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 “타인의 얼굴을 갖게 된 남자를 잊을 수 없었어요”
이야기는 작가의 안에서 샘솟는 거라고 여겼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야기는 이미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는 주파수로 존재해요. ‘안테나를 그 주파수에 맞추고, 떠도는 이야기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글ㆍ사진 성소영
201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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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5일 김경욱 소설가의 신작 『거울 보는 남자』 의 낭독회가 열렸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의 세 번째 작품인  『거울 보는 남자』 는 김경욱 소설가가 지난해 「현대문학」에 발표한 소설을 퇴고해 묶은 것으로 사랑과 욕망의 허상을 첨예하게 그리고 있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첫 기일, 우연히 남편의 얼굴을 이식한 남자를 길에서 마주치게 된 여인은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그 남자와 가까워지게 된다. 죽음 직전 누군가를 지키려했던 남편, 남편의 얼굴을 이식한 남자의 정체, 그리고 그에게 사랑을 느끼는 여인의 이야기가 정교하게 얽힌 소설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롭게 진행된다.


낭독회가 열린 장소는 마포구 연남동에 위치한 ‘돈키호테의 식탁’으로, 천운영 소설가가 운영하는 스페인 가정식 레스토랑이었다. 이번 낭독회는 김경욱 소설가의 따뜻한 낭독과 천운영 소설가가 직접 준비한 스페인 음식이 함께하는 낭만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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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려진 신문 기사에서 탄생한 소설


남편의 얼굴을 이식한 남자, 그로부터 묘한 이끌림과 사랑의 욕망을 느끼는 여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설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모티프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 김경욱 소설가는 외신에 실린 한 기사로부터 소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거울 보는 남자』 의 집필 과정을 소개했다.

 

“2년 전,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엽서를 한 통 받았어요. 봉투 안에는 엽서와 함께 시애틀 현지 신문을 오려 동봉한 기사가 들어있었습니다. 자살을 시도한 두 남자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한 남자는 자살을 시도한 부작용으로 얼굴이 무너져 내려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고, 한 남자는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목숨을 잃은 남자의 아내가 장기기증 의사를 밝혀, 얼굴 없이 살아가던 남성이 안면이식을 받을 수 있었죠.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병원에서는 기증자와 이식자를 만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얼굴을 기증한 부인이 두려워 결국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와 함께 온 엽서에는 ”이 이야기를 꼭 소설로 쓰셔야 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어요. 처음 그 기사를 읽었을 때는 결코 소설로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미 현실 자체가 너무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작가가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상상력을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처럼 보였죠. 그런데 계속 그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고요. 나와 같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던 누군가의 얼굴을 갖게 된 사람의 얼굴. 정확한 이목구비는 알 수 없지만 그 얼굴의 존재가 자꾸 맴돌았어요. 결국 책상에 앉아 첫 문장을 쓰게 됐죠.”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 이를 새로운 이야기로 엮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지만 김경욱 소설가는 머릿속을 맴도는 얼굴 없는 남자를 흘려보내지 않고 마침내 한 편의 소설을 완성했다. 수십 편의 소설을 집필한 그에게  『거울 보는 남자』 는 새로운 의미의 작품이다.

 

“이야기는 작가의 안에서 샘솟는 거라고 여겼는데 이 소설을 쓰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야기는 이미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는 주파수로 존재해요. ‘안테나를 그 주파수에 맞추고, 떠도는 이야기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면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기사를 보내주신 번역가 지인께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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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 소설가의 첫 낭독은 병원에 입원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남편의 머리를 여주인공이 잘라주는 장면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싶다는 남편을 만류했던 여주인공은 남편이 사고를 당한 이후, 자신이 머리를 자르지 못하게 해서 불행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사각사각 잘려 나가는 게 남편의 머리카락만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귀에 이어 이마, 면도로 볼과 턱까지 말끔하게 드러날수록 남편의 얼굴이 낯설게 다가왔죠. 창백한 피부, 꼭 감긴 눈, 핏기 없는 입술, 파르스름한 턱. 문득 두려운 기분에 사로잡혔어요. 가위를 든 내 모습이 마치 시신을 염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죠.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건 뒷정리를 위해 화장실에 다녀온 뒤였어요. 차가웠어요. 조금 전까지도 온기가 돌던 손이 대리석처럼 싸늘했어요. 발, 이마 할 것 없이 모두. (중략) 직선 위에 신이 없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죽음이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미용실에 못 가게 해서 사고가 난 건 아니라 해도, 마지막 머리 손질 때문에 영영 떠나버린 게 아니라 해도. 


 어떤 주검 앞이든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살인자예요. 차에 받힌 주검이든, 머리카락이 잘린 주검이든. 
- 36~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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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두 번째 낭독이 시작됐다. 남편의 얼굴을 이식한 남자와 여주인공이 만나 알아가고, 남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얼굴을 이식한 남자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미용사다.

 

 “정확한 사람.” 


 당신은 전해 들은 이름이라도 되뇌듯 중얼거렸어요. 


 당신과의 대화 속에서 남편은 아득하지만 가닿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은 다른 시간, 이질적 공간에 발 딛고 있는 존재 같았어요. 지구 반대편 어딘가로 삶의 터전을 옮긴 이민자처럼. 당신은 머나먼 외국에서 전학 온 아이에게 그 나라 얘기를 묻는 시골 아이처럼 굴었고. 호기심 어린 눈빛에 막연한 동경이 어른거리는 아이.
-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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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요리와 낭독이 함께한 시간


낭독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천운영 소설가가 직접 준비한 스페인 음식이 세팅되었다. 다진 야채와 상큼한 소스의 조화가 돋보인 에피타이저, 야채와 치즈로 속을 채운 가지요리, 와인과 무화과로 요리한 닭다리 구이, 마늘과 스페인 소시지를 곁들인 빵 등 다채로운 스페인 요리와 와인 한 잔이 깊어가는 가을밤의 낭독회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시작된 다음 낭독은 여주인공이 남편의 얼굴을 이식한 남자에게 면도를 해주는 장면이었다. 남편과 그의 차이점은 ‘구레나룻.’ 그 구레나룻을 밀면 남자는 남편과 같아질 수 있을까. 여주인공의 사랑은 완성될까.

 

 “직접 해줄래요?” 


 뜻밖이었어요. 


 당신은 선선히 면도기를 넘겼고 나는 당신의 구렛나룻을 조심조심 매만졌어요.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담뱃재를 떠올리며. 벼려진 칼날을 놀리기 전 담뱃불 붙이는 심정을 헤어려봤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절망적 마음을. (중략) 


 구레나룻까지 민 당신은, 남편보다 더 남편 같아진 당신은 대체 무엇으로 무거워졌을까. 


 비로소 당신의 본래 모습이 궁금해졌죠. 남편 형상의 주물이 되기 전에는 어떤 주형에 담겨 있었을까. 회묽은 새똥 눈물 흘리기 전에는 어떤 빛깔의 세상을 보았을까. 구레나룻을 잃은 당신이, 폭발 직전까지 갔던 당신의 뇌관이 샤워기 아래 식어가는 사이 나는 당신 지갑으로 손을 가져갔어요.
- 123~125쪽

 

“남자의 구레나룻이 사라진 순간 많은 비밀이 풀렸어요. 아내가 궁금해 했던 여러 가지 것들의 진실을 알게 됐죠. 어찌 보면 구레나룻은 동화  『푸른수염』 의 금기와 닮았어요. 푸른수염을 가진 영주가 아내에게 절대 맨 끝 방의 문을 열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이 남자의 구레나룻은 푸른수염의 비밀스러운 방과 같은 의미였던 거죠. 아내는 그 문을 여는 순간 자기 안의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돼요. 사고 당시, 남편은 누구와 동승을 했는지, 남편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존재는 누구였는지….”

 

마지막 낭독을 마치고 김경욱 소설가는 ‘얼굴을 이식 받은 남자’의 사연이 소설에 담기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각자 이 남자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을지 마음속으로 써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저는 어떤 소설이든 시작은 작가가 하지만, 완성은 독자가 한다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만의 이야기로 완성을 할 수 있는 거죠. 100명의 독자가 이야기를 읽으면 100개의 다른 이야기가 완성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 뒷부분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거울 보는 남자김경욱 저 | 현대문학
사랑했던 대상이 사라지고 난 다음 그 대상을 다시 구현해낼 수 있다면, 과연 그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사랑 이후’에 대한 사랑 소설이자 욕망에 대한 환상을 공허하고 고독하게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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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보는 남자 #김경욱 소설가 #타인의 얼굴 #사랑과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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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영

쓸수록 선명해지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