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방송작가였다고 말하면 처음 만난 사람들이 건네는 단골 질문들이 있다.
“연예인 누구랑 일해 봤어요?”
“친한 연예인 없어요?”
“누가 제일 잘생겼어요?”
주로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연예인하고 일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들의 흥미는 곧 시들해지고 만다. 하지만 내게도 쇼오락 프로그램을 구성할 기회가 일 년에 몇 번 있었다. 행사가 많은 부산에서 오랫동안 일한 덕분에 영화제나 아시안게임, 축제 특집쇼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지역에서 제작하지만 전국으로 방영되는 경우가 많아서 유명 가수들은 물론이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진행자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쇼ㆍ오락 프로그램을 스토리텔링할 때는 진행자인 MC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MC는 그 방송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시청자들이 가장 오랫동안 만나야 할 사람이다.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출연자와 무대들을 이질감 없이 이어주는 가교가 되어 주어야 하며, 쇼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전체 방송의 완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핵심 스토리텔러인 셈이다.
몇 차례의 경험이 쌓이며 내게도 마음속 ‘최악의 MC’와 ‘최고의 MC’가 나눠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부산에서 열리는 가장 큰 지역축제의 축하쇼를 맡게 되었다. 다행히 제작비가 적지 않은 편이어서 원하는 MC를 섭외할 수 있었다. 당시 인기 있는 가수들도 무난히 출연을 승낙하여 쇼 준비는 순풍에 돛 단 듯이 순조로웠다. 이렇게 별 노력 없이 일이 잘 풀릴 때, 나는 ‘방심’이란 것을 하고 말았다.
보통 쇼를 준비할 때는 녹화에 앞서, MC들을 미리 만나 쇼 성격도 설명해 주고 진행 시 주의점도 일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진행자는 워낙 베테랑 MC였고 그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사전 미팅이 어렵다고 알려왔다. 이메일로 방송원고와 큐시트를 미리 보내는 것으로 사전 미팅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부터가 나의 실수였다. 그가 녹화 당일까지 이메일을 읽지 않았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평소 ‘의전’에 굉장히 민감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본에 얽매인 진행을 싫어해서 원고에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써야 하며 글자는 최대한 크게 써 줘야 한다는 매뉴얼도 작가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사건은 녹화 당일 터졌다. 의전을 중요시하는 그가, 비행기를 타고 갈 것이라고 미리 알려줬건만 방송국 차량을 배정하지 않아 손수 택시를 잡아타고 행사장까지 오게 만들었다. 이미 그의 심기는 불편해져 있었다. 무대가 야외 축제 현장이어서 천막으로 만든 대기실을 썼는데 제작진은 MC만의 독립공간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는 출연 가수들과 천을 사이에 두고 같은 공간에서 대기해야 했다. 내가 원고를 전하러 갔을 때 그의 표정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 다른 MC들에게도 주던 형식과 내용으로 쓴 원고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곧 내 인생 최고의 모욕적인 순간으로 꼽히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가 나의 원고를 던져버렸다!
“뭐 이따위 원고가 있어! 진행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원고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내팽개치는 그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알길 없었던 나 역시 어이가 없고 분노가 치밀었다. 결국 나는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느라 방송에 전념할 수 없었고 그는 원고 대신 큐시트에 적힌 가수와 곡명만 보고 진행을 했다. 녹화 후 PD와 편집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제작비를 가지고, 이렇게 재미없는 쇼를 만들다니!”라는 반성으로 괴로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최악과 최고의 차이가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이란 점이다. 이듬해 다시 똑같은 쇼를 준비하게 되었다. PD는 다른 MC를 찾자고 했지만 나는 오기가 생겼다. 자진해서 서울에 출장을 갔다. 그 MC를 만나 작년의 행사 때 준비가 미흡했음을 사과했다. 그리고 원고를 쓸 때 참고할 것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자신은 흥이 나야 쇼 진행을 재미있게 할 수 있으며 그러려면 원고를 따라가기보다 그때그때 애드립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부산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그가 진행했던 프로들을 찾아봤다. 그가 자주 쓰는 어휘나 문장은 무엇인지, 어떤 자세로 멘트할 때 제일 편해하는지, 진행 스타일이 어떤지 공부했다. 그가 혼자일 때보다 자신의 애드립을 받아주는 보조 MC와 함께할 때 훨씬 안정감 있는 진행을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가 평소 쓰는 단어들을 배치해서 원고를 작성했고, 한 곳에 서 있기보다 무대에서 움직일 때 훨씬 자연스러운 진행을 한다는 특징을 찾아 출연자들과 무대 중앙에서 이야기할 기회를 늘였다. 그해 축하쇼는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 흥이 난 MC가 신명나는 진행으로 현장에 있는 관객들과 함께 웃고 춤추며 생동감 있는 쇼를 완성했다. 원고를 만들기 위해 MC의 말투와 행동, 성격을 연구하며 말맛을 살리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때 방송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했다. 작가반 수업이 열리면 첫 시간에는 주로 방송 글의 특징을 설명했는데 특히 문어체와 구어체를 비교하여 일반적인 글과 방송 글의 차이를 이야기하려 했다. 방송작가는 ‘글을 쓰듯이’가 아니라 ‘말을 하듯이’ 대본을 써야 한다. 라디오를 듣거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작가가 쓴 글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기 때문이다. 대화가 자막으로 다시 화면에 새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리로 공중에 흩어진다. 방송작가 지망생들에게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연습시키는 이유도 그렇다.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문어체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쓰는 구어체로 글쓰기 연습을 시작하면 좋다. 문어체는 문장이 도중에 불완전하게 끝맺을 수 없지만 구어체는 듣는 이가 이해하는 상황이면 완전하지 않아도 도중에 끝낼 수 있다. 문어체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속도가 늦고 되도록 표준말을 쓰도록 한다. 한자어나 옛말이 사용되어도 상관없다. 구어체는 유행과 시대에 따라 말의 변화속도가 빠르다. 말하는 이의 개성을 살려 현재 두루 쓰이는 말이나 유행어를 써도 괜찮다. 한마디로 구어체는 현재에도 변화를 계속하는 좀 더 생생한 표현이며, 나 자신이 생활 속에서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구어체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일상에서 나누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낱말을 쓸수록 좋다. 듣는 이가 누구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한자어나 외래어보다는 쉬운 우리말을 쓰고, 추상적인 표현보다는 구체적이고 정확한 어휘를 선택한다.
다음으로, 문장 구조가 짧고 단순할수록 좋다. 길어질수록 말하는 내용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고 전달하려는 바가 분명치 못해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다. 설명하고 싶은 내용이 많다면 한 문장의 호흡을 길게 가져가기보다는 여러 문장으로 나누어주는 편이 낫다. 간결한 문장은 전하려는 생각이나 감정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낸다. 최소한의 주어와 서술어로 이뤄진 문장들은 강인한 힘마저 느껴진다. 강조하고 싶은 바를 담은 문장일수록 짧게 쓰는 것이 좋다.
방송 대본의 원칙 중에, 쉽고 보편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짧고 단순한 문장을 구성하라는 것이 있다. 방송작가들이 숫자를 다루는 방식에 주목해 보자. 예를 들어, 산불이 발생해 ‘40ha의 산림을 태웠다’는 표현보다는 ‘축구장 56개에 해당하는 면적이 불탔다’는 표현이 듣는 이들에게는 더 잘 와 닿는다. 가늠하기 어려운 숫자나 생소한 단위를 사용할 때도 한 번 더 풀어서 설명해 줘야 한다. 독자나 시청자들이 제시된 수치를 체감할 수 있도록 단위를 변환하거나 친근한 비유 대상을 찾아 알려주는 것도 방법이다. 가령, 집이나 건물의 면적을 이야기할 때 제곱미터 단위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지만, 아직 사람들이 낯설게 느끼는 표현이다. 이럴 땐 ‘3.3㎡, 즉 한 평당 임대료가 10만 원’이라는 식으로 들려주는 것이 좋다.
나는 방송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늘 시집을 선물한다. 후배나 제자들은 내가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 한껏 기대했다가 얇은 시집을 내미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곤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이 손사래를 치는 일을 시킨다. 바로 시 낭송이다. 집에 돌아가면 선물한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반드시 낭송해볼 것. 물론 내 선물과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거란 확신으로 지금도 시집 선물을 계속하고 있다.
시는 리듬이 있는 글이다.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말의 가락, 즉 운율 때문이다. 시에서는 이 운율을 사용해 리듬감을 살리고 읽는 이로 하여금 시인이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시는 낭송을 했을 때 비로소 그 어휘들의 아름다움과 시인의 감성이 보다 잘 전달된다.
자신이 쓰려는 글들도 낭송했을 때 리듬감이 있으면 더 빨리 읽히고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생길 것이다. 운율을 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 일정한 글자 수를 반복하기, 같거나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하여 주제를 강조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내가 쓴 글에 리듬을 줘야겠다고 자각하고 대본을 쓴 이후 가장 달라진 점은 방송 중 내 글을 읽는 MC나 DJ, 내레이터들의 실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이다. 리듬을 가진 글은 읽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편히 대할 수 있어 마음의 안정을 준다.
말은 하고 나면 수정이 어렵지만 글은 쓰면서 얼마든지 더 적합한 단어로 바꿀 수 있다. 문단의 순서를 이리저리 옮겨볼 수 있으며 정보나 논리가 취약한 부분은 보충할 수 있다. 말하듯이 초고를 쓰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나가는 식으로 퇴고를 여러 차례 거치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근사한 글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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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글 심폐소생술김주미 저 | 영진미디어
짧은 문장부터 한 편의 글까지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 팁을 비롯해, 어떻게 하면 글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지 등 글쓰기 기법과 ‘작가’로서의 태도를 모두 엮었다.
김주미(작가)
방송국에서 라디오작가와 TV 구성작가로 20년 일했다. 이후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을 비롯해 공공도서관, 문화원에서 글쓰기와 드라마 인문학 강의를 진행한다. 방송작가 시절부터 겪어온 글쓰기의 시행착오를 기록, 공유하고자 카카오 브런치 매거진 『방송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연재했고 브런치북 프로젝트 금상을 받았다. 현재 미디어 비평가이자 작가로 살며, 읽고 쓰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