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어떻게 그림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그림책 작가 김남진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그림을 시작했는데 그리는 게 점점 좋아졌어요. 그 뒤로 그림 그리기는 저에겐 너무 당연한 일이었어요. 멋있는 그림과 잘 그리는 사람들을 동경하며 늘 그림을 그렸어요. 한때는 만화가를 꿈꿨고요. 자연스레 미대에 진학했지요. 대학에서는 단순히 그림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해야 할 넓은 세계를 만난 듯했어요. 그래픽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만났고 그 길을 가기로 했죠. 졸업을 하고 디자이너가 되었는데 몇 년이 지나니 슬프더라고요. 사라지는 작업을 하는 느낌이랄까요. 광고 디자인 쪽은 짧으면 몇 주, 길면 한 달 정도면 다 사라져요. 그때부터 목마름이 있었어요. 오래 남을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점점 커졌죠. 그때 그림책 몇 권이 떠올랐어요. 대학교 4학년 때 혼자 떠난 유럽여행에서 만났던 그림책들이었죠. 당시에 그림책이 아트가 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이야기와 그림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매력적인 장르이고요. 마음속 어딘가 ‘내 이야기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라는 꿈을 품게 되었죠. 디자이너로 4년을 보낸 후, 그림책 작가로의 꿈을 꺼냈답니다.
하얀 사람은 하얀 세상에 우연히 들린 여행 이야기예요. 실제로 모험이나 여행을 좋아해요?
네, 많이 좋아해요. 제 또래에 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많이 다녀본 것 같아요.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에요.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걸 받아들이는 데 두려움도 없고요. 또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야기 수집하는 걸 즐겨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는 걸 즐긴답니다.
여행을 할 때 관광지를 즐기는 편은 아니에요. 그 지역 사람들을 관찰하는 편이에요. 말도 나눠 보고 현지인의 삶에 녹아들려고 해요. 주로 골목 탐험을 해요. 우선 발길 닿는 곳으로, 사람이 많은 관광지를 등지고 길을 걷기 시작해요. 그럼 멀지 않은 곳에서 그곳만의 생활을 만날 수 있어요. 동네 식당에 가서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 보고 카페나 슈퍼에 들러 일상을 함께해 보는 거죠. 친절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요. 저는 원주민들을 이방인으로 궁금해하고 원주민들은 저를 이방인으로 궁금해 하죠. 서로의 궁금증이 잘 맞물릴 때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해요. 식사초대를 받기도 하고 동네안내를 받기도 하죠. 물론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아요. 서로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반응하는 것 같아요. 이것도 많이 다니다보면 노하우가 생겨요.
이런 여행 스타일 때문인지, 제가 추구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현실적 판타지’예요. 판타지라고 해서 특별하고 특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일상에서도 충분히 판타지는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같은 공간을 여행자의 눈으로 보는 거예요. 저는 제 일상이 판타지처럼 보이는 게 참 좋아요. 물론 제 이야기를 보고 읽으시는 분들도 스스로의 삶을 여행자의 눈으로 보고, 판타지를 찾아보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이야기를 어떻게 떠올리게 되었나요?
처음 이야기를 썼던 건 2015년 초 겨울이에요. 눈 구경을 하려고 폭설을 뚫고 강릉으로 여행을 갔었어요. 그쪽에 사는 친구들이 있어서 도움도 받으면서 눈 구경을 엄청 했어요. 그러다가 용평 스키장에서 일하는 친구를 보러 스키장에 갔어요.
스키장에 갔더니 사람들이 모두 스키복을 입고 있더라고요. 또 친구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저 혼자 다녔는데 뭔가 이방인 같았어요. 산 정상이나 구경해야겠다 싶어서 곤돌라를 타고 스키복을 탄 사람들과 함께 정상으로 향했지요. 튀어 보이긴 했는데 짐짓 모른척했어요. 곤돌라에서 내려서 20분 정도 올라가면 산 정상이에요. 눈이 많이 와서 풍경은 참 멋졌어요.
혼자서 정상에 앉아서 구경도 하고 이런저런 상상도 하다가 심심해서 눈사람을 만들었어요. 간식으로 가져간 방울토마토를 코로 달아주고 눈과 입도 예쁘게 만들었죠. 괜스레 좋아서 그 주변에서 좀 더 머물렀는데 정상에 온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제가 만든 눈사람과 사진을 찍고 가더라고요. 심지어 제가 빤히 구경하고 있으니까 한 분이 “사진 찍어 드릴까요?” 하고 물으시더라고요. 얼떨결에 사진도 찍었죠. 그 눈사람 덕에 모두가 소소하게 행복해졌어요. 그때 그 산 정상에서 ‘하얀 사람’이야기를 20여분 만에 썼어요.
눈 쌓인 곳에서 이방인 같이 홀로 앉아 있던 제 모습과 더불어 눈사람 하나로 모르는 타인들에게 미소를 안겨 준 행복감이 어딘지 모르게 신선했지요. 그 기억을 꼭 붙들고 싶었지요.
그림책 속 하얀 나라는 눈 쌓인 풍경 같기도 하고 모래사막 같기도 해요. 독특한 식물들도 눈길을 끌고요, 참고한 풍경이나 대상이 있을까요?
특별히 참고한 이미지는 없어요. 그냥 제 무의식에서 나온 것 같아요. 저는 전화 통화를 하거나 혼자 공상에 빠지게 되면 되는대로 낙서를 해요. 그때 나온 몇 개의 이미지를 위주로 작업을 했어요. 부드럽고 포근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싶었고, 흰색이면서도 따뜻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연필로 그렸던 아이디어 스케치가 마음에 들어 ‘이걸로 가자’라고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시작했어요. 그 그림은 하얀 사람 작업이 끝날 때까지 제 작업실 벽에 계속 붙어 있었답니다.
여백과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 같아요. 마치 그 공간 속에 같이 있는 느낌이 들어요. 공간 연출을 하면서 특별히 고려한 점은요?
저에겐 상당히 어려웠던 작업이에요. 제 첫 책 『레니와 빌리의 빨간 풍선』 을 보면 제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어요. 화면을 꽉 채우고 색을 많이 쓰는 걸 좋아하지요. 그러다 보니 비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답니다. 그리고 가로로 긴 레이아웃으로 책 전체를 이끌어 가는 게 참 어렵더라고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어요. 작업 기간도 3년이나 걸렸어요. 중간 작업은 정사각형의 레이아웃이었다가 다시 긴 판형으로 돌아갔죠. 제 이야기와는 긴 판형이 확실히 어울리더라고요. 길고 긴 작업을 통해 비움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비운다고 해서 또 비어 있는 느낌이 들면 안 되니까, 그걸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고민도 많았고요. 보는 이의 궁금증이 빈 여백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으로 장면을 꽉 채우기보다 살짝 흔적들만 보여주고, 보는 이들이 상상력으로 그 공간을 채운다면 멋진 판타지 책이 되지 않을까 싶었죠. 비웠지만 절대 비어 있지 않은 공간, 그게 이 책을 연출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부분이에요.
주인공 캐릭터는 소년 같기도 하고 아저씨 같기도 해요. 콧수염도 있네요. 주인공뿐만 아니라, 하얀 나라의 하얀 사람들도 재미있어요.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해서 작가가 말을 걸고 있는 듯해요.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일상에서 마법 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나지만 일상에 파묻혀 신비로운 일들을 많이 지나친다고 생각해요. 『하얀 사람』 은 눈사람을 처음 만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예요. 눈사람을 보면서 처음 만든 사람을 궁금해하지는 않잖아요. 익숙한 눈사람을 새롭게 보고 싶었죠.
사실 책에는 이름이 쓰여 있지 않지만 주인공에 붙여준 이름이 있어요. 조각가 ‘네모네’예요. 네모네 씨는 저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하얀 세상에 우연히 가게 되는데 엄청난 모험을 한다기보다 주변을 둘러보고 그곳에 만난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고 돌아오죠. 소소한 여행이었지만 파장은 작지 않아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니 변화가 생겨요. 처음으로 눈이 오고 눈사람을 처음 만들게 되지요. 이런 일들로 인해서 눈사람을 만들게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았어요.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이 생긴다면 지금 이 세상이 더욱 풍요롭고 행복해진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상상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걸 숨기지 않고 싶었어요. 있을 법한 이야기로 시대나 공간을 한정하기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는 사람들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고 싶었어요. 최대한 특정한 지역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게 목적이었어요. 우리가 사는 어느 곳일 수도 있고, 어느 외국일 수도 있고, 미지의 어떤 곳이라고 해도 그려려니 할 수 있는 모습을 떠올렸죠. 사람들의 얼굴이나 옷차림새를 그릴 때도 어느 특정한 지역으로 국한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존재하고 이해되는 사람들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드신 적이 있을까요? 평상시 여가 시간에는 어떤 일을 하세요?
저는 한 가지 일에 꽂히면 그걸 꽤 오래 하는 편이에요. 질릴 때까지 하고 다른 일로 넘어가죠. 작년에는 코바늘뜨기에 꽂혀서 쉴 새 없이 모자와 목도리를 만들었어요. 만들고 싶은 만큼 만들었죠. 그 다음에는 음식 만들기에 꽂혀서 김치도 담아 보고 만두도 빚고 칼국수를 만든다고 면도 뽑았죠. 요즘은 돌을 모으는 취미가 생겼어요. 주운 돌에다 얼굴을 그려 주고 있어요. 좀 무거운 취미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돌멩이들이 눈에 자꾸 들어와서 안 주울 수가 없더라고요.
『레니와 빌리의 빨간 풍선』 에 이은 두 번째 작업이에요. 보통 두 번째 그림책이 첫 번째 그림책보다 곱절은 어렵다고들 해요. 작업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정말 두 번째 책은 많이 어렵더라고요. 많이 헤매고 고민하고 또 울기도 했던 것 같아요. ‘나는 재능이 없나 봐.’라고 징징거리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었으니까요. 편집자들과 디자이너들이 많이 함께 고민해 주어서 끝까지 힘이 된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감사~)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와 보니, 과연 나올까 했던 책이 마무리가 되었네요. 처음에 스키장에서 떠올린 영감이 그림책이 되기까지 거의 4년이 걸렸어요. 그 오랜 시간 품은 이야기가 책으로 된 것 자체가 감동이에요.
작가님의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넨다면요?
SNS로 보이는 것들이 많아져서인지, 타인들의 삶이 더 좋아 보일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내가 가진 것은 별 볼일 없고 남의 것들이 더 커 보일 때가 있죠. 그럴 때 내 상황을 타인의 상황으로 치환해서 새롭게 바라보면 어떨까 싶어요. 다른 눈으로 보면 내 상황에서도 특별함을 찾을 수 있지요. 제 이야기의 대부분 그런 시선과 일맥상통해요. 제 삶을 타인의 삶이다 생각하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럴싸해 보이더라고요. 발견의 즐거움이 쏠쏠하고요.
독자 여러분도 일상에서 판타지를 찾아보셨으면 해요. 정말 꽤 재미있어요.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개인의 역사가 되는 것도 흥미롭고요. 저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가 궁금해요. 그래서 저 스스로를 ‘스토리 콜렉터’라고 이름 붙인 거예요. 헤헤.
준비하고 있는 다른 이야기들을 살짝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고양이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요. 요즘은 고양이 이야기가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는데….(후후) 마침 저도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이름은 ‘알렉산더 크림 킴 장 은시크’ (@eunseeke)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은식이’라고 불러요. 고양이를 키우다 보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기죠.
지금 준비하는 이야기는 ‘은식이’ 얘기는 아니에요. 그냥 친구랑 뜬금없는 논쟁 중에 떠올랐어요. 몸에 길게 난 하얀 털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런 털을 ‘고양이 털’이라고 해요. 그 털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보았지요. 지금 준비하는 이야기도 일상 속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해요. 평범한 것들 속에 깃든 특별한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랄까요. 다음 책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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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사람김남진 글그림 | 사계절
똑같은 길을 따라 늘 비슷비슷한 일상을 걷는 이들에게 한 번 잠깐 샛길로 빠져 보자고 하는 이야기를 만나 봅니다. 여행을 하는 듯, 새로운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어 봅니다.
이지연 (어린이책 편집자)
어린이책 편집자입니다. 작가와 연애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만듭니다. 연애에는 소질 없는 게 분명합니다.