른 외신기자들보다 빨리 1980년 5월 20일 광주로 잠입한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치만 분)가 5.18이 일어난 직후 한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선교사로 가장하여 들어오는 장면이 나온다.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면 입국 금지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만큼 당시 신군부의 언론통제는 심각했고 사회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다.
영화에서는 힌츠페터 혼자 왔다고 나오지만 실제는 녹음 담당 기자였던 헤닝 루모어(Henning Rumohr)와 함께였다. 즉, 광주에 내려간 독일 방송국 기자는 두 사람이었다. 이들을 광주까지 데려간 사람이 김사복이다. 영화에서는 김만섭(송강호 분)이라는 이름의 개인택시 운전사가 힌츠페터와 함께 광주로 갔다가 훗날이 두려워 거짓으로 김사복이라는 이름을 가르쳐준다고 하지만, 영화 개봉 이후 실제 힌츠페터와 동행했던 김사복 씨의 아들이 나타나 실존인물이었던 김사복의 존재를 증명해주었다.
힌츠페터는 광주 취재 이후 김사복을 찾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지만, 김사복 씨는 1984년에 이미 유명을 달리한 상태였다고 아들 김승필이 전했다. 당시 힌츠페터 일행이 탔던 택시는 영화에서처럼 초록색 개인택시가 아니라 호텔택시로 검은색 승용차였다. 영화에서는 택시운전사와 힌츠페터의 만남이 1회성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제 김사복은 5.18 이전부터 꽤 긴 기간 여러 차례 힌츠페터의 한국 취재를 도운 경험이 있었다.
젊은 시절 힌츠페터(좌)와 김사복(우), 헤닝 루모아(좌상). (출처: 김사복의 아들 김승필 소장)
영화에서는 힌츠페터가 광주에 한 차례 방문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힌츠페터는 5.18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광주를 두 차례 방문했다. 1차 취재는 5월 20일에서 21일 사이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21일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하는 장면부터 잔혹한 진압 장면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영화에서처럼 사복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려고 추격하는 극적인 일은 없었지만, 당시 광주는 계엄군이 포위하고 있어 출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힌츠페터 일행은 기자 신분을 숨기고 사업가로 위장했고 필름을 계엄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무척 조심했다. 영화에서도 나왔듯이 신군부에 들키지 않으려고 호텔에서 파는 고급 과자통에 필름을 숨겼고 검문을 피하기 위해 1등석을 탔다고 한다. 21일 오후 광주에서 빠져나온 힌츠페터는 일본으로 필름을 가져가서 22일 나리타공항에서 바로 넘겨주고 곧장 한국으로 돌아온다.
22일 서독으로 보내진 필름은 그날 저녁 독일방송의 8시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보도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세계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사태에 경악했다. 힌츠페터의 취재는 당시 한국의 신군부 세력과 이들이 세운 정권에 대한 국제적 인상을 결정짓게 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 세력에 대한 국제적 호응과 관심을 이끌어냈다.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찍은 당시 광주항쟁의 시민군. (출처: 5.18 기념재단)
1차 취재 필름을 독일에 보낸 후 23일에 힌츠페터는 다시 광주로 잠입한다. 계엄군이 잠시 시민군에게 밀려 시 바깥으로 나갔을 때 광주로 들어간 것이다. 2차 취재 때 힌츠페터는 시민자치하의 해방구와 같았던 광주의 일상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기도 하였다. 이때도 이들을 광주로 데려간 사람이 김사복이었다.
힌츠페터의 취재는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1980년 5월 광주를 제대로 취재하지 못해서 신군부에서 탄생한 군사정권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날조했다. 그러나 힌츠페터의 그 어떤 증거보다 강력한 취재 필름은 신군부의 말이 거짓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힌츠페터가 두 차례에 걸친 광주 취재 필름을 편집하여 만든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은 훗날 민주 인사들이 몰래 한국으로 들여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상영되었고, 이를 계기로 1980년 5월 그날의 진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힌츠페터의 다큐멘터리를 뒤늦게나마 본 사람들은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에 분노했다. 그리고 광주가 우리 현대사에 남긴 메시지를 무겁게 받아들였다. 힌츠페터의 <기로에 선 한국>은 1987년 6월 항쟁이 있게 한 하나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크든 작든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는 <부활의 노래>, <꽃잎>,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26년> 그리고 <택시운전사>에 이르기까지 6편에 달한다. 각각의 영화는 제작 시기와 당시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주제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6편의 영화가 공통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광주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지는 의미다. 그것이 상처든 분노든 경악이든 정의든 1980년 5월 광주를 다룬 영화 모두는 우리 현대사가 광주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택시운전사>도 그중 하나다. 광주를 다룬 다른 영화에 비해 13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이 영화를 본 것은 2017년 개봉 당시 우리 현대사에서 광주의 의미를 되살려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끈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 신군부 : 12ㆍ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하나회와 함께 쿠데타에 참여한 장성들을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군부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칭.
* 계엄령 : 국가 비상시 국가의 안녕과 공공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헌법 일부의 효력을 일시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하여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긴급권의 하나로 대통령(최고 통치권자)의 고유 권한이다. 우리나라에서 발령된 계엄령은 국가적 환란 때문이라기보다는 내부 정치적 혼란으로 야기된 국민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발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 공수부대(空輸部隊) : 낙하산ㆍ헬리콥터ㆍ수송기 등으로 공수낙하(空輸落下)나 공중투하로써 전투지대에 투입되어 전투작전을 수행할 목적으로 편성되고 훈련된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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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영화 시나리오 작가)
이화여자대학교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박사 과정 수료.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 『한 번에 읽는 역사인물사전』, 『한 번에 보는 세계인물사전』, 『천추태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한국사 영화관』 등을 집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