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 라이트노벨 탄생
1980년대 말엽이자 90년대 초, 이 시기에 일본에서 라이트노벨이 생겨났다고 본다. 그 전까지 유행하던 두 부류의 장르소설이 있는데 하나는 SF소설, 다른 하나는 판타지 소설이다. 타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1982)』이 그 시절 SF를 대표하는 작품, 미즈노 료의 『로도스도 전기(1988)』를 판타지 대표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라이트노벨의 생성에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우주 전함의 전쟁이나 북유럽풍의 이종족들이 나오는 판타지 세계관은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후대 작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1989년, 『슬레이어즈』를 필두로 90년대 초 라이트노벨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정립되기 시작한다. 『슬레이어즈』는 천재 마법사 소녀와 그 호위를 맡은 젊은 검사의 모험 이야기이며, 국내에 『마법소녀 리나』라는 제목으로 애니메이션 방영을 해 유명해진 전적이 있다. 당대 판타지 소설의 클리셰를 깨기 위해 나타난 작품으로, 통통 튀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개그 요소, 그리고 진지한 사건들이 결합되어 한껏 가벼운 분위기의 모험담이 펼쳐졌다.
라이트노벨은 기존 판타지/SF적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점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요소로는 문고본 출판과 애니메이션풍 일러스트레이션의 삽입, 그리고 캐릭터의 강조를 들 수 있다. 문고본 판형은 106?148mm 사이즈로 주머니에나 들어갈 정도로 작은 사이즈이다. 작고 가벼운 판형 자체에서도 ‘라이트노벨’이란 명칭이 어울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격상 당대의 게임/만화/애니메이션적 요소가 담긴 내용이 주류였는데, 이에 맞춰 삽입된 일러스트는 주요 고객인 10대에서 20대 독자에게 공감을 사기에 좋았다. 그 특징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라이트노벨은 캐릭터를 매우 강조하는 소설이다. 게임스러우면서도 만화스럽고 가볍지만 특징이 분명한 캐릭터들의 모습에서 ‘라이트’라는 용어가 발생했으리라 추측한다.
이후 함께 유행했던 90년대 라이트노벨로는 판타지 작품인 『마술사 오펜(1994)』, SF의 『성계의 문장(1996)』을 비롯한 『성계 시리즈』, 그리고 현대 대체 역사물이며 메카물인 『풀 메탈 패닉!(1988)』이 대표적이다. 각 작품 모두 장르가 다양한 점이 특징이며, 이로써 라이트노벨 자체는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비슷한 작품군을 이르는 명칭임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 : 세카이계의 등장
1990년대 말엽에는 세카이계가 등장한다. 세카이계란 일종의 종말론적인 내용이 포함된 장르로 대표작으로는 『부기팝 시리즈(1998)(속칭 부기팝)』와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2001)(속칭 이리야)』을 들 수 있다. 『부기팝』은 평범한 소년 소녀의 일상과 그들이 변신한 부기팝이라는 비일상적인 존재를 드러낸 작품으로, 일상과 비일상의 전기적 이항구조로 주목을 받았다. 『이리야』는 비일상에 의해 일상이 파괴되고, 평범한 삶을 살아야 했을 소년 소녀가 세상 전쟁의 열쇠가 되어 휘말리는 설정이 돋보인다.
당시 새천년이 다가오면서 Y2K를 비롯하여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등을 통해 세계 종말론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고, 세카이계의 작품들은 소년 소녀의 감수성이 어떠한 영향을 주어 세계의 종말까지 이끌어 낼 수 있는 설정이 주를 이룬다. 세카이계의 유행은 2003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속칭 하루히)』이 나오면서 전체적으로 유행이 일단락된다.
그 외에도 좀 더 자유로운 세계관의 라이트노벨 작품이 늘어나던 시기이다. 판타지, SF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현대가 무대이더라도 SF 혹은 이능력 판타지가 반영 된다. 특히 이능배틀 계열은 점프를 비롯한 배틀 만화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키노의 여행』 같은 독특한 세계관과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 『작안의 샤나(2002)』 같이 보이 미츠 걸(평범한 소년이 특별한 소녀를 만나는 구도) 계열의 연애 구도를 지닌 배틀 작품도 이 시기에 유행한다.
2000년대 중반 : 학원물의 유행
『하루히』는 라이트노벨 역사 안에서도 꽤 흥미로운 작품이다. 우주인, 미래인, 이세계인, 초능력자와 놀고 싶다는 스즈미야 하루히를 중심으로 진짜 이능력적인 존재들이 모이지만, 평범한 주인공 쿈은 그들과 하루히의 중간에 껴서 세상의 균형을 지켜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구도로, 『부기팝』 때 사용했던 일상과 비일상의 교차를 비슷하게 사용하면서도 좀 더 판타지적 요소보다는 일상에 눈을 기울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히』 전후로 라이트노벨계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먼저 이 무렵부터 라이트노벨 원작의 애니화가 활발해진다. 그 전까지는 만화 원작의 애니화 혹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대세였으며, 라이트노벨의 경우도 일반 대중에게 알려질 정도로 유명작이 아니면 함부로 애니화를 진행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하루히』의 애니화가 대성공으로 끝나고, 라이트노벨 판매량이 급격히 올라가면서 애니메이션을 통한 원작 홍보 효과를 노리기 위해 많은 라이트노벨 작품을 애니화하게 된다.
점차 학원일상물의 유행이 번진 것도 특징이다. 기존 라이트노벨은 학교를 무대로 하는 학원물이거나 등장인물들이 큰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일상을 즐기는 일상물이더라도 거의 반드시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갔다. 그러나 『하루히』 때 일상물의 편린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토라도라(2006)』 에 와서 이례적으로 판타지 요소를 뺀 라이트노벨이 등장, 이때부터 설정상의 판타지를 배제한 작품이 늘어난다. 그렇다고 판타지적인 작품도 아직 건재하여, 이능배틀적 요소와 학원물을 섞은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2004)』 , 『바보와 시험과 소환수(2007)』 가, 그 외에도 현대 판타지로서 『듀라라라!!(2004)』 , 『공의 경계(2004)』 , 『이야기 시리즈(2006)』가 등장, 각각 고유의 매력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기를 끌었다. 세카이계의 유행이 끝나고 일상물이 등장했던 이 시기까지가 그나마 장르에 구애 받지 않고 재미 자체로 다양한 라이트노벨이 흥했던 시절이다.
2000년대 후반 : 문장형 제목이면 잘 팔린다?
이때부터 라이트노벨의 제목이 노골적으로 길어지기 시작한다. 원인은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속칭 내여귀)(2008)』 의 등장이다 이전부터도 긴 제목은 많았으나 『내여귀』 로 인해 "문장형" 라이트노벨 타이틀이 유행하여 범람한다. 이유가 있다면 아마 라이트노벨 작품이 이전보다도 많아졌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이미 “무슨무슨 전기” 같은 제목은 너무 흔하고 평범하며, 범람하는 라이트노벨 중에서도 더 주목받고 팔리게 해야 하는 상황. 어떤 타이틀을 붙여야 잘 팔릴 것인가를 연구하던 끝에 나온 전략이 바로 문장형 제목이다.
문장형 제목의 특징 중 하나는 ‘이미 초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제목만으로도 이미 내용이 직관저긍로 전달되며, 독자들이 제목을 통해 라이트노벨을 골라 볼 수 있게 되었다.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크게 붐을 일으킨 덕분에 기상천외한 문장형 제목의 라이트노벨은 지금도 건재하는 추세이며, 현존하는 가장 긴 타이틀은 『(이 세계는 이미 내가 구해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었고, 여기사와 여마왕과 성에서 즐겁게 살고 있으니 나 말고 다른 용자는) 더 이상 이세계에 오지 마세요.(2017)』 로 추정된다.
다시 2000년도 중후반으로 돌아와서, 『나는 친구가 적다(속칭 나친적)(2009)』 또한 이 시기에 나온 문장형 타이틀 작품으로, 러브 코미디라는 장르까지 겹치면서 『내여귀』 와 쌍벽을 이룬 라이벌 작품이다. 이 시기부터 판타지적 요소가 없이 현실을 무대로 하는 하렘형 러브 코미디 작품이 크게 유행한다. 이 유행은 후기 작품에 해당하는 『역시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잘못됐다(2011)』 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한편 『인피니트 스트라토스(속칭 IS)(2009)』 와 『소드 아트 온라인(속칭 소아온)(2009)』 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는데, 학교 이능 배틀물은 『IS』 의 영향으로 무장 소녀 하렘물 형태로 한 장르가 형성되어 갈라진다. 한편 『소아온』 은 2000년도 후반부터 본격 일본에 보급된 인터넷과 온라인 게임 문화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 점차 현재의 게임형 라이트노벨 유행을 주도하는 작품으로 거듭난다.
2010년대 초중반 : 키워드는 게임 그리고 이세계
게임에서 모티브를 얻은 라이트노벨이 늘어나지만, 아직은 온라인 게임보다는 기존의 스토리가 있는 RPG가 더 일본인 성향에는 맞았다. 용사가 여행을 떠나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한다는 드래곤퀘스트적인 클리셰 플롯을 깨는 작품이 등장하여, 『마오유우 마왕용사(2010)』 나 『알바 뛰는 마왕님(2011)』 등, 본디 악역이어야 하는 마왕의 이미지를 순화한 작품이 잠시 유행한다.
이어 온라인 게임을 소재로 하며 주인공이 마왕 포지션인 『오버로드(2012)』 , 마찬가지로 게임을 소재로 하는 『노 게임 노 라이프(2012)』 가 등장하는데,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이세계 전이/전생’ 요소이다. 두 작품 모두 원래 살던 세계에서 다른 세계(판타지 세상)로 넘어가는데, 주인공의 특수한 능력이 그곳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된다는 식의 플롯을 지니고 있다. 이는 『소아온』 에서 보여준 ‘게임과 새 세상’이라는 면이 더욱 강조된 형태로 후대 라이트노벨군에 강한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유행을 타 나타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게임 같이 수치화된 스테이터스를 볼 수 있는 판타지 세상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2013)』 , 어쩐지 온라인 게임이 현실화된 것 같은 『재와 환상의 그림갈(2013)』 , 죽어서 판타지 세계에 되살아난다는 플롯의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2013)』 , 『책벌레의 하극상(2015)』, 이세계로 건너가 특수한 능력으로 해결해 나가는 주인공의 『Re: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2014)』 , 심지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이세계 전생하는 작품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2014)』 , 『거미입니다만, 문제라도?(2015)』 등이 있다.
재미있는 점은, 해당 작품들이 2000년도 초반 한국에서 막 판타지 소설이 생성될 당시에 온라인 게임에 영향을 받아 쏟아져 나왔던 소설군과 설정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유는 세 가지로 추정할 수 있는데, 첫째로는 선행한 라이트노벨의 영향, 둘째는 인터넷 사용과 온라인 게임의 영향, 셋째로는 인터넷 상에 편하게 소설을 쓸 수 있는 사이트가 생긴 영향으로 보인다. 실제로 기존의 출판사에서 투고된 작품을 통하거나 대회를 통해 작가를 뽑아온 라이트노벨과는 달리, 요즘은 ‘소설가가 되자’라는 사이트를 통해 많은 작가들이 배출되었다. ‘소설가가 되자’는 일본의 인터넷 소설 투고 사이트로, 아마추어들이 무료로 다양한 소설을 써서 올리고 있다. 요즘은 양질의 작품이 인기를 끌면 라이트노벨 출판사에서 작가를 스카우트 해가는 분위기이며, 점차 웹소설 출신의 라이트노벨 작가가 늘어나고 있다. 『그 자. 후에…(2016)』 또한 판타지 세상이 게임처럼 묘사된 작품으로, 해당 사이트에서 먼저 연재를 했던 것이 출판사와 이어진 케이스이다.
201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추측하는 라이트노벨의 전개
라이트노벨이 일본에서 웹소설화 되면서 점차 변동을 맞고 있다. 그 결과가 이세계 판타지의 대유행일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판타지 라이트노벨만 흥하지 않는다. 과거 판타지와 SF만 존재했던 시장에 일상을 끌어들인 세카이계가 유행했던 점, 일시적으로 러브 코미디가 유행하고 이능배틀물도 하나의 장르로 성립했던 점 등, 라이트노벨은 언제나 다양한 장르를 탐하며 꾸준히 발매되고 있다. 2016년 극장가를 강타했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2016)』의 경우 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직접 라이트노벨로 옮겨 큰 히트를 치기도 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너에게/너를 사랑했던 한 사람의 나에게(2016)』 또한 평행세계를 소재로 한 로맨스 SF 라이트노벨로 현재의 유행과 상관없는 좋은 작품 중 하나이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라이트노벨의 유행이 계속해서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2018년 현재, 지금까지의 유행은 게임의 영향을 받은 이세계 전이/전생물이지만, 앞으로는 다시 새로운 작품이 나타날 것이다. 판타지 세계의 전생이 아닌 현대의 회귀물로써 『우리들의 리메이크(2017)』 도 최신작으로 존재한다. 기억을 지닌 채로 과거로 돌아가는 장르인 회귀물은 현재 한국 현대 판타지 웹소설과도 맞물리고 있다. 일본 라이트노벨의 미래가 한국의 웹소설 시장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되는 시점이 와서 새로운 발전을 맞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글을 마친다.
권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