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9월, 깊은 M자 이마와 큰 코를 지닌 멀끔한 체격의 남자가 이졸라 델 가르다의 네오고딕 양식 궁전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섬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볕에 탄 채 여독을 느꼈고, 품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에게 만족했다. ‘우리의 여정이 무엇보다 한 가지를 증명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라고 시피오네 마르칸토니오 프란체스코 로돌포 보르게제 10대 술모나 공이라 사회에 알려진 이가 썼다. ‘한마디로 베이징에서 파리까지 자동차로 여행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었지요.’ 그 자신이 일궈낸 업적이었으므로 너스레를 떠는 것도 당연했다.
몇 달 전인 1907년 1월 31일, 프랑스 신문 <르 마탱>이 1면에 도전 과제를 내건 게 발단이었다. ‘이번 여름에 베이징에서 파리까지 자동차로 일주할 이가 나올까?’ 페르시아를 여행했으며 모험을 즐겼던 보르게제 왕자는 프랑스 세 팀과 네덜란드 한 팀으로 이루어진 네 팀과 더불어 도전을 바로 수락했다. 멈 샴페인 한 상자, 즉 열두 병과 국가 차원의 영예가 유일한 상이었다. 자랑스러운 이탈리아 관료인 보르게제는 당연히 자국산 자동차를 쓸 거라 고집했다. 첫 자동차의 21주년을 기념할 정도로 자동차의 태동기였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적었다. 보르게제는 거슬리는 파피 레드(황적색)로 칠한, ‘힘차지만 무거운’ 40마력짜리 이탈라 모델을 토리노에서 들여왔다.
만리장성과 고비 사막, 우랄 산맥을 거치는 경주는 19,000킬로미터의 대장정이었다. 보르게제는 승리를 너무나도 확신한 나머지 경로에서 몇백 킬로미터 벗어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승자들과 축하연을 벌였다. 사람뿐 아니라 차 또한 긴 여정에 고생했다. 출발 전에 보르게제의 친구이자 기자인 루이기 바르치니는 이탈라에 대해 ‘목적의식과 행동에 대한 즉각적인 인상을 풍긴다’고 썼다. 러시아의 남동부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자동차는 처량해 보였다. 보르게제의 기계공인 에토레가 ‘세심한 외부 화장실’을 설치한 뒤에도 ‘자동차는 사람처럼 날씨에 시달려서 색깔이 진해졌’다. 결국 모스크바에 이르렀을 때 자동차는 ‘흙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 모두는 보르게제 팀이 파리 대로에서 승리의 질주를 할 때 경주 참가자와 그들을 아끼는 이탈리아의 팬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승리를 기리기 위해 자동차의 원래 색깔인 로소 코르사, 즉 경주의 빨간색이 이탈리아 경주 국가대표팀의 상징 색은 물론 이후 엔초 페라리의 자동차 색깔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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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말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저/이용재 역 | 윌북(willbook)
매일 색을 다뤄야 하는 사람이라면 색에 대한 깊은 영감을, 색과 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색을 제대로 이해하는 안목을 안겨줄 것이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기자, 작가. 2007년 브리스톨 대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에서 18세기 여성 복식사와 무도회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코노미스트>에서 ‘책과 미술’ 담당 편집자로 일하며, <텔레그래프>, <쿼츠>, <뉴 스테이트먼> 등에 글을 기고했다. 2013년 <엘르 데코레이션>에서 연재했던 칼럼을 정리한 책 <컬러의 말>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